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일본측 공식발표
전국을 흽쓴 시위확산은
집회회수:1.542회 만세운동에 참가
인원수:202만 3089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1만5.961명
검거자:5만2.770명
불탄교회:47개소
학교 전소:2개교
민가 전소:715채
1919년의 3·1운동은 개신교가 한국 민족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 시위 중 상당 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 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군의 제암리 교회이다.
1908년 초가지붕의 제암리 교회당 모습
예총 화성지부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제의 침략사’를
주제로 화성시청에서 여는 전시에서 공개한 1908년 초가지붕의
제암리 교회당 모습이다.
사진속의 가옥은 교회 본체로 그 옆에 선교사
부인이 아이를 안고 한복입은 어린이들과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
두번쌔 예배당
23인 순교자 합동묘소
1905년 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 교회는
동족 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 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이어 제암리의 가옥 30여 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이 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전한다.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됐다.
3.1.운동 순국기념탑
제암리 교회는 1919년 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고,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당이 만들어졌지
만,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은 광복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 사건 현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된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년 9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아 보내온 1천만 엔의 성금으로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
또 1982년 9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발굴 작업이 실시돼 교회 옆에
마련된 묘소에 안장됐으며, 다음해 7월 기념관과 새 기념탑이 세워졌다.
불타버린 제암리 마을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군중
제암리학살 때 남편을 잃은 여성
불타버린 제암리 마을
일경에 학살당한 한국여학생
일경에 의해 대량학살된 한국인들에 대한 장례식
방방곡곡 만세운동이 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