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광복절 이분들을 기억하나요

이모르 2021. 1. 2. 08:16

 

 

 

 

 

베드로의 장담 (마태오 26:31-35)

 

베드로는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으나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베드로는 순박한

사람들 앞에서 닭이 두 번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고는 배반을 미리 아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슬피 울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모진 박해를 각오하면서

고문의 도구들을 받아들였다.

(마태오 10:16-19)

 

정하상 죽음을 각오하고 우이정 이지연에게 올린 上宰相書 로 가족모두 기해박해때

순교하고 만다

 

김대건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 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신념하나로 죽어갔던 의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근대사의 믿을수 없었던 많은 사건들

 

4.19학생의거 광주의죽어간 민중들 박종철 열사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고 理想을 쫒아 殉節하는 선각자들을 보면서

 

그 시대에 “이사람 들을 아느냐????????

모른다 모른다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무슨 베드로 같은 성인도

아니고 선각자들의 죽음이야 나는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춘곡과 늘 보수와 진보의 말싸움에서도 "우리가 잘살면되지"??

였고 춘곡은 독립운동가들이 "오직 잘살기 위해서만 죽어갔는가?"

 

그분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8.15광복절을 상기하며

 

그중 몇분을 소개 하고자 합니다

 

일인들의 교과서는 안중근 유관순 등 우리의 선열들이

 

 

군국주의의 폐단을 막았다 라고 아이들을 가르켜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인류 평화에 조금은 사죄와 미래지향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독일이 유태인 학살현장을교육 장으로 활용 후세들에게

 

 

잘못된 과거 역사를 일깨워 미래의 평화를 가르켜 나가느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될것입니다

 

 

 

 

충정공 민영환

 

1. 민영환 [1861.7.25~1905.11.30] : 한말의 문신으로 순국지사이다. 그는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자결하였다. 그가 죽은 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김좌진 [1889.11.24(음)~1930.1.24]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

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했다.

 

3. 홍범도 [1868~1943.10.25] :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

군이 되어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

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다.

 

 

 

 

 

4. 이준

한말의 독립운동가 이준(李儁 1859~1907)의 묘이다. 이준은 1907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압력과 방해로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07년 7월 14일 숙소였던 데 용(De Jong)호텔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는 숨을 거두며 “나라를 구하시오. 일본이 끊임없이 유린하고 있소”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이준의 사인(死因)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자결설, 병사설, 분사설(憤死說; 분에 못 이겨 죽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시립공동묘역에 묻혔다가 사후 56년이 되던 해인 1963년 고국으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현위치에 안장되었다.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 참석한 세명의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휘종(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제공)

 

 

 

 

5. 이상설 [ 1870.12.7~1917.3.2] :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6. 장지연 [1864.11.30~1920.10.2] :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며 우국지사로, 만

민공동회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1901년 황성

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을 써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7. 손병희 [ 1861.4.8~1922.5.19] :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로,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그 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 의사

 

 

8.안중근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사형되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30살이던 1909에 만주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현장에서 러시아경관에게체포된 후,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 의사는 32세의 일기로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 온 새옷으로 갈아입고 뤼순(여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고 사형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 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의 유해는 현재 뤼순(여순) 감옥 인근 언덕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도 유해를 못찾고 있어 너무 안타깝다.

 

 

 

 

 

9. 유관순 [1902.12.16~1920.9.28]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소년기 때 유관순 영화를 관람한적이 있었습니다

 

 

이루 말할수 없는 고문의 장면에서 눈을 감았던 생각이 납니다

 

 

손톱뽑기 물통에 처넣기 !!!!! 눈물이 났지요

 

 

영원한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10. 김구 [ 1876.7.11~1949.6.26] :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로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또한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1.김규식[金奎植, 1881.1.29 ~ 1950.12.10]

1935년에는 중국에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되자, 중국에 있는 한국인의 통일독립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5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남경에 모여, 신익희(申翼熙)·조경한(趙擎韓)·양기탁(梁起鐸)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의용대원을 모집하는 한편, 기관지 『민족혁명』,『우리의 길』 등을 발행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중경(重慶)에 들어간 후 김구(金九) 주석과 함께 광복군 양성에 힘썼다.

1945년 8·15광복 후 귀국하여 우익 진영 지도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3상회의(1945. 12)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의견이 전해지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도 우파로서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입법의원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는 국제연합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김구(金九)와 함께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후 정치활동에서 은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拉北)되었다가 만포진(滿浦鎭)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서로 《엘리자베스시대의 연극입문》(1940)과 시집 《양자강의 유혹》(1945) 등이 남아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2. 이봉창 [ 1900.8.10~1932.10.10]: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그는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그 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3.김좌진 [1889.11.24(음)~1930.1.24]: 한국의 독립운동가.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했다.

 

 

14.윤봉길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

 

 

 

15.신채호 선생은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 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피체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하였다.

 

 

16.한용운선생은 독립선언33인중 한분이시고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습니다.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고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옥고의 고문후유증 중풍으로 돌아가셨습니다.

 

 

 

 

 

17.안창호

 

안창호 선생님은 흥사단과 같은 재미 한인 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셨다

 

 

1921년 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 회의가 강제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한인

 

 

교포사회의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일본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형문을 받았고 고문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곧 사망하셨다

 

 

 

 

독립선언서 33인

 

1.손병희 2.권동진 3.오세창 4.임예환 5.나인협 6.홍기조 7.박준승 8.양한묵 9.

 

권병덕 10.김완규 11.나용환 12.이종훈 13.홍병기 14.이종일 15.최린 16.이승훈

 

17.박희도 18.이갑성 19.오화영 20.최성모 21.이필주 22.김창숙 23.신석구

 

24.박동완 25.신홍식 26.양전백 27.이명룡 28.길선주 29.유여대 30.김병조 31.

 

정춘수 32.한용운 33.백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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