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모음

연산군의시모음

이모르 2021. 1. 6. 16:19

 

 

 

 

 

 

 

 

2011년7월17일

 

 

 

사돈어른들과의 점심약속이 있어 함께 식사 후에

 

선능에 들렀다

 

.

능안 소나무숲으로 외손녀의 재롱을 보면서 산책하게된다

 

성종의 묘역등 계비의묘 중종의묘 모두 장마로 인한 회손을

 

막기 위하여 천막이 처져 있었다.

 

.

조선의 성군으로 세종과 성종 숙종 정조를 들겠으나 선대왕 세종이나

 

정조보다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것은 여인들에 둘러쌓인 스켄들

 

때문이 아닐까????

 

새들과 각종의 야생화 버섯들 나는 차라리 선정능에 잠들어 있는 조선왕들

 

의 격동의 삶에 집착하기보다 아름답고 귀여운 외손녀의 재롱으로 샘솟는

 

엔돌핀과 숲에서 나는 피톤치드를 즐기고 있었다

 

 

 

 

 

 

 

 

 

 

 

1592년인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두 능침이 침략해 온 왜군에

의해 훼손되는 수난을 겪게되었다한다 . 특히 중종의 정릉 경우는 본래 경기도 고양군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내의 희릉(중종의 첫 왕비인 장경왕후의 능)에 묻혀있었는데,

명종때 문정왕후의 쓸데없는 집착탓에 이곳으로 강제로 옮겨졌다가 이때에

이르러 시신이 훼손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지금 현재 성종,중종 부자의 릉 선릉과 정릉은 안은 비였고 외형만 무덤인채로

보존 되어 있다 한다. 많은 기록에 임진년에 일어나 왜란에 왜군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해 뼈는 버리고 각종 보물은 가져갔다는 기록이 난무하고....

 

후에 정릉 근처에서 왠 아주큰 해골을 봤다는데(조선 시대중에 키가 큰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종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습.)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보게되면 중종이 도학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국문할 때 조광조 가 공술하기를

‘신의나이가 38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망령되게

국가의 병통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명맥(命脈)을

무궁한 후세까지 새롭게 하고자 하였을뿐이고 조금도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연려신기술 中宗朝古事本末 에서 발췌한 이글을 보면 뜻있는 선비를 죽인 중종또한

시신이 파헤쳐저서 봉분만 남아있는 역사의 씁슬한 면을 생각하게된다..

 

 

 

 

 

제9대 성종 가계도

덕종- 소혜왕후 한씨

제9대 성종

차남:자율산군(1457-1494)

재위기간:1469.1월-1494.12월(25년1개월)

부인12명 자녀:16남12녀

 

 

 

 

 

 

 

 

 

 

 

 

 

 

 

 

 

 

 

 

 

 

 

 

 

 

 

 

 

 

 

 

 

 

 

 

 

 

 

 

 

 

 

 

 

 

 

 

 

 

 

 

 

 

 

 

 

 

 

 

 

 

 

 

 

 

 

 

 

 

 

 

 

 

 

 

 

 

 

 

 

 

 

 

선능과 정능은 조선의 9대왕 성종과 11대 중종을 모신 능이다

 

 

 

본래 선정릉이 소재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부의

 

한 고을이었다.

 

 

 

옛 문헌을 살펴보고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경기도 광주부 학당리에 속해있었다 서

 

울시가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서울시로 편입된다

 

 

 

 

 

성종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요약한다면 우선 세종과 세조의 치세의 후광으로

 

 

태평성대를 기록한 성군으로 성종은 정치체제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성종대왕의 글 석각

 

 

 

 

 

 

982년 삼성체제(三省體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의 정치개혁은 태조 이래의정치조직을 중국식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바로 중국의 3성6부제를 고려의 중앙정치조직으로 도입하였던 것이다.

