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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남성편력(잘있거라황진이)

이모르 2021. 6. 7. 16:36

 

202163

 

곡산

 

일본 놈들 땜에 열받는데 평창 올림픽때 독도표기 강력항의 IOC에서 우리나라에게 독도를 제외 시키라는 압력으로 우리는 독도를 올림픽 지도에서 배제 했는데 작금 일본 올림픽 지도에 독도를 표기 해서 우리가 강력 항의 하였으나 IOC나 일본 당국은 들은척 안한다 하는데 분통터지겠네 !!!! 기분도 그렇고 해서 SNS에 올라온 황진이에 대한글 올려 보겠습니다

 

황진이 사랑은 누가 찾이 했나 ?

~~~

 

조선의 중종시대 황해도 개성땅에 미모의 기생 황진이가 있었다.그는 기생이지만 양반과 사대부를 깔구 뭉겠으며 남자에게 노리개 감이 아니라 반대로 유명한 남자를 노리개 감으로 만든 기개 높은 멋진 여인 이였다

 

기생으로 살면서 항상 남자를 가지고 노는 시인이며, 기개가 곧은 여인 이였다 그는 아버지 황진사와 종 어머니 천민의 몸에서 태어 났다.아버지 황진사가 길을 가다, 빨래하는 여인을 자빳뜨려 건드려 생긴게 황진이 다.

 

황진이는 실록에 기록 된것은 없고 야사로 전해지는 것이다 어릴적에 천자문을 떼고 열살 때 부터 漢詩를 썻다. 황진사가 경제적으로 도와준 것 옆집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아서 황진이가 소복 차림으로 슬피울고 속치마를 관에 덮어주자 비로서 상여가 떠나갔다

이후로 황진이는 기생이 된다

 

종실 벽계수 이종숙(李琮淑)은 세종대왕의 17번째아들 영해군의 손자로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 온데서 부터이야기다.벽계수의호언장담을전해들은 황진이,개성까지만 데리고 오면 그다음은 不問可知 과연 개성인근까지 말타고 도착한 벽계수는... 누각에서 거문고를 켜며 그 유명한

 

"청산리 벽계수야 수히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하리“

 

라고 하는시조를 읊는 황진이의 자태에 넋을 빼앗기고 낙마를 했다...

 

즉  청산에 흐르는 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는데 한번 바다에 닿으면 다시는 못 온다. 명월은 황진이를 말함. '나와 함께 놀다 가면 어떠하리!' 라는 를 노래한다 이에 벽계수가 황진이를 쳐다 보다가 말에서 떨어 졌다고 한다 이에 황진이는 별 볼일 없는 남자라 생각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삼십년간 를 닦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하여 파계승을 만들은 배경은?/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 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 닦았다.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다. 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었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 면벽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끓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광인, 반걸인이 되었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허균은 성옹식소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족노선은 삼십년이나 면벽 수도를 했는데도 나한테 꺾이었다. 화담 선생만은 나하고 몇 해를 가까이 지냈는데도 끝내 문란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법보신문

 

 

사대부 집안 선전관 이었던 이사종과 6년간 계약 결혼을 한다 황진이 집에서 삼년을 살고, 삼년은 심산유곡을 찾아 멋진 유람생활을 한다.그리고 깨끗이 헤어지면서 한수를 남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를 둘로 내어

춘풍

이불속에

서리 서리 넣었다가

그리운 님

오시는 날 밤에 굽이 굽이 펴리라!

 

그후 사대부 앙반만을 갖고 놀다가 말년에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이 내가 황진이를 딱 한 달만 데리고 놀다 헤어 진다며, 그러지 못하면 내 인간이 아니다 라고 친구들 에게 맹세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세양은 황진이와 한 달간 동거한 후 헤어 지는데,황진이가 한수를 읆는다

 

"달빛아래 오동잎 모두지고

찬서리 들국화는 노랗게 피여 있구나!

다락은 높고높아 하늘 만큼 닿았는데,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없네

흐르는 물 소리는 차기가 비파소리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내일 아침 눈물지며 이별하고 나면

님 그린 연모의 정 물거품이 되네!"

 

를 들은 소세양은 며칠을 더 머무르는데 친구들은 소세양을 사람이 아니라고 놀려댔다고 한다 여기서 소양곡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라고 하는데 그는 여색에 신중하기를 친구나 후학들에게 역설하면서 내가 만일 여색에 眈溺하며는 나를 개새끼라(犬子) 부르라 하였다, 하지만 그는 황진이의 미색과 풍월에빠졌다하니 그를 친구들은 犬子님 하고 불렀다 한다.

 

황진희의 시험대상 다음 타자는 花潭 서경덕 천하의 학자 서경덕을 유혹하였으나 실패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고,그래서 개경의 삼절은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라 한다 그는 기생 이였기에 유명한 사내들이 꼬셨다 허나 그의 기개를 어떤 사대부도 꺽지 못했다.황진이가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아랫 도리와 모든 것을 주고, 안주는건 황진이 마음 이였다

 

