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G선상의아리아(바흐의명언모음)

이모르 2020. 12. 16. 14:15

 

 

나에겐 음악을 연주하는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어

아침을 열면 보내주는 크레식음악과

여러장르의 정보로 교양과 수양이

향상되는 것에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G선상의 아리아 를 들려주었던

감흥으로 음악의 아버지라 블리우는 바흐에

대한 이야기를 위키백과에서 모아보았습니다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하여

체험한 이야기를 어떤 젊은이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는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시간표도 정원도 없는 이 화물차는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는, 서울을 떠날 때,

포오터블(portable) 축음기와

애청하는 레코오드 몇 장만을

옷과 함께 륙색(rucksack)[2] 꾸려 넣고

이 피난 열차에 올랐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던 차가 덜커덩하고 또 섰다.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허허벌판에서

몇 시간을 또 지체할는지 모른다.

이때, 그 젊은이는 축음기와 레코오드를 꺼냈다.

 

그는 축음기에 레코오드를 얹고 바늘을 올려놓았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 작곡인 (G) 선상의 아리아 였다.

고아하고도 명상적인 바이올린의 멜로디는 눈 온 뒤의

 정결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니, 맑은 공간이 고스란히 공명(共鳴)함이 된 듯,

축음기의 가냘픈 소리가 한결 또렷하게 들렸다.

 

모든 사람은 오늘의 괴로움을 잊고

경건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스려 가고,

하늘과 땅도 숨을 죽이고,

이 명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화차 안이

조용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 아닌가!

 

지식도, 생활도, 성격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한결같은 감동에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지이 선상의 아리아 가 여운을 남기고 끝났을 때,

서양 음악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한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곡을 한 번 더 들려 달라.” 고 했다.

 

음악과 인생 / 박용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시대 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바로크시대 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 (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겔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흐의 명언

 

“사람은 젊을 때 배우고, 늙어서 이해한다.”

 

멋있는 명언이지요? 1685년 3월21일 이렇게 말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태어난 날입니다.

 많은 사람이 ‘음악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지만,

유래는 불분명합니다.

서양인들이 “웬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묻는 걸 보니,

일본에서 지은 별칭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바흐가 대위법과 교회음악의 수호자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거리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바흐 집안은 200년 동안 50여 명의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 가문이었습니다.

바흐가 태어난 튀링겐 지방에서 ‘바흐’는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처럼 쓰였다고 하지요. 참고로

바흐의 원뜻은 '시냇물'이고요.

 

 

그는 동갑내기 음악가인 헨델이나 텔레만, 이탈리아의

비발디에 비해 인기가 없었고 사후에도 한 동안

무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연주를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다.

 아마 그는 매번 그 자리에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늘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연주한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하면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천재가 역사에 묻힐 리가 없지요.

사후 그의 음악은 여러 음악가에 의해 재해석되지요.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흐를 재조명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음악가입니다.

브람스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음악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마치 기름과 같다고나 할까?

바흐는 고통 받는 사람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힘을 갖고 있다.”

 

바흐는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작곡하다가 시력이 약화돼

치료를 받던 중 뇌출혈로 숨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똑같은 의사가 헨델의 눈도 멀게 했다고 합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맞는 건반을 맞는 때에

누르는 것 뿐이기에 그러면 악기가 스스로

연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