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개산성
명칭 : 보가산성 (保架山城)
소재지 : 포천시 관인면 중1리 산251-1 지정현황 :
포천시 향토유적 제36호 지정일 : 1986. 4. 9
02년10월3일 지장산행을 위하여 7명의 도선인들이 10시 공터에 내리다
화전민터에서 10시30분부터 협곡을 따라 삼형제 봉 목표로하고 산행하고있었다
무산 도암
그러나 누가 알았겠나?
평초
삼형제봉
7부 능선에 오를때 세찬 소나기가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쏟아지는데
束手無策이라는 말은 이런 때 써 먹으라 있는말이다.
날씨 좋아 전혀 예견못하여 初秋의 쌀쌀한 기운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니
평초는 급한 나머지 떡갈나무 잎 밑에 숨어 보았지만 가당치 않은 일이다.
회장의 지시대로 삼형제봉이 뻔히 보이는 능선에서 하산이다
지장산 계곡
춥다는 것은 이런 때 하는이야기다.
공터에서 옷을 벗고 쥐어짜 대강 말려입고 소주를 마시고 보가산성으로
향하다 이쪽은 명성산 국망봉 지장산을 잇는 크게울다 나라를망치다
라는 지명에서 보듯 후삼국의 궁예와 왕건의 패권의 전장터였다.
은암
오래전 제3국인 카나다 역사학자가 쓴 후삼국의 논문을 보면 궁예는 개혁
주의로 민초들을 위해 싸웠으며 왕건은 봉건 토후세력으로 보수세력이라
하였다
평보
함에 三國史記 나 三國遺事 는 고려때 저술된 것으로 객관적이지
못하다 하겠으나
평초 궁예왕 과의 교감
아무튼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궁예는 왕건에게 쫓겨 산림(山林)에
들어가 암곡(巖谷)에 숨었다가 부양(斧壤·오늘날의 평강 평강군(平康郡)은
북조선쪽 강원도에 있는 군이다) 사람들에게 죽었다 고한다
사투를 벌리던 산성엔 당시 儺者死者의 함성이 들리는듯
보개산성과 명성산성은 바로 암곡으로 이루어진 산성으로 궁예가
왕건에게 대항했던 최후의 장소가 바로 이 두 산성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서 궁예왕의 한을 생각해보았다.강대해진 호족세력을 견제하려다
부하였던 신숭겸(申崇謙)·의 모의에 빠진것 하며 왕건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폭군으로 묘사 되었던 고려사 기록으로 애잔한 연민을 느낄수 있었다.
극도로 쇄약해진 신라황실 토후들 백성들의 반란등 혼란한때왕이되어
철원으로 수도를 삼았다 던지 서출로 왕실에서 버림받아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하는것등은 모두 KBS 연속극에서 소개된바 있다 (재위 901-918년
918년은고려의원년)
상기한 대로 오래전에 본 잡지에 게재되어 이름도 제목도 생각 안나지만
카나다 학자는 우리 사료를 철저히 배제하고 중국등 외국 문헌을 참고하였던
글에서보면 견원은 용장이고 궁예는 민초들을 위해 농지개혁을 주도 했으리
만큼 지장이었다 한다...
보개산성의 둘레는 1650m 양쪽 끝 길이가 570m(안내간판)
그의 성터는 지금도 천년을 넘어 굳건하게 意志만은 남아있는 것 같다.
궁예왕이 왕건에게 쫒겨 사투를 벌릴 때 새들도 함께 울어 주었다는 명성산
과 함께 지장산의 역사의 의미를 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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