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보
다시 날이 밝았습니다
희망이라는 말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생명이 있는한 희망은 있다"
이 격언 힘을 주지요
코로라의 암울한 고통 중에도 그것을
극복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이야기 합니다
길 / 고은 시인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 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춘곡
희망을 가지고 길 을 찾는 이들에게
많은 난관 이 기다리고 있지요 근자에
코로나 퇴치를 위한 백신 예방 주사 시행
으로 극복 할 수 있다는 희망 의지에
역행 하여 불신을 조장 하는 사람들
이 있지요
SNS에 올라온 글 올려 보겠습니다
코로나 백신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거짓 정보를 마구 퍼뜨리는 자들...이들에게 보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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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은 암소를 뜻하는 ‘vacca'에서 온 말로 종두법을 찰시한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처음 썼습니다
1879년 부산의 일본인 병원 제생의원에서 우두법을 배우고 백신을 얻은 지석영은 서울로 돌아 오는길에 충청도 덕산 처가에 들려 처조카 두 명에게 접종했습니다.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신’ 접종자입니다.
서울에 온 지석영은 ‘우두국’을 개설하고 일반일을 상대로 백신 접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백신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백신을 맞으면 큰일난다고 협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당;들이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무당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우두국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두창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로 칭해질 정도로 감염률과 치사율이 높은 감염병이었습니다. 병에 걸렸다 나아도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습니다. 19세기 말까지 전 인류의 10~20% 정도는 곰보였습니다. 두창을 옮기는 귀신을 ‘호구별성’ 이나 ‘마마’라고 부른건, 이 병이 특히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마마’를 섬기는 데 용한 재주가 있다고 알려진 무당들에게는 두창환자와 그 가족이 ‘돈줄’이었습니다
당시 무당들은 ‘백신’을 맞으면 사람이 소처럼 된다는 둥, 마마님을 진노케 해서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둥 온갖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조선정부는 1885년부터 모든 백성에게 우두를 접종하려고 했지만 이걸 방해한 것도 무당들이었습니다. 무당들이 퍼뜨리는 헛소문을 믿은 아이 엄마들은 마을에 우두 접종원이 나타나면 아이를 업고 산으로 달아나곤 했습니다.
물론 우두 접종을 기피했다가 두창에 걸려죽은 아이와 그 부모들에게 무당들이 ‘도의적 책임’을 진 적은 없습니다.
평보
처음엔 백신 빨리
못들여 온다 혀서
2월 부터 들여온다 하니 대통령이 사기친다 하고 어느당은 백신이
먼저다 써붙히고는 온갖
모략전술 첨엔 우환 폐렴 이라 해야 한다 생 난리 치다가 요즘은 불신 조장을 선동하며
대통령 부터 맞아라 불안 심리
조장하니 어떻게
위민 정치라 할수
있을까요 吳越同舟 춘추전국시대 때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지간 이웃나라지만 지긋지긋 싸웠고
그때 생겨난 고사성어가 많았지요 와신상담 이라던지 좌우간
그들이 이민족이
처들어오면 한배를 타고 적을 물리친다는
위 이야기와 같이 아무리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적이나 원수라 할지라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 얼마든지 힘을 합하여 난관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것.
하지만 현시국은
오직 정권욕만 있지 어떻게 하면 코로나 극복을 하여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건 뒷전 입니다
보고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
보고 일상의 행복을 느끼려면
코로나를 우선 퇴치 해야 되겠지요
매화도 벚꽃도 진달래도 피는 요즘
미국 가곡의 아버지 스티븐 포스터의
꿈길에서 가사 일부가 생각 납니다
"부질없는 근심 걱정 사라지면 벗이여
꿈깨어 내게 오라"
ㅡㅡㅡㅡ
스티븐 포스터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근교 로렌스빌에서 유복한 가정의 10남매의 막내로 출생했다. 어릴 적에 플루트를 배운 일이 있으나, 정규 음악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순전히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고, 18세 때 같이 노래부르던 친구들을 위하여 최초의 가극 <루이지애나의 미녀>를 작곡했다.
1846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이사해 형의 증기선 회사의 경리로 취직했다. 그는 이 곳에서 최초의 히트작인 '오수재너'를 발표했는데, 이 곡은 1848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의 주제가가 되었다.
1850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내과 의사의 딸인 제인 맥다월과 결혼, 이듬해에 딸을 낳았다. 이 기간 중에 포스터는 백인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민스트럴 쇼의 단장 크리스티와 교제했으며, 그의 대표작들을 쓰기 시작했다. "시골 경마" (1850), "스와니 강" (1851), "켄터키 옛집" (1853), "늙은 개 트레이" (1853), "금발의 제니" (1854) 등이다. "금발의 제니"는 그의 아내 제인 맥다월을 위해 쓴 작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생계가 차차 악화됨에 따라 포스터는 그녀와 사이가 나빠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즉시 50만 부가 매진되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의 판권을 단돈 15달러에 양도하기도 했다.
포스터는 1860년 뉴욕 시로 홀로 이사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운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와도 헤어진 포스터는 빈곤 속에서, 최후의 가곡이 된 <뷰티플 드리머>를 작곡한 뒤 1864년 1월 10일 맨해튼의 한 호텔방에서 지냈다. 끈질긴 감기 때문에 침대에서 시녀를 부르려는 도중 쓰러져 옆에 있던 세면대를 머리로 박아 세면대가 깨지고 그 조각들이 머리를 다치게했다. 포스터를 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그는 과다출혈로 3일 후에 38세의 나이로 벨뷰 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는 단 38센트와 "dear friends and gentle hearts"라고 쓰인 메모지를 가지고 있었다. 포스터는 피츠버그 근교 앨러게니(Allegheny) 묘지에 묻혔다.
가난뱅이였다고는 하지만 그의 수입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였으며, 1846년 ~ 1860년 사이에 받은 인세는 1만 5천 달러에 이르렀다. 포스터는 파멸형의 천재였던 것이다. 새가 노래하듯이 가곡을 작곡한 포스터는 선율에 대한 놀라운 직관력을 지녀, 틀에 박히지 않은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이는 진정한 민요라고 생각될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포스터의 가곡수는 189곡으로 가사도 대부분이 자작한 것이다.
오수재너 Oh, Susanna (1848)
시골 경마 Camptown Races (1850)
스와니 강 Old Folks at Home (Swanee River)(1851)
켄터키 옛집 My Old Kentucky Home (1853)
금발의 제니 Jean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1854)
올드 블랙 조 Old Black Joe (1860)
꿈길에서 Beautiful Dreamer (1862)
위키 백과
꿈길에서 번역 가사
1.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라
한갖 헛되이 꿈은 지나
이 맘에 남모를 허공있네
꿈길에 보는 귀여운 벗
들어주게 나의 고운 노래
부질없었던 근심걱정
다 함께 사라져 물러 가면
벗이여 꿈깨어 내게 오라
2. 바닷가 멀리 들려오는
내 노래 소리를 들어보라
아득한 강변 안개 끼고
아침의 빛이여 아롱지네
꿈길에 보는 귀여운 벗
날은 밝아 하늘 가득한데
슬픔은 이미 사라지고
그대의 얼굴에 미소 띠면
벗이여 꿈깨어 내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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