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명성황후살해사건 살인자명단

이모르 2021. 1. 2. 05:54

일본 대표뉴스 방송에서 상세하게 방영한

명성황후 살해 사건

어느 나라든 역사를 말할 때에는 자국 중심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은 많은 갈등을 겪어 왔고,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는그 분노와 아픔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도 문제나 교과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필자는 정치적인 이슈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시골 중학생들의 축구시합 같은 민간 교류까지

단절되는데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가리지 않고) 때만되면극소수 우익단체의

기사나 데모 등, 소수의 언동을 일반화시켜 보도하는 미디어와

거기에 낚여 흥분하는 네티즌들의 댓글도 안타깝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824일 방영된 일본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보도 스테이션"15분 정도에 걸친 민비 시해 관련 보도는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기도 하고,지금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인 나 자신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기도 했다.아래는

뉴스에서 보도한 내용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반일"이란 어떤 것일지,정치권과

민간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갭이 얼마나 되는지, 또는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일본인의관점은 어떤지 등을 생각해 보고, 자기

나름대로도 다시 한 번 식민지시대의 아픈 기억이지만

되새겨보는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특히 일본과 이웃인 한국. 한일관계라는 것이

중요시되는 국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피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14년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조선왕조의 왕비, 민비라는 인물이 살해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민비 암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한국 사람들의 반일감정의 원점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교에서는 거의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것을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이 사건에 관여했다고 보이는 상호의 자손이 만나서 손을 잡았습니다."


 

 

규슈 구마모토.

이곳에 일본과 한국 역사의 사이에서 오랫동안 마음에 십자가를 짊어져온 남성이 있다.

가와노 타쓰미씨. 87.

 

초등학교 4학년쯤에, 어머니로부터 이것은 할아버지가 조선의 여왕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을 너에게 준다..죽였던 때의 증거인 것이지..”

 

 



 

가와노씨가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암살 사건. 조부가 관여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부터 100여년전.

19세기말의 일이었다.

 


 

이 때 조선은 왕조 시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왕비인 민비였다.


 

1895 108일 이른 아침.

군대를 이끈 일본인 일단은 경복궁에 침입해서 왕비를 살해한다.



세계적으로도 충격을 준 민비 암살 사건.

 


 

왕비는 사후에 명성황후라고 불려졌다.

 


 

제 어머니가 말한 건데.. 누가 민비인지 몰랐는데, 결국 모두(12명이)

민비를 둘러쌌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중심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향낭.

조부가 왕비를 살해한 증거라고 들었다.

가와노씨는 어린 마음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손에 들고 지켜보았다.

 

 

집안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옷장 속에

넣어 두고 가끔씩 꺼내 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이후 80여년, 가와노씨의 마음 속에서 무거운 십자가로 되어간다.

 


 

신문기자였던 가와노씨의 조부. 도대체 왜 민간인이 암살에 가담하였는가.


 

 

19세기말. 일본은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조선반도를 거점으로 대륙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1894,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반도도 싸움의 무대가 된다.

 


 

다음해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반도로 진출한다.

한편 민비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남쪽으로 진출하는 남하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민비를 암살하게 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직접 상대로 해서 싸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선내의 인물은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을 상대로 해서 국가적인

폭력을 자해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죠.”



사건은 조선주재의 전권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했다고 한다.

 


 

가와노씨의 조부는 한성, 지금의 서울에 있는 신문사에 일하고 있었다.

사장은 미우라 코시와 알고 있던 사이로 계획 단계부터 가담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사장의 출신지가 구마모토였던 것으로부터 사건에 많은 구마모토 현민,

주로 신문기자가 관여하게 되었다.

 


 

현지의 일본 영사가 작성한 조사보고서 등에 의하면 당시의 미우라 공사는

조선인에 의한 쿠데타로 보이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건은 궁내에 있던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에게도 목격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 공사 등, 관계자를 구속해서 조사를 했다.



그렇지만 결국엔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석방되었다.

 


 

현재, “나라의 어머니라고 연모되고 있는 민비의 암살 사건은 한국인의 반일

감정의 원점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선생님)“명성황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

 

(학생)“1895년에 일본 공사 미우라 부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사건 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반도의 식민지 지배를 시작했다.


