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와음악

영시의이별(배호와이별이야기)

이모르 2021. 1. 5. 13:45

영시의 이별/평보

어제 밤일이다 늦은밤 귀가길

 

지름길

흥천사 뒷길로 걷고 있었다. 아파트 건설현장이 좌우로 어지러웠다. 내 뒤에서 숨소리가 요란한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추월하려고 하다 내발에 걸려 여인은 넘어지고 말았다. 에에컨 실외기에 머리를 박고. 일으켜 세우며. “괜찮으셔요??

 

여인은 무슨 일인지 뒤도 안돌아 보고 달린다. 개발 되지 않은 달동네 에 왔다. 조금 전 여인이 구멍가게 앞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룹의 바지가 찢겨진 대로

 

“오늘은 안 만 날 꺼야. 그렇게 때리면 약한 내가 견디겠어? 죽으라는 거지... 거기서 계속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걸어야 하니까.. 흥미 없는 척 지나치는 눈길에 돌보지 않고 모질게 핀 화분 속 노란 국화에 여인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계는 0시를 가르켰다

 

 

 

 

 

배호와 그 악단 배호의 악단시절 사진.

음악적 스승인 김광빈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이 악단은 1965년 만들어졌다. 당시 배호는 이 자리에서 드럼을 치며, 한국 전통가요는 물론 샹송. 칸소네등을 자유자래로 감동있게 구사했고, 드럼실력도 신들린듯 연주해 초기부터 장안의 인기를 한몸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최절정의 인기속에 배호님이 타계함으로서, 더욱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드러머로써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읽을 수 있다.

1941 4 24~ 사망일 : 1971 11

 

학력 : 창신초등학교 - 삼성중학교  29세때인 71년 급성신장염으로요절했지만, 그 족적은 굵게 남기고 떠난 가수입니다.

 

 배호 공식홈피 인용(외삼촌과 4촌의 이야기). 

배호 형님의 특이한 음악성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몇대째 내려오는 음악가정의 결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배호 형님의 어머님쪽으로 거의 모든 집안 사람들은 모두 클라식에서 경음악, 재즈계열에서의 열렬한 고급의 음악인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음악성은 그 분의 활동당시에도 실상 모두 알려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지금도 알려져야 할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라도 만약에 그 분이 그 동일한 목소리와 음악성으로 다시금 나타난다 해도...아마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배호를 연습시키고 데뷔시킨 음악적 스승인 김광빈은 그의 외삼촌이다.

 

 김광빈 이야기 

배호는 태어나면서부터 내 곁을 떠날 때까지 나와 함께 했으며 제가 바로 위 누님과 함께 중국에서 생활한 관계로 배호를 업어서 키웠고, 해방 후 고국으로 와서는 배호가 음악에 일찍이 소질이 발견되어 배호를 가요계에 데뷔시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름이 "만금"이었으나 예명을 외자로 짓는 것이 팬들에게 기억이 남을 것 같아 배호(裵湖)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일찍 간 것이 ""자를 ""가 아닌 ""로 써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타깝고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드럼을 배울 때는 머리가 밤송이가 되도록 때려가며 가르쳤고, 그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해 금테안경과 모자를 사주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신장염 발병으로 돗수 있는 안경을 끼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데뷔시킬 때 일들이 그가 떠나면서 회한으로 남습니다 배호는 그 어느 도 따를 수 없는 음악성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김광빈 소개 

7-80년대 전후로 대중음악계에 주도자이시며 많은 기여를 하셨던 분이며, 김광빈님의 처남이신 안건마님(송창식, 어니언스, 김정호외 다수 인기가수의/편곡자, 색소폰, 피아노연주가)과 그외 작곡가, 색소폰연주가 이봉조님 등 이외 당시 선두를 달리며 대중음악계를 주도하셨던 많은 음악인들이 사실 그 원초적인 음악성의 근원을 김광빈님께 두고있다는 것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사실입니다.

 

두명의 가요천재 배호와 나훈아(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

 

최희준의 배호의 `누가울어`를 자신이 취입하고 싶었을 정도로 배호를 아끼고 사랑함.

 매스컴 보도 내용 2004 

이듬해(1967) 2 돌아가는 삼각지 9 안개 낀 장충단공원 전국을 강타하며 배호를 그해 최고 뮤지션으로 등극시켰다. 아직도 애창되는 국민가요 돌아가는 삼각지는 작곡가 배상태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남진 남일해 금호동에게 음반 취입을 의뢰했으나 모두 거절당한 일화로 유명하다. 트로트계 가수 현철은 당시 신인으로 녹음실을 찾았다가 배호가 힘들게 녹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며 처연하게 회상했다. 배호는 그해 KBS 가요베스트에서 단일곡으로 20주연속 1위를 차지하며 이미자 최희준을 잇는 대중가수로서 가요계를 평정할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71 10월 초. 서울 장충체육관의 가수 대기실. 휠체어를 타고 창백한 미소를 짓던 그는 그치지 않는 기침을 손으로 막으며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그가 동료 가수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 자신의 히트곡 마지막 잎새를 간신히 끝내자 객석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가 이어졌다. 그는 결국 안개낀 장충단 공원’ 1절을 부른 뒤 각혈을 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스물 아홉,꽃다운 나이에 그는 무대에 쓰러져 애석하게도 다음달 117일 세상과 손을 놓고 말았다.

