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의 맏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고,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순찰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밤;집안을 둘러보던 퇴계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순간 퇴계 선생은
얼어 붙는 것 같았습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엿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형은 바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여보, 한 잔 잡수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퇴계 선생은 생각했습니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이냐?젊은
저 아이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습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서로가 서로의
마음을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것이기 때문에 퇴계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퇴계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습니다.
몇 년후 퇴계선생은;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선생이 좋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음식들만 올라온 것입니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혹시 며느리가
개가하여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퇴계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며 주었습니다.
신어보니 퇴계선생의 발에 꼭 맞았습니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퇴계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개가시켰습니다.
이 일을 놓고 유가의 한 편에서는 오늘날까지
퇴계선생을 비판하고있습니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다.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다."
하지만 또다른 한 편에서는 정반대로
퇴계선생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을
올바로 지킬 줄 아는 분이시다.
윤리를 깨뜨리면서까지 윤리를 지키셨다."며..
친구들 생각은 어때요 ??
이황(李滉, 1502년1월3일(1501년 늠력11월25일)-1574년1월3일
(1570년 음력12월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시인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이다.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대학자 이언적의주리론의 영향을 받고
이를 계승하여 집대성시킴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꼽힌다.
이언적 으로부터 계승된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토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사적 제170호로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 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이황을 모신만큼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 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율곡이 퇴계에게'
溪分洙泗派
峯秀武夷山
恬計經千卷
行藏屋數閒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簡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閑
시냇물은 수사(공자를 뜻함)에서 나뉘고
봉우리는 무이산(주자를 뜻함)처럼 빼어났네
살림살이는 경전 천 권이요
거처는 두어 칸 집뿐이로다
회포를 푸니 맑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듯
웃으며 나누는 얘기는 거친 물결을 잠재우네
소자는 도를 듣고자 함이니
반나절 한가로움 헛되이 보냈다 마옵소서
율곡이 처가(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퇴계 선생을 찾아
(율곡의 나이가 23세, 선생의 나이가 58세)
시 한 수를 읊어 바쳤다
'퇴계가 율곡에게'
病我로關不見春
公來披豁醒心神
已知名下無虛士
堪愧年前闕敬身
嘉穀莫容梯熟美
纖塵猶害鏡磨新
過情時語須刪去
努力工夫各日親
내 병들어 문닫고 누워 봄이 온 줄 몰랐는데
그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구나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는데
지난 날 나는 몸가짐도 제대로 못해 부끄럽소
깨끗한 곡식에는 강아지풀 용납할 수 없고
새로 닦는 거울에는 티끌도 침범할 수 없다오
부질없는 이야기는 모두 제쳐 놓고
힘써 공부하여 우리 서로 친해보세
율곡의 헌시(獻時)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화답 하였다
한오백년의 가사
※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을 살자는데 웬 성화요
(1)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2) 뒷동산에 후원에 칠성단(七星壇)을 모고 우리 부모님 만수무강을 빌어 보자
(3) 백사장 세모래 밭에 칠성단을 모고 님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4) 청춘에 짓밟힌 애끓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리
(5)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살겠네
(6)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꼬
(7) 내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님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
(8) 지척에 둔 님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보리
(9)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런가 왜 이다지도 앞날이 암담한가
(10) 십오야 뜬 달이 왜 이다지도 밝아 산란한 이내 가슴 산란케 하네
(11) 청천에 뜬 저 기러기 어디로 가나 우리 님 계신 곳에 소식이나 전하렴
(12) 으스름 달밤에 홀로 일어 안오는 님 기다리다 새벽달이 지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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