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불교4대성지

이모르 2021. 1. 22. 16:31

(불교 4대 성지 룸비니.부다가야.사르나트.쿠시나가라)

 

 

 

불교 4대 성지 지도

 

불교의 발생지 인도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황하문명과 더불어 세계 4대문명으로 불리우는

인더스문명은 이미 BC 2300년부터 최전성기를 맞기 시작하여 BC 1800년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번성시대를누렸다.

BC 1000년 경에는 아리아인의 진출로 갠지스강 유역까지 확장, 발전하게 된다.

이후 17세기부터 시작된 서방국가의 잦은 침입으로 결국 18세기 후반에는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며,

이때 마하트마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이라는민족주의 운동이 전 인도를 하나로

묶어 마침내 1947년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넓은 영토와 다양한 종교, 현재까지 이어지는 신분제도(카스트) 등은

독립 이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를 분리 독립시켰고,,

지금까지도 캐시미르 지방등에서 잦은분쟁이 일어나는 등 현대 인도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는 불교의 4대성지로 네팔국경에 있다.
룸비니 국제 사원지구에 한국의 대성석가사가 있다.
높이 42m의 대웅전은 황룡사 9층탑을 모델로 1995년부터 콘크리트로 지었다.

 


한국 절만 숙박시설이 있어 (식사포함 3,000원)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다.
웅전은 최근에 완공되어 내부시설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방문객이 묵는 숙소건물과 식당이 있는 3층짜리 요사채. (대지12,000평)

 

 

 

 

1.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

 

 룸 비 니 : 이 곳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 이며 슛도다나왕의 도읍이었다.

 

 

 

 

 

 

룸비니(Lumbini)는 메카를 찾는 이슬람 순례자나 예루살렘을 찾는 그리스도 교인처럼 불교의 순례자들에게는 영원한 성지이다. 룸비니는 네팔 남부 인도 국경근처인 테라이(Terai) 평원에 있는데,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포이러(Feuhrer)가 돌기둥에 새겨진 고대 비문을 해독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룸비니동산의 국제사원지구에는 용지를 99년간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조건으로 한국사찰인 대성석가사(大聖釋迦寺)를 비롯해 각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살린 사원들이 건설되어 있다. 불교의 4대 성지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지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사르나트(鹿野苑, 녹야원), 열반지 쿠시나가라 이다.

 

마야데비(Mayadevi)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세계문화유산인 룸비니 성지의 정문.
석가가 태여나신 자리에 지은 마야데비(Mayadevi) 사원은 1943년 재건한것이다.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은 마야부인이 출산하기 전 목욕하고, 부처를 목욕시킨 곳이다.

 

아소카 석주(Asoka Pillar)


1896년 포이러 박사가 아소카 석주(Asoka Pillar)를 발견할 때까지 폐허였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탑 상단의 말 조각이 벼락에 파괴됐다는 기록이 있다.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라 세금을 면제하고, 추수기에는 8분의 1만 받겠노라.

 

네팔의 테라이 지방에 2500여년전 마가다국의 비호를 받고 있던 코살라국의 보호령이었던 카필라(Kapila)라는 인구 100만 정도의 부족국가가 있었고, BC 623(565년 등 이설이 많다.) 석가족(Shakyas)의 슈도다나왕(정반왕)의 왕비인 마야데비(Maya Devi)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브다하(콜리성)로 가던 중 룸비니에 있는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 BC 249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아소카(Ashoka) 왕이 찾아와 네 개의 불탑과 석주를 세웠는데, 돌기둥에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아소카 왕이 재위 20년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여 석주를 세우다. 룸비니 마을의 세금을 감면하고, 생산량의 만 바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칙령이 쓰여 있다.

 

 


부처님 탄생지. 불자들이 붉은 벽돌에 금박을 붙여, 주위 벽돌이 금색이다.

 

 


부처가 태어난 자리를 표시한 아기 붓다의 족적.

 


구룡못과 무우수(無憂樹)나무.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으실때 붙잡고 힘을 썼다는 무우수나무의 손자뻘 된다.


무우수 나무에 걸린 룽따.

 

 

기도문을 적은 룽따.

 

룸비니는 15세기까지 순례 성지였다. 룸비니의 초기 역사는 중국의 유명한 순례자들인 법현(法顯, 409)과 현장(玄奘, 637)의 글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방문한 사원과 불탑, 다른 건물들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14세기 초엔 리푸 말라(Ripu Malla) 왕도 자기의 순례기를 아소카 석주에 명문으로 추가하였지만, 14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파괴하고 매몰시켜 15세기 이후엔 룸비니 순례가 중단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 지역 사람들만 3세기~4세기의 마야데비 상을 힌두교의 어머니 신으로 숭배하였다. 1896년 포이러 박사가 아소카 석주(Asoka Pillar)를 발견할 때까지 불교 사원은 파괴되어 폐허로 있었다.

