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에곤실레와고흐

이모르 2020. 12. 23. 15:02

표현주의 에곤쉴레의 그림을 보면 현기증이 날것같다

왜?? 일까

 

 

 

에곤쉴레의 고민상

고흐의 고민상

 

에곤의 여인상

 

고흐의여인상

 

 

쉴레 Ergon Schiele (1890-1918)

 

 

 

 

 

 

 

 

 

 

 

1890년 오스트리아 도나우강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에곤 쉴레는,
그의 부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쉴레의 데생에는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모습과
과격한 포즈를 한 어린 소녀의 누드화가 많이 있습니다.

적나라하게 성적인 부분을 강조한 모습,
심지어 자위하는 소녀 혹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거리나 공원에서 놀고 있는 여자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모델로 그린 적이 많다.

한번은 이런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이웃들이
“미성년자 유괴”와 “풍기문란”의 명목으로 쉴레를 고소하여
24일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른들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도 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쉴레의 인식을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재판 결과로 자신의 그림이 불태워지는 모욕을 당한 뒤 쉴레는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옆집의 총명하고 조신한 여인을 발견하고 결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쉴레에게는 17살의 나이에
그에게 찾아와 4년 동안 모델과 부인 역할을 해주며 동거하던 여자 발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그는 “나는 결혼을 할 작정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발리와는 아니지요.”라고 친구에게 말합니다.

일년 뒤 쉴레는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4일 뒤 입대를 합니다.
군대에서도 쉴레는 재능을 인정받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틀리에와 박물관 근무 라는 혜택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전시회도 하죠.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1918년 즈음, 쉴레는 여러 전시회와 그룹의 초대를 받기도 하고,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으며 애호가들도 생겼습니다.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반 고흐의 활동시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873~85년의 첫번째 시기는 잇따른 실패와 진로의 전환이 있었던 수습기로 자신의 까다로운 기질과 씨름하면서 진정한 자기표현의 수단을 찾으려 애쓴 시기였다. 1886~90년의 2번째 시기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빠른 성장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시기였지만, 1889년부터 정신적인 위기가 잇따랐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호우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 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졌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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