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눈찌른최북과귀짜른고흐

이모르 2020. 12. 23. 14:58

毫生館 崔北 1712-1786

 

 

 

조선 후기 화가 산수화 메추라기 를 잘그렸고 시에도 뛰어났다

심한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수각산수도 한강조오도 등이있다

 


崔北筆豪鷲 예토도

 

자존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도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안다. 그러나

그 보다 약 백몇십년 앞선 시대의 스스로 눈을 찔러버린

우리나라의 화가 최 북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 북(18세기)은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다.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여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리었고

 

호는 붓 한 자루에만 의지해 먹고살겠다는 호생관(毫生館)이었다.  

 그는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쪼개 칠칠(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칠이는 못난이,  바보를 일컫는 속어이다. 그는 아무 곳에도

 매인 데가 없는 자유인이었다.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그리지 않았다.

 화가에게 눈은 목숨과 같이 귀중한 것일 진데,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가면서도 기성의 권위와 강요에 굴하지

 않는 기질을 보여주었다.

 고흐가 자기 내면의 감정으로 귀를 잘랐다면 최 북이 눈을 찌른 것은

 외적 권위와 강요에 대한 대항이었다. 한 세도가가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 북은 그려주지 않았고 여러번 강요해도 끝까지

 응하지 않자 세도가는 강압적으로 신체적인 위협을 하려 들었다

 이에 최북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남이 나를 강압해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차라리 내가 나를 위해하마”라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버렸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국을 주유했다.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그 경치에 탄성을 터트리다가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못 속에 뛰어 들기도 했다. 최 북은 전국 명승지에서

 노닐며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했고 인정에 취했고 자기예술에

 도취되어 숱한 명품을 남겼다. 그는 욕심이 없으면서도

 광기의 기질이 있었다.

 예가는 당당한 자유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표훈사도(表訓寺圖)

 


금강산의 표훈사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듯 뚜렷하게

 넓은 폭으로 전개하여 묘사한 작품

 

일종의 평원산수법(平遠山水法)에 의해 내산과 외산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묘사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산으로 들어 갈수록 멀리 있는

높은 산들이 오히려 낮게 보이는 시각의 착각 현상을

 그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족자 종이에 수묵 담채 38.5*57.5cm 한국 개인 소장

 


서치홍포

 

 

맹우도(猛牛圖)

힘차게 고개를 위로 쳐들고 물을 건너는 황소와

그 위에 채찍을 두 손으로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꾸부린 목동으로 전체를 채운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물결의 무늬나 짐승의 털을 그리는데 있어 사실적 기법의

의도가 보이나 소털 하나하나의 올을 매우 굵게 그려

사실감이 많이 감소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그림은 소의

힘찬 운동감이나, 두 눈 사이가 아주 멀어서 대단히

해학적(諧謔的)으로 보이는 목동의 얼굴등 매우 재미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종이에 채색 24.2*32.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옥산수(草屋山水)

이 그림은 가운데 접힌 흔적으로 보아 화첩의 한 장이었을 듯

 비교적 작은 산수화이다. 그림 왼쪽 위에는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제(題)가 있어,

그 구절대로 공산(空山)의 텅빈 초옥(草屋)이 보이고

그 옆에 선 두 그루의 나무가 근경을 채우고 있다. 그림

가운데 얕은 산봉우리가 보일락 말락 엷은 먹으로 그려져 있고,

 왼쪽으로는 약간 강한 묵점으로 숲이 울창한 계곡이 암시되었다.

나무 가지들도 실제의 모습과는 아랑곳없다는 듯 제멋대로 뻗었다.

일반적 화법을 무시한 이 모든 점이 작가의 기이한 성격과

높은 예술적 감각을 잘 나타내 준다.

종이에 수묵 담채 31.*36.1cm 서울 개인 소장

 

 

 


조어산수(釣魚山水)


최북은 여러 분야의 소재에 두루 능하였으며 전래된 작품도 적지 않다.