 

1958,16살의 배호는 외삼촌이자 MBC 경음악단장이었던 김광빈의 도움으로 드럼을 배우며 대중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그후 6년 동안 전문 드러머로 활약한 걸출한 뮤지션이었다. 그는 악보도 없이 청음만으로 리듬을 정확하게 탄 천재적인 음악 감각을 소유했다. 훗날 가수로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을 때 배호는 놀랍게도 악보를 읽지 못했다. 음악인들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어떻게 드럼을 그렇게 잘 칠 수 있었을까하고 의아해 했으니 배호의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역설적으로 설명한 사례였다.

 

69년 신세계 전속으로 활동할 당시 모습.배호는 이미자 이상렬과는 옴니버스 듀엣음반을 발표한 바 있고, 서로의 노래도 취입했다. 정훈희와는 백영호 작사-작곡의 노래를서로의 목소리로 불렀다.

배호와 문주란 ,  두 허스키 보이스의 만남 .

 

下 당시 학사 출신 가수로 떠오르고 있던 김상희와 리허설 장면 .

 

.섹스폰을 즉석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새롭다. 배호는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 취입, 문주란은 배호의 대표곡 및 파란낙엽 등 다수의 곡 취입 독수리상 시상식 후, 카테일파티에서 마주한 배호- 문주란.

 매스컴 보도 내용 2004 

배호가 죽기 전 회고에서 8년 동안 음악을 하면서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고달픈 음악생활을 했다. 배호가 두메산골로 가요계에 데뷔한 1964년은 TV가 대중화되지 않아 라디오와 클럽 공연, 전국 순회 공연만이 대중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의 전부였다. 당시 을지로 5가 천지호텔 카바레. 왼손잡이 드러머’‘핸섬 보이로 통하던 배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운집했다. 22세의 밴드 마스터 배호는 드럼 치며 노래하는멋쟁이 뮤지션으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드럼을 치면서 신명이 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며 연주를 했고,드럼 스틱을 공중으로 던지는 묘기를 선보이는 무대 매너는 광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무명의 배호는 그 당시 그렇게 여성팬들에게 흠모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배호 사망  2 달전 여배우 최지희와 안개낀 장춘단 공원에서 ~

 

 상명대 석좌교수인 정홍택 교수(한국 영상 자료원 이사장)얘기와 오승룡씨의 진행으로 구성 

 

본명은 배만금으로 배호의 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아마 세상을 떠나도 이렇게 팬들이 잊지 못하고, 또한 제일 많은 팬들이 있는 가수는 배호일 것입니다. 교통방송의 희망곡 신청에서도 배호의 곡들이 제일 많이 차지합니다. 또한 가짜 배호가 가장 많아 노래의 구별이 어렵기도합니다.. 하루는 작사가 전우(본명:전승우)가 찾아와서 "기가 막힌 녀석이 하나 생겼다(가수인데)" "누구냐?" 하니까 "김광빈씨의 조카인데 , 그러면 만나보자" 배만금이라 하면서 드럼을 치고 있는데, 얼굴도 창백하고 바싹 말라 있었으며, 검은테의 브라운 색깔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가수가 아니고 김광빈씨의 악단에서 드럼을 치고 있었다) "저 친구가 왜 그렇냐?" 고 하니까 "노래가 기가 막힌다. 들어보자" 하여 쉬는 시간에 만나 그의 노래를 들어보니 노래를 힘도 없이 하면서도 이상한 매력을 주는데, 아주 괜찮아서 그후 이름을 배호로 하고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배상태씨가 먼저 곡을 주었으나 처음에는 모두들 몰랐고 나중에 대단한 인기가 있으면서 방송과 신문에 실어 주는 등 하여 배상태씨도 고마워 했습니다.

 

-. 주로 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들이 많았는데, "누가 울어", "안개속으로 가 버린 사람"등이 있었으며 "누가 울어"는 가사가 튀고 가사 말이 너무나 기기 막힌 곡으로 전우씨의 가사들은 너무나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배호가 데뷔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활동하지 못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감상 (노래를 역시 잘 부릅니다)  ? 이 사람이 인기가 있느냐? 그게 중요한데, 그 이론은, 상당히 야한 노래들을 불렀다. 잘 다듬어진, 예쁜 노래는 아니고, 남인수씨처럼 미성이라야 한다는 완전히 깨 버린 것입니다. 순식간에 깨 버렸습니다. 탁한 목소리, 허스키한 소리로 고음으로 올라갈 때는 째는 듯한, 주먹세계에 들어가 있을법 한 사나이다운 창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배호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힘이 들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몸이 아파 어려워서 올릴려고 한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정훈희와 가요시상식 직후 ,  밝은 표정 .

 

배호에게 가장 많은 곡을 준 배상태와 장춘단공원에서.

 

보내야할 당신 마음 괴롭더라도...~`전우의 절묘한 가사에 라규호가 곡을 입히고,배호의 열창으로 3박자가 어우러져 `당신`이 탄생.

영시의 이별/이철수 작사 배상태 작곡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이별앞에 너와나는 한없이 울었다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에 불장난
원점으로 돌아가는 영시처럼 사랑아 안녕

 

밤안개가 자욱한길 깊어가는 이 한밤
너와 나의 주고받은 인사는 슬펐다
울기도 안태까운 잊어야할 아쉬움
원점으로 돌아가는 영시처럼 사랑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