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뽐으며
열띤 토론을 별렸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타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동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랫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묻고
월급이 얼마인가를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위하여 살고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끼고
오랜 방황끝에 되돌아온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곳에
낮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섯고
플라타너스 가로수 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있는 몇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 햇고
또 한 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겼다
출생 1941년 1월 7일 (만70세) | 뱀띠, 염소자리데뷰 1975년 '문학과 지성' 등단학력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김광규 시인의 독역 시선집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의 시인 김광규(69) 한양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두 번째 독역 시선집 출간을 계기로 또다시 독일 낭독여행에 나서 독일 문화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조개의 깊이'에 이어 10년 여 만에 나온 두 번째 독역 시선집엔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인 `처음 만나던 때'에 실린 `녹색별 소식(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이 표제로 사용됐으며, `주차장의 밤', `일주문' 등 그의 중기 이후 대표작 73편이 실려 있다. 2010.10.31. ks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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