비교적 섬세하게그린 실경산수는 당시의 화풍을 대변하며,

사의적(寫意的)인 산수는 활달한 필치로 두드러진 개성이 보인다.

조어산수는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 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設彩) 등 중국에 잇어서도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족자 종이에 담채 66.3*42.9cm 서울 개인 소장

 

뭐야, 네놈이 정녕 그림을 못 그리겠다고? 감히 내 명령을 거절하다니... 관가에 일러 곤장을 맞게 할 테다. 곤장을 맞기 싫으면 어서 그려라!"

양반은 욕설까지 해대며 최북을 윽박질렀습니다.

그러자 최북은 발끈 화를 냈습니다.

"세상이 나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구나.

이럴 바엔 차라리 내 눈을 멀게 하겠다!"

 

최북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는 송곳으로 자신의 눈을 찔렀습니다. 눈에서 피가 철철 흐르자 양반은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달아났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눈이 하나 멀어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애꾸가 된후 전국을 유람 그림을 그려주고 유랑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죽기전 열흘을 굶다가

 

한폭의 그림을 팔고 술에 쥐하여 길거리에서 동사 하였다는 설이 전해 옵니다

 

빈센트 빌럼 반 고흐(네델란드오: Vincent Willem van Gogh 핀센트 빌럼 판 호흐 1853년3월30일-1890년 7월29일 레델란드 화가

 

 

 

왜 귀를 잘랐나?
반고흐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귀를 잘랐더라도 그대로

가만이 있었다면 그것이 사회적인 물의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른 귀를 신문지에 싸서 가끔 만나려 가던 창녀에게 갔다 주었고

그것을 펴보고 놀란 창녀가 이를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귀 자르기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이 사건을 둘러싼 의문은 아직도 몇가지가 남아있다.
우선은 반고흐가 자른 귀는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귀에 붕대를 한 반 고흐의 자화상은 두점인데

모두 오른쪽 귀에 붕대를 감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정리하던 어떤 미술관의 직원이

그 목록에 <오른쪽 뒤에 붕대를 한 자화상>으로 기재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반 고흐가 거울을 보고 자기의 자화상을

그렸기 때문에 거울에 비쳐 좌우가 바뀐 얼굴이라고

이해 한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왼쪽 귀를 잘랐다는 확실한 증거는 반 고흐가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할 때 페롱 박사가 작성한

진료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다.
< 이 환자 반 고흐는 아를의 병원에서 온 환자로서

눈과 귀의 갑작스러운 환각으로 심한 정신 착란의

발작을 일으켜 아를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환자는 발작 동안에 왼쪽 귀를 잘랐는데 이에 대해서는 

막연할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반 고흐가 자른 것은 자기의 왼쪽 귀임에 틀림이 없다
다음의 문제는 귀의 전부를 잘라낸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을 자른것인지이다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목격한 경찰관인 로베르 순경,

그리고 고갱은 귀 전체를 잘랐다고 했으며 입원 당시

그를 처음 진찰한 레이 의사도 고흐가 귀 전체를 잘랐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 테오의 부인 요안나와 사건이후 병원에서

문병왔던 동료 화가 시냐크는 반 고흐 귀의 아랫부분,

즉 귓불만이 잘려 있었다고 말했다.
후에 의사 가세 박사가 반 고흐가 사망한 후에 그의

얼굴을 그린 그림에서 왼쪽 귀의 윗부분 즉 귓바퀴는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만 귓불은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외이에는 혈관이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귀를 자르다 보면 다량의 출혈이 나타난다.
그래서 피 범벅이 된 상태에서 보면 마치 귀 전체가 잘린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혼동은 목격한 시간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반고흐의 상처가 치유된 후에 그를 정면에서 보면 귀의 결손된

부분이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어째던 왼쪽 귀 전체를 자르지 않은 것은 확실하며 정신 착란이

일어났을 때 왼쪽 손으로 왼쪽 귀를 잡고 오른쪽 손에 면도칼로

귓불을 자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창녀라셀에게서 잘린 귀를 받아든 로베르 순경은 상관에게 보고하고

아를 병원에 가져가 레이 의사에게 건네주었다.
레이 의사는 이를 봉합하려고 하였으나 사건이 발생한지

24시간이 지난 후라서 이미 때를 놓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를 알코올 병에 담아두었는데 학위식험 때문에

파리에 다녀오는 동안 후임 의사가 이를 버렸다고 한다.