 

 

 

 

 

수많은 스투파(탑)와 사원들이 있었던 자리가 토대만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9세기의 수많은 벽돌 사리탑과 수도원의 흔적들.


14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파괴하고 매몰시켜,


15세기 이후엔 순례가 중단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한바탕 꿈이라는 인생의 길 위에서,

 

 

 

경전을 외우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후 유적지들을 찾을 수 없었는데, 629년경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당나라 현장법사가 남겨놓은 대당서역기의 내용이 불교의 유적지를 발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다. 마야데비(Mayadevi) 사원은 11세기에 지어져서 1943년에 재건된 곳이며, 남쪽의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은 마야부인이 석가모니를 낳기 전 목욕을 했고,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목욕시켰다고 알려진 성스러운 곳이다. 마야부인에게 바쳐진 고대 사원유적의 토대에 기념석비가 있었다. 2003년 네팔정부에서 성지에 건물을 지었으며 부처님 탄생을 묘사한 조각상과 부처님 발자욱터, 승방과 승원터 등 유적이 건물안에 있다.

정반왕은 40이 넘어서야 겨우 아들을 얻었으나, 마야부인은 7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처가 된 이모(최초의 비구니)에 의해 양육되었고, 16(혹은 19)에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얻었으나, 29세에 출가 하였다. 많은 스승을 모시고 수도하였으나, 누구도 태자가 품었던 '죽음과 삶의 문제'에 관해서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자, 육신을 학대함으로써 정신이 그 결박을 벗고 해탈할 수 있다는 요가와 같은 극도의 수련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6년의 고행(苦行)으로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몸은 너무 쇠약해져서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고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단식을 중단하고 체력을 회복한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채 깊은 명상에 잠긴지 7일째 되던 날, 태자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깨달음을 얻은후에도 부근에서 7x7일을 명상하며 보내셨다고 한다. 이때부터 태자는 스스로를 붓다(Buddha, 佛陀, 깨달은 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을 통찰했다는 긍지이며, 만유의 존재 당위를 독특한 지견(知見)으로 열어 보였다는 자부이기도 했다. 붓다는 이후 45년 동안 교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상대방의 신분이나 학식, 직업에 맞게 설법하였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 만년에 사촌동생의 모반사건, 동족인 석가족의 멸망, 상수제자의 죽음 등 인간적인 불행을 맛보기도 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석가족 출신의 성자)는 부처, 석가세존(釋迦世尊), 능인적묵(能仁寂默), 여래(如來), 불타(佛陀), 붓다(Buddha), ()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 석가는 샤카(Sākya)의 한자발음.

 

2.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Buddha Gaya)

 

붇다가야 : 이 곳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며 마가다국,

나이란자아 강변의 보리수 아래입니다.

 

 


윤회를 뜻하는 수레바퀴와 마하보디(Mahabodhi) 사원의 대탑.


부다가야 (Buddha Gaya)의 마하보디 사원 복합 단지.


4대 성지중 가장 성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성도지(成道地)이다.


마하보디 사원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이다.

 


마하보디 대탑(大塔)은 전체가 벽돌로 만들어진 초기 불교사원이다.


현재의 탑은 409년 - 637년 사이의 굽타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원입구. 대탑 감실의 불상들과 내부의 좌불상이 보인다.

마하보디 대탑 내부의 부처님.

 

부다가야 (Buddha Gaya)는 인도 북동부 비하르(Bihar)주 가야(Gaya)시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도지(成道地)이다. 4대 성지는 부처가 열반하기 전에 제자 아난다에게 사람들이 참배할 4곳을 일러준 데서 유래하는데, 가장 성스러운 곳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로, 지금은 국제 사원으로 꾸며져 있다. 부처님께서 출가후 6년 고행끝에 성취하신 대각의 성지로, 마하보디 사원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이다. 이밖에도 부처의 깨달음과 관련된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전정각산(前正覺山)은 부처가 깨닫기 전에 수행하던 곳이며, 네란자라강가의 수자타 탑은 고행을 마치고 수자타여인에게 공양죽을 받아 먹은 곳이고, 가섭삼형제를 제도하신 장소 등이 남아있어 오늘날까지 전세계 불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성지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세운 대탑은 높이 55m의 방추형 9층탑이다.