114년의 긴 시간, 한국인은 계속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인은 그 원한의 정체를 알 수조차 없다.




저는 조부가 그렇게 했다고.. 그렇지만 경복궁의 그림에 바로 조부가

칼을 들고 있는게그것에는 저도 죄를 느낍니다.”

 


 

가와노씨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상처를 지니고 온 사람이 있다.

이에이리 케코씨 80.

 

 

이에이리씨의 종조부, 이에이리 가키치도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 18. 조선에서 일본어 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에이리家에 전해지는 일본도.

칼집(사야)만 있어요. 안은 그러니까.. 남편이 대나무로 만들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들어가니까.. 따로따로 되어 있었습니다. 종조부는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갔다고 말은 안해요. 안하지만, 안이 없다는 것은

가져가지 않았는가..하고

이에이리 가키치는 귀국할 때에 증거 인멸을 위해 칼을 일본해(동해)에 버렸다고 보여진다.

 


자손으로서 정말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무거운 십자를 짊어진 두 사람.

가와노씨와 이에이리씨는 하나의 큰 결심을 했다.

구마모토에 있는 역사연구회의 요청에 역사의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명성황후, 민비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서울에서 버스로 1시간. 홍릉이라는 묘의 입구에 도착했다.

마침 이날, 명성황후의 손자의 제사가 열릴 참이었다.

 

 

저의 할머님, 명성황후 시해를 했던 낭인들의 후손들이 여기와서 백배

사죄를 한다고 하길래. 민간차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민간차원에서 하는

건 얼마든지 황실의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반길 수 있는 일인데, 그 뼈저림,

역사는 우리 황실에서는 잊을 수 없는 겁니다. 그건 분명히 밝혀둡니다.”

 

자손인 가와노씨가 방문한 것은 한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가와노씨는 사전에 참배 허가를 받아다.

 


 

이것이 홍능이라는 명성황후 민비의 묘.


묘를 관리하는 측으로부터 한국의 예의에 따라 지면에 무릎을 꿇고 3회 절을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조부를 대신해서 사죄합니다.”


앞으로 일본도 한국과 사이좋게 지냅시다. 그런 기분으로 참배했습니다.”


 

 

이웃이니까 사이좋게 지내는게 당연하지요.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라든가,

한류라든가.. 저희들의 마음을 초월하는 듯한 친근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가와노씨은 이날 하나 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80년전에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민비의 향낭을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향낭은 언젠가 잃어버리고 말아서 가와노씨는 이날을 위해서 도감 등의

자료를 조사해서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가와노씨.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십자가를 드디어 내릴 수 있었다.


 

 

흥분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말이죠.. 이것으로 저는 죽어도 좋아요.”


 

그 후에도 가와노씨는 참배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전해졌는지, 명성황후의 묘를 지키고 제례를

담당하는 조선왕조의 자손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일행은 구마모토에 도착.

가와노씨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가 온 이유는 지금 사죄를 받고, 사죄를 하고, 그런거보다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과거에 있던 역사를 다시 가르키고 다시 깨우치고 해서 양국간의

국민감정을 해소하는 게 저거(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문제로 하나하나

씨를 뿌려 나가기 위해서 온 것이죠.”


저는 오히려나쁜 짓을 한 조부였지만, 한국은 좋아합니다…”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비 암살로부터
114.

지금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열리려고 하고 있다.

 


(메인 앵커 후루타치)
잇시키씨, 역시 복잡한 생각이 서로 있어도 이겨내려는 첫걸음이라는

기분으로 걸음을 내디딘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봤습니다.”

 

(코맨테이터 잇시키)
그렇죠.. 일본인으로서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알아두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원래 일본의 역사 교육이란 것이 메이지

이후의 근대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요,

정말은 이 근대야말로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메인 앵커 후루타치)
국가가 강한 국가가 되려고 타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역시 한국 사람들로부터

보면 이런 오래된 원한은 갑자기 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하고 이렇게 해서 민간 레벨에서 움직여서

우선 서로 손을 잡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맨테이터 잇시키)
그렇죠. 정말 전진해 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벽상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 碧常 황판욱

 

 

 

명성황후 살인자 리스트

 

 

시해당시 살인자들의 행동강령이다.

