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뒤뜰과 앞엔 각종유실수가 있었다
6.25동란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셨던 아버님은
재물에 대한 애착이 없어 종친들과 사기꾼들이 땅이며 유물들은
갈취하여 없어진 상태이다.
어릴 때 용이 그려진 백자 항아리 할머니 시집올때 가져오신100 동자 병풍은
동리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의당 빌려가 초례청 마당에 병풍을 쳤었다.병풍과
항아리는 병풍 수리해준다던 야바위꾼이 그림을 오려 항아리와함께 달아나 버렸다.
5대조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활과 가죽구두 신라때 것으로 추정되던 큰 수저
등 없어진 모든 것은 어디에던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을것이다..
여식과 분원리를 여행하면서 도자기가 전시된 찻집에 들러 그 아름다운
항아리들을 보고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고려때 서해안 쪽에 분포되었던 도자기굽는 가마터는 잦은 왜구의 출연으로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가거나 사살되는 일이 빈번하여 점점 내륙으로 피난
와서 다시 가마터를 잡아 생산하게 되는데
사옹원 분원이 있어 분원리라는 마을이름을 얻은
경기도 분원리는 팔당땜의 건설로 가마터나 농경지가 대부분 수몰되었지만
지금도 많은 도자기 파편들이 발굴되고 있다 한다.
거기 전시관도 있고 한데
14--18세기 까지의 백자 를 두서없이 올려보는데 분원이후의 것들은 백자 청자를
혼용한 예술품이 많다.
우선 백자를 올려 그 해설은 맨 아래(하단)에 원 출처의 주소를 올려서
이해가 편하게 해보았다..참고적으로 백자는 국보로 지정된 것이 19점이라 한다
미술품의 가치가 곧 가격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조선백자가 처음 경매 최고가로 화제를 모았던 것은 1936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나온 18세기 '청화백자 국화무늬 병'이다. 이 병은 특이하게도 양각으로 국화꽃을 새기고 거기에 철채와 진사채로 붉은색을 가한 희귀한 명품이었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정도였고 조선백자로 2000원 이상 거래된 것은 거의 없었던 시절인데 경매 시작부터 순식간에 3000원, 5000원, 8000원으로 뛰는 열띤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 이 병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끝까지 따라붙은 일본인을 누르고 1만4589원에 낙찰시켰고, 훗날 국보 29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백자가 외국 경매에서 고가로 팔린 것은 1994년 크리스티 옥션에서 15세기 '청화백자당초문접시'가 308만달러(당시 약 26억원)에 낙찰된 것이었다. 이 접시는 아주 드문 조선 초기 청화백자 명품으로 동시대 명나라 백자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없는 완벽한 작품이어서 두 박물관이 경쟁하는 바람에 예상 밖의 높은 가격까지 올라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년 뒤인 9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17세기 철화백자용무늬항아리가 765만달러(약 64억원)에 낙찰되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하였다. 용준이라고 불리는 이런 항아리는 본래 궁중에서 연회할 때 꽃꽂이로 사용된 왕실도자기이다. 용의 발톱이 4개로 그려진 것도 왕을 상징한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최고급 도자기일 수밖에 없고, 특히 이 항아리는 기형이 아주 당당하고 기품이 있는 데다 철화로 그려진 희귀한 명품이어서 그렇게 높은 가격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결국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천하의 명품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priceless)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가격이 비슷한 작품에 그대로 대입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최고의 명품에 한해서만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2등과 3등, 3등과 4등은 분명히 한 등급 차이지만 1등과 2등 사이는 몇 등급 차이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흥준의 국보순례 한국도자기의 최고 경매가 전재 "
'백자 진사(辰砂) 연꽃무늬 항아리'
분청자 물고기무늬 편병
'분청사기 철화 연꽃무늬 항아리'
국보309 310 달항아리
국보166호
백자철화매죽문대호(白磁鐵畵梅竹文大壺)
백자 매화 대나무 무늬 항아리
청화백자매조죽문호는 조선 초기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무렵 백자 항아리의 형태와 문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6.8㎝, 입지름 6.1㎝, 밑지름 8.8㎝의 뚜껑있는 백자 항아리이다. 뚜껑의 꼭지는 연꽃봉오리 모양이며, 어깨는 벌어졌고 잘록한 허리의 선은 바닥에서 약간 도드라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굽의 접지면 바깥둘레는 약간 경사지게 깎아내렸다. 뚜껑의 꼭지에 꽃잎 4장을 그리고 그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그린것이, 조선 전기 회화에서 보이는 수지법(樹枝法)과 비슷하다.