마우리 왕조는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로, 아쇼카 왕은 석주를 곳곳에 세웠다.

 


성도지(成道地)인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순례객들.


29세에 출가 하여 6년의 고행(苦行)으로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 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후에도 부근에서 7x7일을 명상하며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붓다(Buddha, 佛陀, 깨달은 자)라고 불렀다.

 

 

 

사원앞 스투파(탑)은 세계 각지의 불교도들이 건립한 봉헌탑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는 BC 3세기경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마하보디 대탑(大塔)이 서 있다. 높이가 55m나 되는 방추형의 9층탑은 3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는 웅대한 탑이다. 현재의 탑은 중국의 법현과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409년과 637년 사이의 굽타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전체가 벽돌로 만들어진 초기 불교사원이다. 대탑 주위에는 세계 각지의 불교도들이 건립한 봉헌탑이 있으며, 외벽 감실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탑 서쪽에 있는 금강보좌(金剛寶座)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로 앞에 보리수 한그루가 심어져 있다. 대탑 남서쪽에는 석가모니가 고행을 끝내고 목욕을 한 연못이 남아 있는데, 이곳은 본래 힌두교도들이 관리하였으나 스리랑카·태국·미얀마의 불교도들이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마하보디 대탑과 보리수나무 앞의 돌 울타리인 난순(欄楯, vedikā).


보리수와 석가모니가 앉았던 금강좌(金剛座)는 난순으로 둘러 싸여있다.


보리수는 원래 아슈밧타나무 혹은 피팔나무라 불리었다.


붓다이후 깨달음의 나무, 즉 보리수(菩提樹, Bodhi tree)가 되었다.

 


붓다시절에는 높이가 수백척에 달했다 하나, 몇차례 벌채 되는 수난을 겪었다.

 


보리수가 1876년 폭풍우에 죽자, 스리랑카의 보리수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

스리랑카의 보리수는 아쇼카왕이 불교전파 때 (BC 288년) 보냈던 묘목이다.

 

부다가야(Buddha gayā)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菩提樹)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장소이며, 그 자리에 사원을 세운 것이 마하보디(Mahabodhi) 사원이다. 역사적으로는 보디만다로 알려져 있었으며 불타가야(佛陀伽耶), 보드가야(Bodh gayā)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를 난순(欄楯, vedikā, 스투파나 성역을 둘러싼 돌 울타리.)으로 둘러싸서 보리도량으로 한 것에서 시작되며, 마하보디 대탑은 1870년대 말부터 미얀마의 불교도가 개수한 것이다. 대탑의 서측, 기단에 접해서 돌의 대좌, 즉 금강보좌가 있으며, 이를 덮듯이 보리수가 가지를 펼치고 있는데 이 금강보좌에 석가가 앉았다고 전해지는데, 새겨진 문양의 작품으로 보아서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다가야 유적의 중심은 대탑 서편에 있는 보리수다. 원래는 아슈밧타(asvattha)나무 혹은 피팔(Pipal)나무라 불리던 것을 붓다가 이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깨달음의 나무, 즉 보리수(菩提樹, Bodhi tree)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붓다 재세시(在世時)에는 수백 척의 높이에 달했다 하나, 그동안 몇차례 벌채 되는 수난을 겪었으며, 높이 십여m에 달하는 현재의 보리수는 원래 보리수의 4대 손자에 해당된다. 원래의 보리수가 1876년 폭풍우에 쓰러져 죽자, 스리랑카의 아누라 다푸라 사원에 있는 스리마하 보리수 묘목을 가져다 심었는데, 스리랑카의 보리수는 아쇼카 왕이 불교전파를 위하여 딸인 상가미타 비구니를 파견할 때 (BC 288) 함께 보냈던 묘목이라고 한다.

 


탑의 외벽에 조성된 수많은 감실(慤室)에는 불상이 안치돼 있다.

마하보디 탑은 우리나라 경복궁처럼 파괴와복구가 반복되었다
13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사원은 점차 폐허로 변했다.

 

 


마하보디 대탑은 1870년대 말부터 미얀마의 불교도가 개수(改修)했다.

 

 

 


돌 울타리 난순에는 고대 인도인과 동, 식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부다가야 무칠린다 용왕 연못 (Muchalinda Lake).

 


붓다가 선정에 들었을 때 비가오자 머리가 9개인 코브라가 감싸 주었다고 한다.

 

 

몇년전 티벳의 달라이 라마가 세운 부처상.