1. 군측(君側)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 선전하고,

2. 대원군을 명목상의 영수(領袖)로 추대옹위(推戴擁衛)하고 대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弑害)하되,

 

1) 조선일보연재, 소조천수웅(小早川秀雄)

 

수기 명성황후 최후의 진상위급 고하는 풍운참조.

2) 이선근 저 한국사현대편 제2편 제2절 참조

 

3. 행동 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서

그들의 쿠데타처럼 가장하며,

4. 일체 악행의 전위대(前衛隊)로는 흉포 무쌍한 일본의 민간인  

낭인부대(浪人部隊)를 내세우되, 그들의 엄호(掩護) 및 전투의

주력은 일본수비대가 담당하며,

5. 대원군 옹호를 위한 별동대로는 일본 조계(租界)

경비의 경관대도 동원한다.

얼마나 악날하게 그날의 계획했는지 알 수 있다

 

 


 

명성황후시해전날인 107일촬영한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순보사(비밀아지트)

앞에서 촬영한 사진!일본인들의옷이 증명해주고있다.한성순보사의

책임자는 바로아다치겐조임!

이들 살인범들은 신문사11, 순사 8,

통역관 6, 상업 5, 농업 5,외교관 3,

겐요사[우익단체]3, 교원2, 무직 2, 의사 1,

저술업1,승려 1명 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나이를 보면

502, 409, 3020, 2016, 101명 입니다.

출신지역은 구마모토 21, 나가사키 4, 가고시마 4,

후쿠오카 4,

도쿄 2, 가니기와2명 와카타2, 시가시마 2,

지바구치 1, 나가자키 1,이와테 1명 입니다.

아래의 살인자들은 확실히 그 죄악이 나타난[]들입니다

.

살인자 1.

메이지 일왕[ 明治日王]

1852113- 1912730

 

 

일본의 제 122대 일왕이다.

본명은 무쓰히토(睦仁)이다.

일국의 국모를 살해하는일에 나라의 수장인 일왕이

몰랐다고 하면 그 누가 믿으랴또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일왕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 점을 알려준다.

명성황후 상해 사건 지휘자들이 일왕의 측근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해준다.

살해범들은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석방되자 마자 전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로동경까지 오는데

모든 연변에서 이사람들에게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도쿄에 도착했을때 일왕이 시종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노고를 치하했다고한다.일본정부는 애처부터

시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일본정부의

합작으로 저질러진 만행이기때문이다.

 

살인자 2.

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伊藤博文]

1841. 10. 14 일본 스오 구니[周防國]~1909. 10. 26 중국 만주

하얼빈[哈爾濱]에서 대한제국 우국지사안중근 에게 저격 사망.



 

 

오른쪽 대한제국 의민황태자 이은

우국지사 안중근은 재판장에서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살인자 3.

미우라고로[三浦梧樓]

1846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縣]~1926.

 

 

 

1870년 일본 병부 권소승
1871년 일본 육군소장
1878년 일본 육군중장
1882년 일본사관학교장
1884년 서구 및 미국 병제 시찰, 자작 작위 받음
1888년 일본 궁중고문관
1890년 일본 귀족원 의원
1895년 조선특명전권공사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주도
1895년 친일파중심의 제4차 김홍집 내각구성
1910년 일본 추밀원 고문관

 

을미사변의 배후조종자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지식인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난자살해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의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구성했다.

명성황후살해사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일어나자 히로시마[廣島]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다.

1910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으며 정계의 원로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절대 잊지않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원수이다.

 

살인자 4.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角五郞]

1836. 1. 16 일본 나가토 구니[長門國] 조슈[長州]~1915. 9. 1 도쿄[東京].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에 일본을 지배한 과두제 정치체제의 일원이었다.

무사 가문 출신인 이노우에는 나중에 일본 최초의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소년시절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살인자 5.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1900년 국민동맹회를 결성해 ‘조선 장악’을 주장했으며 조선 북부와 간도

지방에서 줄곧 지형조사와 정탐활동을 했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장백산(백두산)에 뼈를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1909년 병사했다

 

최근 그 의 외손자가 명성황후의 릉에 살인자 후손들과 참배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용서받을 일이 아닙니다.

천번만번 사죄를 하여도 절대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살인자 6.

이에이리 가기치[家入嘉吉]

 

 


 

당시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 후손에게까지 그 사진이 전해지고있습니다.