서경덕이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소문이 났고.그 서경덕을 비가 오는 날 황진이가 찾아간다.하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았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벗긴 모양이었다. 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었다.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 황진이를 눕히고는몸을 말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글읽기를 계속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다.삼경쯤(23~01)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잠을 자는 서경덕이었다.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이미 일어나 밥까지 차려 놓았다.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가자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 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다.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겸제 정선의 박연폭포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고는 하나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그도 역시 사내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했고 첩까지 두었다. 여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이 아니었다.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마음이 어린 후(後)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서경덕의 시조에서는

분명 여인을 그리는 남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다.

서경덕이 이 시조를 부를 때에 누군가가

 

(마당을 쓸던 하인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다) 들었던 모양이다. 그대로 황진이에게 전해졌다 그녀 역시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사모했던 모양이다.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바로 화답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서경덕의 시조 종장에 대한 답이다.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니저 우러 예어 가는고'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을) 나도 몰라 하노라

 

그리고 황진의 최고 힛트작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너었다가

어룬님 오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이후 황진이는 사십대 초반에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유언에 깊은 산중에 묻으면 외로 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가에 묻어 달라 한다, 그래서 길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백호 임제는 과거에 급제하여 평양으로 벼슬살이 길을 가다 송도 어귀에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 한잔을 따르며 노래했다고 한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은 어데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이 노래 때문에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파직 벼슬이 떨어졌다.죽어서도 사대부의 옷을 벗긴 것이다 그 역시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황진이를 알아본 것이다.

 

 훗날 암행어사 이덕형이 '송도기' 라는 책에 ''황진이는 아리따운 외모를 지닌 선녀였고

천재 시인이였고 절창 이였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ㆍ

 

 

평보

 

곡산형님 황진이에 대한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상식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내가 황진이에 대한 글을 대하고 보안 편집하다 소양곡에 대한 부분의 황진이 가 황진이 가

지은 시가 아니라는 증언이 있어 위글에 자세한 내용 을 언급을 피했으나 여기적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양곡 소세양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라고 하는데 그는 여색에 신중하기를 친구나 후학들에게 역설하면서 내가 만일 여색에 眈溺하며는 나를 개새끼라(犬子) 부르라 하였다, 하지만 그는 황진이의 미색과 풍월에빠졌다하니 그를 친구들은 犬子님 하고 불렀다한다.

 

위키백과를 보면 이런 내용 이 있습니다

항간의 소세양 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랑과 황진이의 극진한 이별의 시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극작가 양인자씨가 황진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본인이 창작한 시 라는 것을 티비에서 밝힌바 있다.

~~^

그러나 위키백과에 좀더 찾아보니 조선후기 문신 임방(1640~1724)이 지은 "시화총림"4에 수록된 "수촌만록"에는 양곡 소세양과 황진이의 러브스토리가 흥미진진 자세 묘사되어 있다 하는데 문제가 되는 아래 시는 황진이가 지었다 확인 되므로 양인자 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것도 같아서 헷갈립니다

 

 

送別蘇陽谷詩..

月下庭梧盡
霜中野菊黃
樓高天一尺
人醉酒千觴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明朝相別後
情與碧波長

 

"달빛아래

오동잎 모두지고

 

찬서리

들국화는

노랗게

피여 있구나!

 

다락은

높고높아

하늘 만큼 닿았는데,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 소리는

차기가 비파소리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내일 아침 눈물지며

이별하고 나면

 

님 그린

연모의 정 물거품이 되네!"

 

 

 

주현미/잘있거라 황진이

박연폭포/북한작가 권용섭작 

박연폭포

 

박연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옛날에 박진사(朴進士)가 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폭포 밑 못 속에 사는 용녀(龍女)에게 홀려 백년가약을 맺었다.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 폭포에서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져 자신도 폭포 밑 담에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그 담을 고모담이라 하고, 박씨의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바가지와 같이 생긴 담소에서 떨어지는 폭포라고 하여 박연폭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연폭포(朴淵瀑布))]

 

청산리벽계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