왜 하필 귀를 잘랐을까?

반고흐는 귀를 자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기술이 것이 없다.
그가 정신 착란 상태에서 귀를 잘랐다는 것은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할 때 폐롱 박사가 남긴 기록. 즉 제 3자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반 고흐의 본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할수 없다.
그러나 지금와 와서는 그를 근거로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정신장애자가 자기 몸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은

어떤 명령적인 환각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반 고흐의 경우는 그 순간에 어디인가로부터 <너의 귀를 잘라라>하는

환청을 듣고 그렇게 자해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또 이러한 환각은 어떤 혼란스러운 잠재 의식이 발동되어 

괴로워하는것인데 이를 견딜수 없어 그것이 들리는 즉 자기

환각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귀를 자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행동이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간에

반 고흐가 자살을 기도한 것은 아님은 확실하다.
그런데 반 고흐가 귀를 자르기 

몇일전에 <아를 투우장의관중>을 그렸다.
이것은 아를에 예부터 있는 투우장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그 안에서 많은 관중들이 투우 장면을 보면서

지르는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이 투우장은 옛날 로마 시대의 바도리아누스

황제가 아를을 통치할때에 건설한 것인데 이 투장에서는

귀를 헌상하는 행위가 하나의 의식으로 존재한다.
용감한 투우사가 칼로 소를 찔러 소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면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열광하는데

그 투우사가 남자답게 용감하게 싸운것에 대한

 칭찬으로 투우사는 쓰러진 소의 귀를잘라 환호하는

관중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이를 바쳤다고 한다.
귀를 들고 장내를 한바뀌 도는 것이 남자로서 최고의 영예라면

그 귀를 헌상받는 것은 여성에게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고 한다.
반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 창녀 라셀에게 바친 것을 두고

그가 쓰러진 소와 승리한 투우사의 두 역을 혼자서

다 한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즉 고갱의 압도적인 지배를 거부하고 이에 벗어나려는

용기를 발휘하는 동시에 승리를 과시하려 라셀에게 바치고

싶은 무의식이 환청 환시로 나타나 행동 행동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를 투우장의 관중>이라는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추리를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반 고흐 죽음의 비밀에서 발취...

 

별이 빛나는 밤에

 

*또다른 해석

 

반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정신적인 발작 때문에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견해와 귀를 잘랐기

때문에 발작이 시작되었다는등 걷잡을수 없는 해석과 평가가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고갱과 관련이 있다는점이다.

여기에 덧붙일수 있는것은 이미 그에게는 귀를 자를수 있는

요인이 압생트를 통해서 몸에 배어 있었으며 그것도

그의 독자적인 예술을 탄생시킨 찬란한 노란색 빛깔을

얻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흐가 진술한 발작시의 증상들과 압생트에 관한 많은

의학 정보를 감안하면 그의 발작에 압생트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수 있다.

그가 압생트를 마시기 시작한것은 파리 몽마르트에 있을때 부텨였는데 

아틀리에서 만난 툴루즈 로트레크가 고흐를 데리고 술 마시려 다니곤 했다.

압생트에 중독되면 그 증상중 하나로 청각적인 환각, 즉 환청과

시각적인 착각, 즉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또 압생트 중독자는 성격이 혼란해진다.흥분, 권위적 태도 분노등이 나타나

그 성격이 변하는것을 볼수 있다.

또 일단 발작이 일어나면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공포에서 탈피하기 위해 거칠고 격렬한 공격적 충동을

느껴 남을 해치고 심한 경우에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서슴치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압생트 중독시에는 이러한 살인적 공격성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 고흐가 고갱을 공격하는 

대신 자기 귀를 자른것도 압생트의 급성 중독으로 인한

발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베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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