아가리 가장자리에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덩굴무늬를 그리고, 몸체의 한 면에는 한 쌍의 새가 앉아있는 매화와 들국화를, 다른 한 면에는 V자형으로 뻗어나간 대나무를 그렸다.
그림 속에 농담의 변화가 보이는 것이 전문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항아리는 조선 초기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무렵 백자 항아리의 형태와 문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종근기자
국보 제93호 백자철화포도문호는 몸통 전면에 푸른색이 감도는 유백색의 백자 유약이 고르게 칠해져 있는 이 항아리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백자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로 적당한 높이의 아가리에 어깨부분이 불룩하고 아래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는 모양이다. 크기는 높이 30.8㎝, 입지름 15㎝, 밑지름 16.4㎝이다. 직각으로 올라 선 아가리 둘레에도 무늬를 두르고 몸통에는 능숙한 솜씨로 포도 덩굴을 그려 넣었다.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포도 덩굴의 잎과 줄기의 생생한 표현으로 보아 도공(陶工)들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전문 화가들이 그린 회화성이 짙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포도문호는 몸체에는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포도 덩굴무늬를 그려넣었다. 특히 그 사실성 및 농담과 강약의 적절한 구사에서 18세기 백자의 높은 회화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시대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포도무늬를 그린 백자항아리로, 높이 53.3㎝, 아가리지름 19.4cm, 밑지름 18.6cm이다.조선시대에는 도화서의 화가인 화원들에게 도자기를 굽는 곳에 가서 도자기들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이러한 그림 중에는 청색 안료인 청화(靑華)로 된 것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검은색 안료인 철사나 붉은색 안료인 진사(辰砂)로 된 것은 비교적 수가 적었다. 항아리 중에서 포도무늬의 그림은 또 다른 격조를 가지고 있다.
이 항아리의 크기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조선 중기 항아리의 전형으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항아리의 아가리는 알맞게 올라왔으며, 아가리에서 어깨까지 둥글게 팽창되는 모습이 당당함과 대담함을 느끼게 한다.
보물 1060호 백자철화끈무늬병
상감백자
국보 제175호오 지정된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은 고려 백자의 전통을 이은 조선 전기의 백자 대접으로 높이 7.6㎝, 입지름 17.5㎝, 밑지름 6.2㎝이다. 바탕흙은 석고와 같은 질감으로, 벽이 얇은 그릇이다. 아가리 부분이 밖으로 살짝 벌어지고 안쪽 윗부분에는 단순화된 덩굴무늬가 둘러져 있다. 바깥면에는 그릇의 위와 아랫부분에 두 줄의 띠를 두르고, 그 안에 연꽃 덩굴 무늬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바로 이러한 백자상감류는 조선시대 15세기 중반경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대체로 경상도와 일부 지방가마에서 고려의 수법을 계승하고 있다.
