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이순신제독과웰슨제독

이모르 2020. 12. 14. 17:23

 

요즈음 방송사극 “징비록”을 보다가
차마 볼수 없어 채널을 돌리고 만다

징비록은 유성룡의 7년전쟁의 생생한 일기체

기록으로  연속극 또한 사실에  입각하여 전개 된다

선조
자신은 도망하면서 충신들의 인기를
시기하여 무참히 살해 하고 적전 무장해제
시키는 무능에 그만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게된다

 

여기 이순신 제독 과 영국 넬슨 제독의
위대한 인간상과 전투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언은 너무나 닮았기에 두분의
마지막 말을 백과사전을 찾아 올려보았다  

 

 

유성룡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1]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중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 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이순신의 마지막말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투가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순신의 조카 이분(1566~1619)이 쓴 행록(行錄)이다.

행록이란 특정한 인물의 발언과 행적 등을 기록한 책으로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분이 행록을 정확하게 언제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순신이 전사한 것은 1598년이고 행록은 쓴

이분이 1619년에 사망했으므로 행록은 1598년에서 1619년 사이

어느 해에 쓰여진 것은 분명하다. 이순신의 행적은

여러 책에 실려 있지만 출생부터 전사까지

이순신의 생애를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로 묘사한 책은 흔하지 않다.

기껏해야 임진왜란을 다룬 책에서 이순신의 행적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거나 혹은 전쟁 중

이순신의 업적만을 묘사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허레이시오 넬슨 자작

(Horatio Nelson, 1st Viscount Nelson, KB,

1758년 9월 29일~1805년 10월 21일)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영웅으로 부상하였으며,

전쟁이 한창중이었던 1813년 로버트 사우디가

그의 생을 노래한 시를 쓰기도 했다.

 

 

 

 

 

 

 

넬슨의 마지막말

넬슨의 사망 당시 곁에 있었던 빅토리 호의

외과의사 윌리엄 비티(William Beatty)에 따르면

 

넬슨의 마지막 말은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였다고 한다.

 

그는 말을 할 수 없게 되기까지 이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의식이 있던 상태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자리에 함께하였던 군종 알렉산더 스코트(Alexander Scott)와

경리관 월터 버크(Walter Burke)의 증언에 따르면 넬슨의

마지막 말은 'Drink, drink. Fan, fan. Rub, rub' 이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죽음에 임박한 넬슨의 갈증과 고열, 그리고 통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하디, 키스해주게(Kiss me, Hardy)'는 그가

빅토리 호의 선장 하디에게 한 말이었지만 마지막 말은 아니었으며,

임종 당시 하디는 갑판에 불려간 상태로 곁에 있지 않았다.

'Kismet, Hardy' 라는 설도 있지만 당시 'kismet' 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범주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손상을 입은 빅토리 호는 견인되어 지브롤터로 이동하였고,

넬슨의 유해는 브랜디 술통에 보존되어 옮겨졌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전투 중에 프랑스로부터 노획한

브랜디였다고 하며, 이후 약간의 독주를 들이키는 것을

가리키는 'Tapping the Admiral' 이라는 구문의 어원이 되었다.

런던으로 온 그의 유해는 국장으로 장사 지내졌으며,

넬슨은 왕족이 아니면서 국장의 예우를 받은

5인(웰링턴 공작과 윈스턴 처칠 포함) 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성 바울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유해를 담은 관은

나일 해전 때 침몰하였다가 회수된 로리앙(L'Orient) 호의

돛대로 만들어졌으며, 이 나무 관은 추기경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를 위해 제작되었다가

헨리 8세에 의하여 몰수되어 궁에 보관 중이었던

석관 안에 놓였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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