엣날 왕십리 전차종점이 있었다
어릴 때 북아현동이 집이었던 나는 동리 또래들과
왕십리 까지 전철을 타고가서 중량천까지 걸어가
고기잡고 놀던 생각이난다
그때의 친우 방군은 지금 미국 씨에틀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들과 비오는 날 왕십리 중량천에서
뛰어 놀던 추억을 생각하며 무학대사와 얽힌
왕십리의 유래를 적어본다
60년대 중랑천
미군 장교로 주한 미군 부대에서 60년대 후반 복무하였던
Homer Wiliams 씨가 찍은 사진이다
無學大師 그는 서기1327년 고려 충숙왕14년에
태어나 1405년 조선 태종 5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려의 개경이 아닌 새로운 도시를 세울 것을
태조에게 건의하고 전국을 누비다가 삼각산에 올라
새로운 도시건설과 궁궐터를 생각하게 되었다
궁궐의 터는
첫째.지금 연세대학교에서 망원동까지
둘 :도봉산과 백운대의 동쪽이며 수락산과 불암산의
서쪽인 창동일대
넷째:한강변 동쪽 지금의 왕십리일대
이중 무학대사는농사를 지을 물과 서울에 들어올 수문
곧 뱃길을 생각해서 넷째번 왕십리 일대를 마음에 두고
현지 조사차 탐방에 나섰다
물이 가깝고 평지라서 좋기는 하나 뒷산이 마땅치 않아서
아쉬운 감이 들었다
그래서 뒷산이 없음을 아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형을 관찰해 나가는데
“이놈의 소야 무학이 같은 소야”
이런 소리가 들렸다
정신없이 궁궐 위치를 머리로 그리며 정신없이 자기 생각만 하고 있던
무학대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누가 나를 불러? 누가 소를 나에게 비유해?”
이러면서 소리가 난곳을 보니까 왠 농부 하나가 소를 부리며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이 미련한 소야 꼭 무학이처럼 미련하구나”
더 뚜렷하게 자신을 소에다 견주는 것이었다
“아니 노인장 제가 무학인데 어찌 그리 미련하다 하시오”??
“그래 미련하지 않다는 말이오? 여기는 여름 물난리가 잘나는 곳이오
왜적이 처들어 올 때 방어할 곳도 없소 배산 입수에서 입수는 좋으나
배산이 없지않소 뒤에는 산 앞에는 물 이것이 조화되지 아니한데도
여기에 서울을 삼고 궁월을 지으려 하오? 그러니 미련하다 하오“
“아!! 그렇다면 어찌 하오리까??”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들어 가시오 갈 왕(往) 십리(十里) 왕십리를
하란 말이오“
무학대사는 크게 놀라 깨달아 큰절을 올렸다
“어이구 고맙습니다 노인장 나중에 제가 도읍을 정한 뒤에 다시 찾아 뵙고
후히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며 이런 말을 하였는데 일어서서 보니 농부는 온대간대
없이 살아졌다
“응? 어디 갔자?”
“이상하다 분명 이 밭을 갈았는데 이상하다 가보자“하고
그 밭을 들여다 보니 돌하나가 있었다
그돌에 글이 있기를 “무학이 잘못 찾아왔다고 도선이 말한다”
라 쓰여 있었다 도선(道詵)은 신라말에 우리나라 풍수지리 학설을 만들어서
퍼트린 풍수의 시조이다
“아!! 도선대사가 새나라를 위하여 어리석은 나를 깨우처 주셨구나
그렇다면 이곳을 往十里라 하고 저위를 도선동 (道詵洞)이라 하자,,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왕십리와 도선동이 생긴 유래로
전설 같은 왕십리가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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