백자 청화 동화 장생문호
백자 장생 무늬 항아리
• 한자白磁 靑畵銅畵 長生文 壺
• 국적/시대한국(韓國)-조선(朝鮮) <19세기>
• 재질도자기(陶磁器)-백자(白磁)
• 크기높이 37.3cm
• 소장기관국립중앙박물관
• 유물번호덕수(德壽)-004801-000
장생 무늬는 이른바 ′십장생(해˙산˙물˙돌˙소나무˙달 또는 구름˙불로초˙거북˙학˙사슴)′을 넣어 장식하는 것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용도로 제작되었다. 사선 구도로 뻗어 있는 붉은 소나무를 중심으로 좌우에 학, 거북, 사슴, 대나무, 구름 등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청화와 동화 안료를 함께 사용하여 화려한 느낌이 주고, 안료의 발색도 짙은 편이다.
백자동화죽문호
• 한자白磁銅畵竹文壺
• 국적/시대한국(韓國)-조선(朝鮮)
• 재질도자기(陶磁器)-백자(白磁)
• 크기높이 20.9cm 입지름 11.7cm 바닥지름 9.9cm
• 소장기관국립중앙박물관
• 유물번호수정(水晶)-000349-000
산화동(酸化銅) 안료로 문양을 그려서 문양이 붉은 색을 내는 진사 백자가 조선시대 어느때부터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남아 있는 유물들로 미루어 17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진사 항아리는 어느 지방 가마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품이다. 산지가 개성 근처라느니 강화 교동(嶠洞)이라느니 하는 설이 있으나 아직 가마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바로 선 나지막한 입 부분의 끝이 도톰하게 말렸으며 그 아래 어깨가 맵시 있게 부풀었다. 허리는 약간 잘룩하고 굽은 몸체 밑둥에서 대담하게 꺾여들어 훨씬 안쪽에 붙었다. 이 항아리의 입 부분과 몸체 및 굽이 엮어내는 멋진 조화는 한국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의 경지이다. 얼핏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두고 바라볼수록 더 애정이 가고 그 특출한 조형 감각에 찬사를 보내게 되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양면에 진사로 곧게 선 대나무를 그렸는데, 하나는 크고 반대편 것은 작다. 이런 모양의 대나무는 흔히 18세기 중·후반의 백자청화에서 종속 문양으로 등장한다. 대나무 사이의 양면에는 십자형으로 변형된 구름을 그렸다.
백자 구름 용무늬 항아리
• 한자白磁 靑畵 雲龍文 壺
18세기 후반예로부터 상상의 동물인 용은 신령스럽고 상서로우며 막대한 위력을 가진 동물로 인식되어 임금을 상징하였다. 이 작품은 18세기 후반의 분원리分院里 관요官窯 제품으로 생각되는데, 형태가 당당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구름 속을 힘차게 날고 있는 용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몸체 위쪽에는 넝쿨과 여의두무늬를, 아래쪽에는 여의두, 연꽃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품격이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미루어 왕실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가 있는 백자 접시
한자白磁 靑畵 詩銘 褋匙
15~16세기아가리가 수평으로 낮게 벌어지고 바닥 면이 둥글고 납작한 형태의 접시를 ‘전접시’라고 부른다.
특히 백자 전접시 가운데 납작한 접시 면에 그림이나 시를 적어 넣은 것들이 많다.
이 접시도 은은한 광택이 있는 순백색 바탕에 낭만적인 칠언시七言詩가 청화 안료로 단정하게 적혀있는데, 조선시대 선비의 멋과 풍류가 그대로 담겨있다.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溪月泠陶令醉
대나무 숲 시내에 달빛이 서늘하매 도연명陶淵明이 취하고,
花市風香李白眠
꽃 시장에 부는 바람 향기로워 이태백李太白이 잠드네.