 

 

 

 

982년부터 983년 사이에 등장한 새 정치기구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병관(兵官)·

 

민관(民官)·형관(·예관(禮官)·공관(工官)의 6관(六官)을 예속

 

하는 체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995년 중앙정부는 3성6부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관제의 기본이 되었

 

다. 성종이 도입하고자 한 중국식 관제는 우리나라 역사상 본격적인 중국관제의 도입이라

 

는 측면에서 최초의 시도였다.

 

 

 

 

서삼릉에있는 폐비 윤비의능

 

 

 

 

또하나 연산군과 중종에 이르는 격동의 폐비윤비를 생각나게 한다

 

 

미상∼1482년(성종 13). 본관은 함안(咸安)성종(成宗)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판봉상시사 윤기무(尹起畝)의 딸이다.

 

처음에 입궐하여 성종의 후궁이 되었을 때,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인수대비[昭惠王后]를 잘 봉양하여 두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1474년 공혜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으며, 1476년에 중궁으로 봉해진다.

폐비윤씨는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한다. 실록에는 폐비윤씨의 죄가 매우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인형(人形)을 만들어 저주(詛呪)한 일, 음조(陰助)의 공은 없고, 투기(妬忌)하는

마음만 가진 일, 몰래 독약(毒藥)을 품고서 궁인(宮人)을 해치고자 한 일,

 

무자(無子)하게 하는 일이나,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害)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일, 엄소용, 정소용이 서로 통하여 윤씨(尹氏)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諺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權氏)의 집에 던져 넣은 일,

 

왕을 바라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취하여 버리고자 한다고 말하였으며, 상참(常參)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妃)가 왕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난 일 등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1479년 음력 6월 2일에 윤씨는 폐위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두려고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憲王后)에 추숭되고, 그녀의 묘는 회릉(懷陵)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내린 관작 또한 모두 폐위되어 원상복귀 되었고, 회릉 역시

폐비윤씨지묘(廢妃尹氏之墓)로 격하되었다.폐비윤씨지묘는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元新洞)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사적 제362호인

제10대 폐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

 

 

 

연산군의 유년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사화까지 불러일으킨 그의 폭정.

지금까지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산군은 무자비하고 말이 안통하는 광분에 쌓인

폭군으로 많이 그려져왔다.

 

조선의 제10대 왕으로서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재위하였다. 휘는 융(㦕),

성종의 척자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또는 尹起畎)의 딸로 폐비 윤씨이다.

 

어려서 모친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게 되었다.

흔히 1504년(연산군 10년) 폐비 윤씨의 사사 내막을 임사홍 등이 폭로함에 따라

피바람이 몰아쳤다고 알고 있으나,

 

연산군은 즉위 이전부터 생모인 폐비윤씨의 비극적인 삶과 자신을 돌본 어머니가

친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중종이 태어나기 전인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어, 서거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구제하고 《국조보감 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사가독서를 부활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 중종의 정릉(靖陵) > - 서삼릉 능역 내 희릉에 있다가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중종반정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은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

 

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宴樂)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

 

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아래글은 이한성 동국대 교수님의 글을 부분 발췌한것입니다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http://weekly.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5110 

 

 

이한성 동국대 교수

 


 

 

연산군은 재위 12년인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 연희궁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두 달 뒤 11월 8일에 죽으니 두 달 전까지 멀쩡하게 잘 놀던 31세 청년의

죽음 치고는 자못 의아하다.

 

실록에는 그 죽음을 ‘역질로 인해 죽었다(因疫疾而死)’라

했는데 11월에 역질로 죽었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

연산군은 자식 복이 없어 많은 자녀가 어려서 죽었다.

몇 명 남아 있던 대군(大君)과 군(君)은 반정이 일어난 그 달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때 그 애들의 나이가 10살 안팎 어린 것들이었는데….

묘역에서 나누어 주는 연산군 묘 관람 자료에는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연산군의 시(詩)가 실려 있다.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염성)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연산군은 타고난 감수성이 좋아 수백편의 시를 남겼는데 반정 후 모두 없어지고

실록에 100여 편만 남아 있다 한다. 폭군으로만 알려진 연산군의 숨은 얼굴이다.