 

붓다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은 나무와 관련 있다. 탄생시에는 붓다의 모친 마야부인이 무우수(無憂樹)를 잡고 아기를 낳았으며,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두 그루의 사라수(娑羅樹, 밤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들었다. 마하보디 대탑을 둘러싼 사암제의 난순에는 불교설화도, 성지참배도, 수호신사, 동식물 문양 등의 부조가 있는데, 날개달린 말(페가소스), 인어(트리톤), 반인반마(켄타우로스) 등의 그리스적인 주제가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기원전 1세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제의 것은 굽타시대에 증보수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 보드가야 대탑 남쪽에 있는 무칠린다(Muchalinda) 연못의 서쪽 기슭에서 7일간 선정에 들었을 때 비가 쏟아지자 머리가 아홉 달린 코브라가 나타나 붓다를 감싸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3.사르나트(Sarnath, Sarnātha)인도 의 지명이다.

바라나시 : 이 곳은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하신 곳이며,

바라나시 교외의 리쉬 파타나에 있는 녹야원입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

한 땅이다. 불교의 4대성지 중 하나이다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

사전 아쇼카 (Ashoka) 석주의 시대에서 한 Dharmarajika 해골 탑

 

 

 

사르나트, 인도에서 Dhamekh 해골 탑  기하학적 조각

사르나트, 인도 Dhamekh 해골 탑 유적

사르나트 부처님

주요 기둥에 브라 Inscriptures

 

 

사르나트, 터키 이슬람 침략 중에 파손  아쇼카 기둥베이스.

것은 원래 사르나트 박물관에 전시 지금, 아쇼카 라이온

캐피탈은 "인도 국가 상징"으로 극복했다.

 

아쇼카왕 재위(BC272-BC232)인도 북부지방 聖地에 세운

기념 石柱

 

사르나트 유적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 내부벽화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 내부벽화 2

 


Mulagandhakuti Vihara입니다, 사르나트에서 스리랑카 불교 사원

 

스리 Digambar 자이나교 사원, 그냥 Dhamekh 해골 탑 뒤에 Singhpur, 사르나트,

 

사르나트의 파노라마보기

사르나트에서 티베트 사회의 사원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설법한 다섯 수행자가 법륜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

 

사자 자본, 사르나트에서 아쇼카 (Ashoka) 석주 기둥, . 250 B.C.E.,

광택 사암, 210 X 283cm, 사르나트 박물관,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인도 의 지명이다.

녹야원(鹿野園)으로도 불린다. 바라나시의 북방 약 10 km에 위치해 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 붓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을 한 땅이다.

불교의 4대성지 중 하나이다.

발굴 결과 아카소왕(기원전 3세기 중엽)경부터 12세기까지의

유적과 다수의 조각이 출토되고, 다르마라지카탑과 근본정사를 중심으로,

굽타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동방에 현존하는

다메크탑은 높이 약 42m, 기부의 직경 약 28m로 굽타 시대의 귀중한 예이다.

출토품의 대부분은 유적의 남쪽에 있는 고고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입구정면에 있는 아소카왕 석주의 사자상 주두는 같은 종류의 주두 주각 중 가

장 장려하며 보존상태도 좋다. 4마리가 등을 마주 댄 사자도,

원형의 정판 측면에 부조된 동물도 세련된 기법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4.쿠시나가르(영어 Kushinagar,힌두어: कुशीनगर)

쿠시나가라 : 이 곳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입니다.

쿠시나가라는 장사들이 사는 땅이며 사라쌍수는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장소 입니다.

 

 

 Parinirvana의 Stupa, 쿠시나 가르와 함께 Parinirvana 사원

와트 타이어 꾸시 나라 사원에서 부처님의 황금 동상.

부처님의 화장 해골 탑, 쿠시나 가르

 

쿠시나 가르의 Stupa 유적

Parinirvana 해골 탑에서 부처님 와상.

 

버마 사원 Mahasukhamdada  타르 Gyi 

 

와트 태국어 사원

 

부처님 유물 배포 사이트

 

쿠시나가르(영어 Kushinagar,힌두어: कुशीनगर)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위치한 마을로 인구는 17,982명(2001년 기준)이다.

고대 인도에 있던말라  왕국의 중심지였고 현재 카시아 마을 부근에 있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곳으로 추측되는 불교의 4대 성지 중 한 곳이다.

석가모니가 버섯 죽을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입멸했다고 한다.

5석가모니의 열반상을 모신 사원이 들어섰고 19세기에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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