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연산군과장녹수

이모르 2021. 1. 6. 16:17

 

 

연산군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채청사(採靑使)·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한데다가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장녹수(張綠水, ? ~ 1506년)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이다.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첩이었다.

 

그 때문에 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노비라는 신분적인 한계, 그리고 첩의 자식이란 것 때문에 항상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몸을 파는 일도 했고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해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렇게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으나, 가무(歌舞)를 비롯한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하여 그 소문이 자자했다.

 

연산군은 그 소문을 듣고 녹수를 입궐시켜 숙원에 봉하고 항상 그녀와 함께 했으며,

1503년에는 숙용에 봉하게 된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그녀의 오빠 장복수와 그의 아들을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 놓게 된다.

그러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며,

이는 연산군이 몰락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그 영화의 빛이 바래고 만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와 관련한 수많은 문학작품 및 드라마·영화 등이 있는데, 김태웅이 희곡을 쓰고

직접 연출한 연극 이가 있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 왕의 남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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