 

한편 연산군은 죽은 뒤 유배지에 쓸쓸히 묻혔는데 7년 뒤에

그 부인 거창 신씨가 중종에게 탄원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폐비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이니 외할아버지의 땅에 비록 폐주이지만

남편을 이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부란 그런 것인가? 방탕하던 연산군은 죽을 때 한 마디를

남긴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

죽음에 임해 다른 말은 없고, 단지 신(愼)씨가 보고 싶다(欲見愼氏)’

였다는 것이다.

흥청(興靑: 궁중에 들여 온 기생)들과 신나게 놀다 이렇게 쓸쓸히 죽으니

망청(亡靑)이 되고, 결국 흥청망청인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중종반정이 일어난 가장 결정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미망인으로 지내던 큰 어머니를 겁탈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소설, 연속극에서도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겁탈하자 큰어머니가

목을 매 자살하는 패륜과 정절(貞節)의 극치를 보여 준다.

 

연산군의 기록인 ‘연산군 일기’는 중종4년에 편찬되었으니

반정세력들이 4년을 주물럭거린 뒤에 나온 결과다.

 

연산군이 쫓겨나기 50일 전인 연산군 12년(1506년) 7월 20일

기록을 보면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왕에게 총애를 받아 태기가 있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月山大君?妻 昇平府夫人朴氏卒 人言; 見幸於王 有胎候 服藥死)’는 부분이 있다.

 

절세미인 궁녀 누리던 31세 연산군이 52살 큰어머니를 임신시켜

왕에서 쫓겨났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는데, 믿을 만한 얘기일까?

 

이 글을 보면 석연치가 않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人言(사람들이 말했다)’라고

무책임하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문이라는 뜻이다.

 

승평부부인 박씨는 연산군의 큰어머니로 당시 52세, 연산군은 31세 청년이었다.

 

지금도 52세면 임신하기 쉽지 않은 나이인데 평균수명이 40살도 안되던 당시에 52세

여인이 임신을 했다? 궁중에 젊고 예쁜 궁녀들이 들끓는데 52살 큰어머니를 간통했다?

혹시 이긴 자들의 일방적 기록은 아닐까?

 

착잡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묘역을 내려온다. 오른 쪽에 원당샘(元堂泉)이 있다.

이곳에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 있다. 들리기로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네 일가가

연산군 묘가 이곳으로 이장하자 돌보기 위해 옮겨 왔다고도 한다.

 

 

 

 

 

 

 

 

 

아래글은 모셔온것 입니다

 

 

연산군의 詩 몇편

 

 

21세

 

많은 근심

 

기침은 심하고 근심은 많으니

지친 마음 그치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새 잠을 못 이루네

간관들은

종묘사직 중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소장이란 소장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

 

 

 

1499년 3월 3일 (24세)

 

어찌 이 날

 

어찌 이 날

술 내리기를 사양하리

잔뜩 취해 오거든

나를 위로하여라

 

1499년 12월 1일 (24세)

 

기쁜 마음

 

기한제 끝났으나

센 바람 불어오네

하늘이 정성에 감동하여

곧 보답하시리

내 술과 안주로

기쁜 마음 표하노니

얼근하게 취하거든

내 시에 화답하오

 

 

 

1499년 12월 31일 (24세)

 

어진 정승들이여

 

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운데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비노니 어진 정승들이여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사시오

 

 

1500년 3월 3일 (25세)

 

삼짇날 승정원에

 

삼짇날

봄바람 부는 서울 거리에

새 날고 물고기 놀며

온갖 꽃 향기롭네

난정의 놀이를

뉘라서 좋다는고

은대에서

어사주로 취함만 하리

1500년 3월 3일 (25세)

 

서울에 봄바람 부니

때는 삼짇날새 날고 고기 노니

온갖 꽃 향기롭네

난정놀이를 뉘라서 좋다

하는가은대에서

어사주로 취함만 못 하리

 

 

1500년 6월 22일 (25세)

고요한 은대에 낮이 더디기만 한데

승지들은 무더위로 졸고만 있네

연꽃을 꺽어 은근히 주리니

붉은 소주 가득한 잔 마다치 말게

 

