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보물 !!
1596년 선조29년 왕명에의해 민족의학을 정립시키는
대역사를 착수하다
광해군때 동의보감 26권을 완성한다.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에서 동의보감이 담은
시대정신과 독창성 세계사적
중요성을 들어 허균이 직접 관여한 초판
완질본 (보물 제 1085호 1085-2호)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으며
의학서적으로는 처음이다.
이찬란한 의술이 대중적인 보급에 있었습에도
그에 미치지 못하는
민초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우리가 어렸을때 1960년대 까지도 담벼락
같은데 눈안질을 예방하려고
얼굴을 그리고 눈그림에다침을 꽂는전혀 비과학적
샤머니 치료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와 왔었다.
여기 그 몇점의 사진으로 비상식적이기는
하나 마음으로부터 치료되기를
염원하는 몇점의 사진을 올려봅니다
눈병 치료 그림을 그리고 눈병이 있는
눈에다 못을 박아 눈에 들어간 액귀를 쫒아낸다.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을 그린 다음
그 복부에 칼을 꽂아 두어
말라리아를 퇴치했다.
장티부스를 예방하기 위해 소머리와
마늘을 문앞에 둔다. 경기도
전라남도에서는 말라리아 퇴치 방법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환자의 발바닥에에 쓴다.
환자가 남자인 경우 왼쪽 발바닥에,
여자인 경우 오른쪽 발바닥에다 쓴다.
사진에는 "박대용"이라고 쓰여있다.
맥주병으로 황담 치료
환자가 있는 방 앞에 맥주병을 걸어두면
황담이 낫는다고 믿었다.
환자의 옷이나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어두면
홍역이 낫는다고 믿었다. 평안남도
설사퇴치
밥대접 위에 젓가락으로 십자가로
올려 놓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경상북도
고추를 처마밑에 걸어 두면 콜레라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 액운을 짊어진 -
강이나 갈버닥에 버리면
각종 병이 낫는다고 믿어왔다.
한국 한의사
(History of Korean Medicine)
한국의학의 기원은 아득히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땅에 우리의 선조가 정착하던 먼 옛날부터 의료행위는
존재하였을 것이다.
즉 이것은 아픈 데를 문지르거나 음식을 잘못 먹었을 때
토해내는 경우와 같은 본능적 의료행위를 말한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가는 동안에 모든 질병은 외부의
이물이 몸 안에 침입한 결과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기에
질병의 원인이 되는 이물을 몸밖으로 배출하는 것을
치료법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편 당시의 사람들은
소박한 자연숭배의 신앙이 있었다.
이 자연숭배는 차츰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으로 발전되었고, 앞에서 말한 이물의 개념과
결합되어 귀신의 개념을 낳았다. 즉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질병은 귀신의 소행이거나 혹은 귀신이 몸 안에
침입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악귀를 몸에서 몰아내면 질병이
치료된다고 믿었다. 이로부터 고대 의료의 중심이 되는
샤머니즘이 형성되어 주술적 방법으로 악귀를 내모는
주술사, 즉 샤먼이 질병을 치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한편 우리의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 '
고조선조'를 보면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제왕운기』에 '飮藥'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술적 의료가 중심이던 시대에 이미
약물요법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또한 쑥과 마늘은 중국본초학의 원전인 『신농본초경』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국의학이 그 형성초기부터
중국의학과는 다른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외래문화의 유입과 함께
한국의학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고조선시대의 전통적 의학지식을
이어받은 가운데 인접한 중국의 의학을 결합시키고 다시
멀리 인도의학까지도 가미하여 독자적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고유한 전통의 바탕 위에 당과 인도의
의학을 융합하여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의학을
수용하는 한편 불교에 수반된 인도의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신흥국가인 송과의 교류에 의하여 점차
그 의학지식을 섭취하였고, 송과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전해진
서역 및 남방열대산 약품들의 수입으로 인하여 많은
의학지식을 융합하게 되었다.
그런 도중에 고려 서북방의 몽고족들이 일어나 원을
건국하였는데, 원으로부터의 의학지식의 전래는 활발하지 않아
고려의 의학은 더욱 그 독자적 태세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국산 약재에 대한 연구가 점점 깊게 되어
수종의 향약방서가 출현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의학은
표면적으로는 송, 원의 의학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이나
내면적으로는 한국의학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의학의 기초이론은 송, 원의학의 체계를 따르는 듯하면서도
임상처방은 통일신라시대의 의방을 계승한 고려의방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로서는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등
고유의방서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융성한 국운과 함께 의학에서도
신기원을 맞이하였다. 고려후기에 크게 일어났던 의학의
자주적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져 조선초기의 강력한
향약진흥책에 힘입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의학은 우리의 고유한 임상경험방과
병존하면서 한국의학의 이론적 근간을 형성해 왔다. 즉 한대에
성립된 중국의학은 신라시대에 당의학이라는 형태로 전래되어
다시 고려로 전승되었고, 또한 송의학으로 고려에 도입되면서
고려의학의 학리 발달에 기여하였다. 고려 후기에 새롭게
금원의 의학이 도입되었으나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조선에 이르러 수용되면서 의학이론을 다양화시켰다.
그리하여 세종대에 이르러 그동안 우리나라에 전해진 각종
중국의학서적이 체계적으로 총정리된 『의방류취(醫方類聚)』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후 명으로부터 수입된 의방서들과 그 방서의
언해본이 많이 간행되어 전문분과의 경험방서들의 저
술을 보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왕명으로 허준에 의해 『동의보감(東醫寶鑑)』이
간행되어 당시의 의학을 통합하였다.
우리나라의 의학은 이론면에서는 중국의학의 이론을 근간으로 하되
임상면에서는 향약을 위주로 하는 고유의학에 치중했었는데,
이런 이원적인 구조가 『동의보감』에 이르러 일원화된 것이다.
허준은 역대의 학설을 그의 독자적 이론체계로 통합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적 고유의학을 그 체계 안에 통일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동양의학의 한 줄기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동의보감』은 우리의 고유의서인 동시에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되어 온 제학설을 통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양의학권에서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의보감』은 동양 3국에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실증주의적 학풍이 풍미하면서 실제와
경험을 중시하여 분과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당쟁에서 벗어난 재야의학자들은 자신의 진료경험에
입각하여 당시 창궐한 질병의 치료에 주력하여 신학풍을 일으켰다.
또한 사회의 피폐화에 따라 실용적인 간편한 의서들이 만들어져
가난한 서민들의 질병을 고치는 데 활용되었다.
이런 의학이 유행하던 때에 이제마의 사상의학이란
독창적인 학설이 출현하였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심신의 통합체인 인간 개체를
체질분류를 통해 유형화하고 그에 상응한 치료방을
제시한 것으로 한국의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이후 한국의학은 서양의학의 도입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많은 시련이 있었으나 그 맥이 면면히 이어져
새로운 발전의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출처 약천사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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