到頭世事情如夢
눈 앞의 세상 일은 정겹기 꿈과 같아
人間無飮似樽前
인간 세상 술 없이도 술잔 앞에 있는 듯해.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文壺)
국보 제176호
청화백자 (靑華白磁) - 사진
순도 높은 순백의 기면(器面) 위에 산화코발트계(CoO)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장석질과 석회석질의 유약을 그 위에 씌워 1,25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
소성(燒成)한 백자기이다. 초기의 이름은 고청화(古靑華)이며,
청화백사기(靑華白沙器) 또는 청화자기 등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청화(靑華)로, 일본에서는 청화(靑花)로 많이 쓴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청화백자와 관련하여 청화(靑花)·화자기(畵磁器)·화사기(畵沙器)·화기(花器)·
화기(畵器) 등의 용어가 보인다. 현재는 '푸른색의 무늬'라는 의미에서
청화(靑華·靑畵·靑花) 등의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청화자기는 원(元)나라 중기에 시작, 징더전[景德鎭] 가마에서
대량 생산되어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명(明)나라 선덕연간(宣德年間:1426~1435)
및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는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였고, 이후
청(淸)나라 때까지 자기의 주류를 이루었다. 산화코발트 계열의 안료는
본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견되어 사용되었는데 서역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회청(回靑)·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렸으며, 한국에서도 청화백자
전래 초기에는 그렇게 불렸다.
한국에 전래된 것은 14세기 말이며,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15세기 중엽 이후이다.
실록에 있어〈효종실록〉 6년(1655)에 태종이 고려의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있을 때 애용했던 청화잔(靑花盞)에 관한 기록이 있어 중국 원대의 청화백자가
적어도 고려말에는 한국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부터 회청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입안료의
구입난으로 세조 때 국산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사용하려는 시도를 했고,
〈예종실록〉에도 토청개발 및 시험번조에 관한 기사가 있으므로 이미 세조 이전에
번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경 청화백자는 주로 중국 명대 청화백자의
문양과 기형 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양질의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던 경기도 광주지역의 가마에서는 조선초부터 왕실에서
사용할 사기제조를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번조를 감독하고, 청화백자의
문양을 화원으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 이 시기의 청화백자가 발견되는 가마터로는
오전리(梧田里)·도마리(道馬里)·무갑리(武甲里)·관음리(觀音里)·
도수리(陶水里) 요지가 있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시문양식(施文樣式)에서도 나타난다. 초기의 주요 무늬는
조선시대의 회화적인 무늬로 하고, 종속적인 무늬, 즉 접시 테두리와 항아리의
아가리 부분 및 어깨 부분의 무늬는 연꽃잎 무늬 등을 시문하다가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종속적인 무늬가 완전히 소멸되고 회화적인 무늬만이 남는다.
17세기 전반경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제적 타격으로 청화 안료가 부족해
철화백자(鐵畵白磁)의 생산이 증가하는데 이들은 번조방법에 있어서도
청화백자보다 거칠고 태토 역시 회백색을 띤다. 따라서 청화백자도 회백색의
태토로 만들어지고 기벽이 얇아지는 현상을 보이며 송하인물무늬[松下人物紋]가
나타난다.
이러한 청화백자가 출토되는 곳으로는 무갑·관음·
대쌍령(大雙嶺)·곤지암(昆池巖)·정지(亭支) 등이 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 다시 청화백자가 증가하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17세기말 신대리(新垈里) 가마터에서는 회백색 태토의 철화문이 그려진
백자들이 발견되었다. 1717~20년의 오향리(五香里) 가마에서는 담청을 띤 설백색
백자편과 각(角)이 있는 파편들이 발견되는데, 궁평리와 관음리에서는 신대리와
오향리 가마의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들 두 가마의
중간 시기에 놓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청화백자의 생산이 증가되었다는 것은 요업(窯業) 자체가 회복·
안정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왕실전용 사기제조장이었던 분원이 왕실상납용뿐만
아니라 일반 판매를 목적으로 사사로이 번조하게 되는 것과도 상관이 있다.
18~19세기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고 갑발에 넣어 정교하게 구우면서
감상용 자기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주요 작품에는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紋壺;국보 219) ·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瓷弘治銘松竹文壺; 국보 176) ·
청화백자매조죽문병(靑華白瓷梅竹文壺; 보물 659) ·
청화백자운룡문병(靑華白瓷雲龍文甁; 보물 785) 등이 있다.