 

1500년 6월 27일 (25세)

대궐 안 찌는 듯 더워

흐르는 땀 장물 같고불같은 해

타는 구름에 낮이 더욱 지겹구나

향기로운 한잔 술 마실 수가 있으니

오히려 더운 곳이 서늘해지네

 

1500년 8월 1일 (25세)

 

밝은 달 깊은 시름

 

비 개고

구름 갇혀

밤 기운이 맑으니

달 밝은 윤각에

꿈 이루기 어렵구나

해마다 좋은 때를

구경할 수 없으니

어옹의 한 평생을

지남만도 못하네

 

 

 

1500년 10월 25일 (25세)

 

노을

바람 맑은 동해에는

푸른 노을 자욱하고

비 어두운 서산에는

해가 침침하네

 

 

 

 

1501년 1월 22일 (26세)

 

사계화 한 분으로

 

이슬에 젖은 붉은 꽃이

푸른 잎 속에 짙고

누각에 향기 풍겨

훈풍에 취하네

구경만 하라고 은대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적적할 때 보고

천지조화를 생각하라는 뜻이지

 

1501년 4월 22일 (26세)

 

철쭉꽃 향기

 

은대에 일은 없고

해는 길기도 한데

다들 책상 앞에서

반은 벽에 기대어 있구나

취한 뒤 졸음 오면

마음이 고달프니

어찌 선온과 함께

꽃향기 감상을 사양하리오

 

1501년 5월 10일 (26세)

술과 작약

 

꽃을 주고 술을 줌은

가까이 있는 까닭인데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음을

뉘라서 알겠는가

 

 

 

1502년 9월 5일 (27세)

어제 효사묘로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1503년 10월 14일  (28세)

들국화 시들었는데

집국화는 난만하고

붉은 매화 떨어지자

흰 매화 한창이네사

물을 감상하며 하늘 이치 안다지만

임금의 도는 우선 화목한 정치에 있네

 

1504년 10월 15일  (29세)

 

간신이 악의를 품고도

충성한 양하여

임금을 경멸하여

손아귀에서 희롱하려 하도다

조정에서는 폐단을 한탄하나

배격될까 두려워

다투어 서로 구제하는

못된 버릇 일으키네

 

1504년 12월 16일  (29세)

 

비단 소매엔 향기가 없고

거울엔 먼지 끼니

한 가지의 꽂이 여위어

봄 모양이 아니네

십 년 동안 군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니

비로소 아름다움으로 잘못 살았음을 알겠노라 

 

1505년 1월 19일  (30세)

 

풍속이 바뀌고 고쳐져

참으로 밝은 때로세

봄빛이 화창해 감싼 경치가 기이하구나

이로부터 태평세월

조야가 엄숙하니

술 옆에 차고 꽃가지 꺾음이 제일 좋으리

 

1505년 4월 3일  (30세)

 

백성에게 잔학한 자로

짐과 비교할 자 없는데

내시가 위를 범할 줄 어찌 생각조차 했으리요

부끄럽다 못 해 통분하기 그지없다는

온갖 생각을바닷물에 씻고자 하여도

그 한을 풀지 못하리

 

1505년 8월 13일  (30세)

 

특별히 정자에서 구경하기 허락하니

싸늘함이 비를 타고 맑은 가을 재촉하네

온화 위엄 양립해야

참 왕도일세

충성 다해 은혜 갚을 신하 누구뇨

 

1505년 8월 17일 (30세)

 

태평한 때 가을 관광 꺼리지 마오

국화 떨기 금빛 품고

향기 아직 안 토했네

푸른 술 향기로워 궁온에 띄우니

서리 내린 후 온 가지가 누렇다 할 것 없네

조야가 편안하여 태평한 이때

잔치를 허했으니 취할 만하오

언제나 용렬한 짐 덕이 없어 부끄러운데

오늘은 인재들 많아 되레 즐거워라

큰 은혜 깊이 느껴 즐기기를 꺼려 마소

낮닭이 한창 조니 해가 어찌 기우랴

대궐 술 다시 받기 사양치 마오

호방한 임금 나라 편케 하도록 힘쓰면 되네

 

