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모음

오탁번의 시모음(Starry, Starry Night)

이모르 2021. 2. 15. 15:33

 

 

 

굴 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主:동인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품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原始林) 아아 원시림(原始林)
그 아득한 세계(世界)의 운반(運搬)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石炭)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 탁 번 -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봄 /오탁번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둥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오탁번(吳鐸蕃, 1943 7 3일제천 ~ )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 작품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1985, 시집)

생각나지 않는 꿈 (1991, 시집

겨울강 (1994, 시집

미터의 사랑 (1999, 시집

처형의 땅 (1974, 소설)

오탁번 시화 (1998, 산문집

현대시의 이해 (1998, 평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