 

 


 

이에이리 가기치 가 시해에 사용한 칼 입니다.

현재 칼집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칼날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대한해협에 버렸다고합니다.

 

살인자 7.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육군 포병소좌 출신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 전권공사의

수행원이었고,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궁내부와 군부의 고문으로서 많은 조선인

관리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정부 요인들조차 그에게 굽신댈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하며, 1897년부터는 중국에서 낭인 생활을 했다

 

살인자 8.

시바 시로우[柴四朗]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일본극우 낭인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소속의

인사들과 긴밀하게협의하며 미우라를 보좌했다.당시

조선의 정세를 염탐했으며 필요한 경우 수단 방법을

가리지않고목숨을

바쳐 테러에 가담하였다.미국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1886

농상무성대신의 비서관이 됐고, 정치소설을 써 작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892년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에는 김옥균의 후원자 노릇도 했다.

을미사변 이후인 1898년에도 다시 중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10선 의원이 됐다.

1914년에는 내각 외무성 참정관을 지냈다.

 

살인자 9.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한성 신보사의 사장인 아다치 겐조.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1894년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조선시보(朝鮮時報)를 발행하다

갑오경장 이후엔 서울로 올라와 한성신보의

발행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인 1902년에는 제국당으로 출마해 중의원 의원이 된 뒤 줄곧 당선돼

14선 의원이 됐다. 1925년 가토 내각에서 체신상이 됐고 뒤에 내상도 역임했다.

1932년엔 국민동맹회를 결성해 총재가 되기도 했다.

 

 

 

살인자 10.

사세 구마테쓰[佐瀨熊鐵]

 

의사 출신으로 조선에서 경무청 의무(醫務)등을 지냈으며 1902년 중의원에 당선됐고,

1905년 일진회의 을사조약 찬성 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1906년엔 한국 농상공부

촉탁이 돼 평양에서 무연탄광 개발에 참여했다. 다케다 한시(武田範治)

조선 사정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문필가였으며, 1905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일진회를 조종하면서 합방운동을 전개했다.

 

살인자 11.

토오 가쯔아키[藤勝顯]

 

 

 

일본 쿠시다 신사에 보관중인 토오 카쯔아키의 칼

이 칼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있다.

 

살인자 12.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공사관 서기

 

살인자 13.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살인자 14.

오사키 세이키치[大崎正吉]

 

살인자 15.호리구미 구마이치[掘口九萬二]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출신의 엘리트 지식인이다.

 

살인자 16.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

 

살인자 17.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

우익이자 일본 정계의 흑막.

 살인자 18.

나카무라 다테오

살인자 19.

다케다 한시[武田範治]

조선 사정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문필가였으며, 1905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일진회를 조종하면서 합방운동을 전개했다.

 

살인자 20.

하나부사 요시타다 Hanabusa Yoshitada [花房義質]

일본의 외교관(1842~1917).

조선 고종 8(1871)에 공사관 서기생으로 조선에 들어와 인천을 개항하기

위하여 힘썼으며, 결국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살인자 21.

후지카쓰[寺崎泰吉]

그가 1045815일 광복절 이후 죽었을때 집에서 길이 120cm 가령 되는

칼이 하나발견되었다.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여우를 찔렀다.

라고 새겨져있었다.

 

살인자 22.

데라자키 야스키치[一名 高橋源次]

한성 신보 주필,살해단 대장

 

살인자 23.

마쓰무라 다쓰키

 

 

 

시해당시 사카나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있었습니다.

 

 

위사진은 다쓰키의 공적비[살해 실토비]

일부로써 조국을

위해 조선국모를 살해했다라는 내용의

비문입니다.

 

살인자 24.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신문기자

 

 

 

 

 

 

모자를 든 인물기쿠치 겐조는 명성황후 살해후 히로시마지방 재판소에서

재판 무혐의 처분을 받은후

다시 서울로와 성동구 신당동에서 살았다고합니다.

147cm 의 작은키에 칼을 허리에 차면 바닥에 끌려 등에 메고 다녔다고합니다.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은 전쟁중 잃어버렸다고합니다.

 

살인자 25.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살인자 25.

삿시 마사시

 

 

아기를 안고있는 남자살인자26.

