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화분을 들다가 허리가 뜨끔하더니
다음날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왔다
출타중이 었던 마누라 혼자 기다 싶이
택시를 타고 오00 정형외과에 도착하였다
진찰을 받고 처방을 받은 다음 물리치료실로 향했다
물리치료실은 2층 데스크에 파란 제복을 입은
젊은 선생들이 있어 3호실로 들어가란다.
침대에 누우라는 말에 그야말로 슬로비디오처럼
모션을 취하는 중 밖에 있던 마누라가 걱정이 되어
전화가 왔다
“병원에 잘 도착 하셨나요?”
그때였다
지켜보던 앳된 제복입은 여인은 터미네이터처럼
굳은 얼굴로 내게 명령하듯 외쳐대었다
“빨리 올라가세요 빨리”
엉거주춤한 채로 그에게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한발자국 움직이기도 힘든 사람한데 왼 재촉이냐?”
그는 대꾸도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침대에 눕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찜질 팩을 등에 대고 나간다
이에 전자 부황기를 등에 붙이고 치료를 끝낸 나는
데스크에 나가며 예의 젊은 처자를 찾았다
“아 !!! 그선생님 잠시 나갔는데 조금 기다리시면 만나실수
있습니다“
드디어 들어오는 아가씨에게
“아 !! 선생님 이 환자분께서 보시자 하는데요”
“이보세요 조금전 한발자국 움직이기 힘든 사람에게
빨리 침대에 눕지 못한다고 재촉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는 예의 그 무표정의 기계적인 모습으로
“우리는 마냥 기다릴 수 없어요!!”
화가난 나는 드디어 참을 성을 잃었다
“선생이라 함은 존경받을 만 해야 선생님이지
당신 할아버지 한데도 그런 식으로 할 거야 엉“
그는 바쁘다며 대꾸도 없이 치료실로 들어간다
내가 언성 높여 크게 꾸짖으니 데스크에 있던
한 여인이 “제가 여기 책임자인데 제가 사과드립니다”
허나 나는 그 쌀쌀 맞은 아가씨가 사과하기를 기대했다
허나 그는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를 갑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내가 갑인가 그가 갑인가 혼란스럽고 갑질이란 소리들을까
병원을 나섰다
다음날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어제 병원 데스크에 전화를
하였다
“어제 큰소리 친게 미안합니다 하지만 환자에게 빨리 빨리
올라가라 독촉 하는게 어디 있습니까. 앞으로 그러지 않게
해 주세요“
“아!!! 고마워요 이제것 이런 전화 받는건 처음입니다
몸이 불편하시면 나오세요“
그러나 마음이 쓸쓸하여 집에서 요양 중에도 앳된 물리치료사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과연 누가 "갑"인가 병원인가 환자인가???
마누라는 이르기를
다리 아파서 거기 갔을 때 물리치료사들이 할머니들 마구
구박하는거 보았다 하며 환자가 많아 그런가 보니 그만
서운해 하라 하였다
1820년5월12일
이탈리아 피란체에서 출생
나이팅게일이 일한 세쿠타리 병원. 나이팅게일과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헌신으로 환경이 개선되었다
나이팅게일이 열병치료를 마치고
세쿠타리에 돌아온 모습을 그린 그림. 제리 바렛.
<나이팅게일 선서>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OM, 1820년 5월 12일~1910년 8월 13일)은
영국의 간호사, 작가, 통계학자이다.성공회의 성
인이기도 하며, 성공회에서는 8월 13일을 나이팅게일의
축일로 지키고 있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타임스 신문에서 읽은 뒤 자극 받아,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신교 목사가 운영하는 독일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853년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이듬해 크림 전쟁(1854년~1856년)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스쿠타리의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흔히 나이팅게일 하면
고통 받는 부상병들을 돌본 봉사자를 연상하지만
이 시기의 나이팅게일은 유능한 행정가 협상가였다.
그는 관료주의에 물든 군의 관리들을 설득했고,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했으며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웠다.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는
사실은 나이팅게일이 뛰어난 행정가임을 말해준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써 조선의 의녀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도 많은 병원 및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남북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로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만국 적십자사에서는 '나이팅게일 상'을 설정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표창하고 있다.
조수미(曺秀美, 영문 이름: Sumi Jo, 1962년11월22일)는
대한민국의 소프라노 성악가이다.
초등학교때 성악을 시작하여
선화예중·선화예고 를 거쳐 학과 개설 사상 최고 실기 점수로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1983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해 5년제 학교를 2년만에 초고속으로 졸업했다.
1985년 나폴리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1986년 트리에스테
의 베르디 극장에서 《리콜레토》의 '질다' 역으로 첫 주연 데뷔했다.
1988년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서
오스카 역으로 플라시도 도밍고 등과 함께 녹음에 함께 참여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오디션에서 명 지휘자 카라얀은 조수미에 대해
"신이 내린 목소리"라며 극찬했다. 또한 주빈 메타로부터 "100년에
한두 사람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세계 5대 오페라극장을 섭렵하면서 게오르기솔티 주빈메타
알프레드 크라우스 로린마젤 등의 명 지휘자와 함께 마술피리 등
여러 오페라에 출연했다.
1993년 게오르기솔티와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없는 여인》은
그래미상 클래식 오페라 부문 최고 음반에 선정됐다. 1993년 이탈리아 최고
소프라노에게만 준다는 황금 기러기상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이탈리아인이
아닌 사람으로써는 처음으로 국제 푸치니상을 수상했다. 2011년
기준으로 25년차 성악가로 1년에 300일 이상 세계 각지에 공연을 다니고 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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