1994년 4월 28일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競賣)에서 조선시대의
모란무늬청화백자접시가 도자기 경매사상 최고가인 308만
달러(24억 6000만 원)에 팔림으로써 한국미술품의 진가를 세계에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백자청화매죽문호
• 한자白磁靑畵梅竹文壺
• 국적/시대한국(韓國)-조선(朝鮮)
• 재질도자기(陶磁器)-백자(白磁)
• 크기높이 12.4cm 입지름 7.3cm 몸통지름 13.6cm
• 소장기관국립중앙박물관
• 유물번호덕수(德壽)-003568-000
조선 왕조 초기 청화백자 항아리로, 기형(器形)과 문양, 유약, 청화의 발색(發色) 등에서 초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어깨 부분에 여의두(如意頭) 무늬 띠를 돌렸고 아랫도리에 연판(蓮瓣) 무늬 띠를 돌렸으며 그 사이 몸체의 넓은 면에 시원하게 여백을 살리면서 매화와 대나무를 그렸다. 문양은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렸으나 농담(濃淡)의 변화가 있고 수지법(樹枝法) 등에도 조선 왕조 초기다운 격조가 있다. 옅은 푸른 기를 띤 유백색 백자유가 씌워져 있으며 빙렬(氷裂)이 없고 부드럽고 차분한 질감을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의 백자 항아리. 높이 26.5㎝, 입지름 14.3㎝, 밑지름 16.5㎝. 국립중앙박
물관 소장.직립된 입부분에 어깨에서부터 급히 벌어졌다가 서서히 좁아진 모습의 항아리로,
내외(內外)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
안의 것은 문양이 없으며 밖의 것은 투각수법(透刻手法)으로 몸체 전면에 활짝
핀 모란과 그 줄기·잎을 표현하였으며, 어깨부분에는 청화(靑華 : 중국에서 나는
푸른 물감)로 간결한 당초문대(唐草文帶)를, 허리 밑부분에는 양각(陽刻)한 여의
두문(如意頭文)과 넓게 홈이 난 양각대선(陽刻帶線)을 둘렀다
.
유색(釉色)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전면에 고르게 시유(施釉)되었
으며 은은한 광택이 있다. 굽다리는 안바닥을 깎아 세웠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유색이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인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경기도 광주군 분원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필통 등에 다양하게 투각되던 모란문양의 표현과 여의두문의 존재로 보아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항아리에 이처럼 복잡한 투각의 문양이 있는 것은
희귀한 예로서, 특별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항아리
아래 부분에는 몇 군데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원문출처:simjeon.kr/xe/33998
분원(分院)과 분원(汾院)과 분원리(分院里)
http://blog.naver.com/arts114/20143254737
광주 백자 도요지
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science/s...
유흥준 명지대 교수의 국보 순례
http://www.chpri.org/planserially/content.asp?bCode=120&page=0&sColumn=&sText=
조선시대 백자의 종류와 특징
http://carvehomes.blog.me/100116214150
한국의 그릇 영혼을 담다.
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7...
조선 백자의 장식과 무늬
http://blog.daum.net/tiemto01/4
백자청화동화장생무늬항아리
http://blog.naver.com/PostView.nhn?
blogId=rbh54&logNo=90109998042&categoryNo=154&viewDate=¤tPage=1&listtype=0
http://roks821.egloos.com/8001493
조선시대 도자기
http://blog.naver.com/teamay/70003329877
백자동화연화문항아리
http://rbh54.blog.me/90109454974
국보 309 310호 달항아리
http://blog.daum.net/bufine/93
청화백자 매죽문 항아리
http://cafe.daum.net/suiljae/Atep/2175?docid=pjUF|Atep|2175|20100304085706&q=%B1%B9%BA%B8%B9%E9%C0%DA%C7%D7%BE%C6%B8%AE
회화공예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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