시부다니[澁谷文英]

통역관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사건에살해단을 도와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하는 데

참여하였던 일련종 승려

 

조선측 가담자.

살인자 .

우범선[禹範善] '씨없는 수박'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1857~1903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

가운데 어린이는 나중에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춘 박사이며,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의 한 명

한말의 개화파 무인으로서 일찍부터 친일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1895년에 우범선은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명성왕후의 살해(을미사변)에 참여했다.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다.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은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3년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고영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영근은 대한제국으로부터 포상되었다.

 

 

살인자 .

조중응[趙重應, 법부대신] 1860(철종 11) 서울~1919.

 

본관은 양주(楊州). 초명은 중협(重協). 아버지는 택희(宅熙)이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 고종 퇴위 강요. 민족반역자

 

1985년 명성황후 시해.폐비조칙을 강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의 강제퇴위를 주동했으며

10월에는 궁궐 경호의 책임자가 되어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감시.

1909년친일지 <법정신문> 발간. 자작. 1910-19 중추원고문,

1916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 회장 일훈 1등 대욱장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수여.

1916년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와 한성부민회의 회장.

 

살인자 .

이주회 [李周會]1843~1895

약력1843년 경기 광주 출생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공로세운

이후 대원군의 심복이됨1885년 갑신정변후 일본으로 도피1894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일본군 선봉장으로 활약, 군부협판1895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뒤 대역죄인으로 처형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후에 체포된 뒤 대역죄인으로 18951219일 처형당하였다.

 

 

살인자 .

이두황 [李斗璜] 1858 서울 ~ 1916.

약력1858년 서울 방교의 평민집에서 출생1883년 친군초관이라는

무인말단직에 임명1884년 수문장1889년 흥해군수1894년 장위영 참령관,

서호도순무영 우선봉으로 동학농민군 진압1895년 훈련대 제1대대장,

민비시해 가담1900년 전북도 장관1916년 서보장 훈장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반일적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패와 군을 동원하여 학살한 을미사변에 훈련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맡았다.

그 후 아관파천이 일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 친일파를 심으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살인자 .

 

이진호[李軫鎬]창씨개명 : 李家軫鎬 1867~1943

1867년 서울 출생1882년 무과에 급제,동문학교 입학1886년 제중원

의학과 입학해 공부하다 중퇴1888년 육군사관학교 격인 연무공원에

입학해 군사훈련과 교육 받음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관여1895

춘생문 사건에 관여 민비시해 가담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일본 망명1907

중추원 부찬의,평안남도 관찰사1910년 경상북도 지사1916년 전북 지사

1919[전북자생단] 조직192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

조선 중앙위생회 위원,조선구락부 발기인19242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1934년 중추원 참의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1941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조선임전보국단 고문1941

중추원 부의장1943년 중추원 고문

을미사변 당시에는 훈련대 제3대대장이었으며, 훈련대 해산 후

친위대 제2대대장이 되었다.

 

살인자.

윤석우[尹錫禹]

우범선의 명령에 따라 명성황후의 유해를 정전(正展)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지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고종 3218951114일 재판에의해 교형에 처해졌다.

 

살인자.

 

박선[朴銑]

고종 3218951114일 재판에의해 교형에 처해졌다.

 

살인자.

이범래[李範來]

살인자.

조희연[趙羲淵]18561915

 

1894년갑오농민전쟁당시'정토군'(征討軍)조직.

 

1894년청일전쟁때일본군을도운공로로군무대신서리.

 

1895 명성황후시해사건때에도군무의요직에자리 협조.

 

18962월조희연은유길준등과함께인천으로가서일본으로망명.

 

1910년한일'합병'후일본정부로부터남작의작위를받음.

 

이들 중에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도 있었고, 훗날 일본 정부의 각료나

중의원 등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을미사변이 무지한 폭력배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서 치밀하게 계획됐고, 극우 지식인들에 의해 실행된

작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을미사변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일본인들은

모두 56명이었고, 이중에서

민간 낭인으로 분류된 자는 모두 32. 특히

규슈 지방의 사족(士族) 출신이 많았다.

메이지유신 이래 정치적으로 소외돼 불평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정치활동을 하려 했던 이른바

대륙 낭인의 전형적인 사례인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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