1505년 8월 27일 (30세)

 

조정에서 존호를 받으니

부끄럽고 황망할 뿐

돕는 힘 버리지 않으면

국세는 날로 퍼지리

성대한 오늘 잔치

보기 드문 경사이니즐거이 취하기를

달빛 볼 때까지 하여라

 

[연산군일기 1505년 9월 16일] 30세너무

애달파 눈물 거두기 어렵고슬픔이 깊으니 잠조차

오지 않네마음이 어지러워 애끓는 듯하니이로 해서

생명이 상할 줄 깨닫네

 

 1506년 2월 25일 (31세)

 

가벼이 대답함은

서로 깊게 믿음을

알고사사로이 말함은

두터이 친하기 때문일세

호기를 내는 것은 천성을 따른 것이고

미친 짓 하는 것은 천진난만함에서 오니

군신이 해학하며 노는 것을 말하지 말라

나무라고 비웃음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덧없는 인생을 뉘라

애석해하지 않으리

봄을 핑계하여 취하는 것을

어찌 마다하랴

 

1506년 3월 8일  (31세)

 

색이란 하루아침의 일

공덕은 만고에 남으니

미녀 데리고 즐겨 놀 생각일랑 하지 마오

 

1506년 3월 19일 (31세)

동산에 가득한 봄빛은

햇빛이 찬란한데

꽃바람이 새로 단장한

옷자락을 나부끼고

짙은 녹색 연분홍 화려하기도 하네

그 누가 청광을 위해 이슬향기 가져왔나

 

1506년 3월 20일  (31세)

 

대궐 안에서 꽃과 달의 시구를

누가 가르쳤던가

두고 읊으매 생각이 간절하여

정분만 더하네

다시 보매 밝은 햇살이

도리를 감쌌구나

내가 바로 삼한 제일의 호걸임을 문득 알았네

 

 

1506년 3월 29일  (31세)

 

특히 어질고 뛰어난 이를 뽑아

서호로 보낸 뜻은참으로 충성한 자 구함이지

속이는 자 구함이 아니오

바람은 아지랑이 빛을 끌어

푸른 물결에 더하고

경지는 화창한 빛으로 옮겨져

맛 좋은 술병 띄웠네

길을 막아 있는 화류는

아리따움을 다투고

정자에 가득한 여인은 날씬함을

겨루누나뉘 알리요

넓은 은혜와 정성으로

내린 술이취중에도

나라 보전에 더 힘쓰란 것인 줄

 

1506년 6월 1일 (31세)

 

국가에 소홀하고 군왕을 속인 죄를

어찌 용서할까

몸을 아끼고 명예를 구함은

간흉들의 짓이로다

누가 능히 단심의 정성을

가져다 바쳐큰 은혜 갚으며

태평세월 즐기게 하려는가

 

1506년 7월 1일 (31세)

 

고요한 밤 대궐 뜰

오동잎에 비소리만 싸늘한데

귀뚜라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

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를 올려보니

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가네

 

1506년 7월 14일  (31세)

 

영화는 초방 벼슬

은혜로 시작하여

소임이 승지니 총애가 번성하다 하겠네

순수한 뜻 돌려

도우려는 생각 싫어하지 마오

그르치면 면하기 어려워 그땐 패망하리

 

1506년 7월 28일 (31세)

 

주름진 얼굴 구부러진 허리에

쑥대머리를 홑뜨리고찬마루에 구부려 자며

옛날 놀던 일 생각하네

남들이 비웃으며 주렴

제치고 보는 줄 알지 못하고

누가 짐의 호기 당하리

웃음 치며 과시하네

 

1506년 7월 30일  (31세)

 

푸른 이슬은 밤에 맺혀

비단치마 적시고

가을바람은 소슬하여

앳된 간장을 녹이누나

난간에 기대 기러기 소리 들으니

달빛은 차갑고

눈물 가득한 눈시울엔

슬픈 마음 메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