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물레 이야기

이모르 2021. 1. 6. 16:53

 

 

 

 

춘천 화목원에 갔다

거기 진열 된 베틀과 씨아 물레 같은 전통 생활 기구들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은 화학섬유에 밀려 목화재배가 거의 없어 졌지만

60년대 까지 농촌에서는 씨아 틀에 목화씨를 빼고 물레에 감아 실을 뽑아

베틀에 천을 짜서 넓은 뜰에 천을 치고 양잿물을 칠하여 탈색하는

과정을 거처 시집가는 딸에게 수 놓은 비단금침 혼수를 만들어 주었다.

 

목화꽃이 개화 돼기 전의 열매는 달착지근 하여 항상 배고파 하던

어린이들이 따서 먹다가 주인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목화와 얼래를 생각하면 몇가지 떠오르는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문익점 선생

 

물레 앞에서 독서하는 간디

 

 

붓 뚜껑에 목화씨를 들려 왔던 문익점

비폭력 불복종 운동 을 침략자들의 기계 문명에

비유하여 물레에서 직접 실을 뽑아 힌옷을 입고 다니던 간디.

 

 

 

씨아 또는 씨아틀이라 부르는 기구는 솜에서 씨를 제거하는

틀이다 씨아질을 할 때에는 암카락과 숫카락이 맞물려 돌아가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여 솜은 앞으로 빠져나가고

씨는 뒤로 떨어지게 된다

 

 

 

 

물레는 바퀴와 설주 등으로 구성되는데 바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무를 깎아 만든 여러개의 살을 끈으로 얽어매어 보통 6각의 둘레를 만들고,

가운데에 굴대를 박아 손잡이를 붙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러개의 살을 붙여서 만든

두 개의 바퀴를 나란히 놓고 바퀴테 사이사이를 대나무 쪽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물레는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에서 많이 쓴다. 물레의 바퀴는 양쪽에 기둥이 있어 떠받치며 기둥 받침대에 연결된 나무 끝에 괴머리가 달린다. 괴머리에서 가락이 실려서 돌아갈 때, 고치에서 실이 드려진다. 가락은 하나를 싣는 것이 원칙이나 실을 여러 겹으로 뽑으려 할 때는 둘이나 셋을 쓴다.

 

 

전통 베틀의 구조를 살펴보면, 각기 두 개의 누운다리, 앞다리, 그리고 뒷다리가

베틀을 지탱하는 기본 틀을 이룬다. 날실은 법댕이에 감겨 도투마리에 고정되어 있고,

삼각 단면의 비거미는 경사(經絲)를 상하로 구분하여 자연적으로 개구(開口)를 만들며

비거미는 베틀에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분리 가능하다. 눌림대는 비거미에서 벌어진 날실의

상하를 눌러주는 역할을 한다. 부테허리를 허리 밑에 대고 그 양 끈을 말코에 연결하여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당겨 경사의 장력을 조절하여 베를 짠다.

짚신으로 만든 끌신을 베틀에 앉아 신고 앞으로 당기면 짚신에 묶여진 쇠꼬리 끈이

베틀 앞의 신나무에 이어지고 다시 나부산대에 달린 눈섶끈을 당겨 잉앗대가 위로 들린다.

그러면 또 다른 개구가 열리고 북을 그 사이로 밀어 통과시켜 바디가 달린 바디집을 앞으로

내리치면 씨실이 자리를 잡는다. 다시 당겼던 발을 내밀면 자연 개구가 생기고 북을

그 사이로 통과시키고 바디집을 내리치는데,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베가 짜진다.

짜진 베는 허리 앞의 말코에 감고 도투마리를 막대기로 돌려 날실을 앞으로 푼다.

짜진 베는 자주 물에 축여 마르지 않도록 한다.

 

 

 

 

경직도에 그려진 옛모습은 한여인이 베틀에서 베를 짜고

또 한여인은 씨아틀에서 솜씨를 제게하고 있다

 

 

농사일과 잠직(蠶職)의 광경을 그린 그림.

 

〈시경〉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編)을 그린 〈빈풍도〉에서

경작과 잠직의 과정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먹고 입는 생산의

근본인 농사짓고, 누에치고, 옷감짜는 일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왕이나 왕비 등이 보고 알게 하기 위한 감계적(鑑戒的)인

목적과 경직을 장려하기 위한 교화적인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남송(南宋)의 누숙(樓璹:1090~1162)이 '논갈기'·'모심기'·'벼베기'·

'도리깨질' 등 경작 21장면과 '뽕잎따기'·'실뽑기'·'베짜기' 등

잠직 24장면을 처음으로 그려 고종에게 바쳤다. 이후 경직도는

여러 차례 그려졌으며, 1696년 청대의 초병정(焦秉貞)이

이것을 경류 23점, 직류 23점으로 재구성하고 서양화의 투시원근법 등

새로운 기법을 사용해 〈패문재경직도 佩文齋耕織圖〉를 그려

어제(御題)를 붙이고 목판화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한국에는 1498년〈누숙경직도〉가 유입되었으나

18세기초〈패문재경직도〉가 전래되면서 성행되었다.

조선 후기를 통하여 농가의 세시풍속과 결합되어〈농가사시도〉·

농가월령도〉 등으로 조선화하여 병풍형식으로 많이 제작되었으며,

19세기에는 민화로도 그려졌다.

 

특히〈패문재경직도〉의 조선화 현상은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조선

후기 풍속화의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미상의〈패문재경직도병풍〉과

〈경직도8첩병풍〉등이 있다.

 

출처"경직도"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1g3246a

 

 

 

 

아버지는 멍석을 짜고 어머니는 물레돌리고

아들은 글공부 중이다  단원 김홍도

 

 

길쌈과 베틀  단원 김홍도

 

길쌈은 삼, 누에고치, 모시, 목화 등의 섬유원료를 베, 명주, 모시, 무명 등의

피륙으로 짜내는 과정을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때부터 길쌈을 해왔으며,

그것은 주로 부녀자들의 가내수공업이었다.

길쌈놀이의 내력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유리왕)이 6부를 정하고 이를 반반으로 나눈 뒤, 두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7월 16일(음력)날부터 새벽에 시작하여

밤 10시에 이르기까지 부의 큰마당에 모여 길쌈을 하게 하였다. 한가위날

그결과를 심사하여 진편에서는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이때에 춤과

노래의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를 가배(가위)라고 하며 진편의

여자가 일어나 '회소, 회소'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맑아서 뒷날

사람들이 이 소리에 따라 노래를 짓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학자 김종직은 신라 때의 길쌈놀이 광경을 이렇게 상상하여 노래했다.

 

 

<길쌈노래,길쌈노래>

 

가을바람은 넓은 들에 선들거리고/

밝은 달은 화려한 집에 가득 찼는데공주는 앉아서 물레를 잣고/

여섯 마을 처녀들 떼를 지어 있네'네 광주리는 찼구나/

내 광주리는 상기 비었다'술을 부어 벌주로 바치며/

서로 놀려대고서로 웃는구나/

한 여인은 탄식을 하나/

일천 집이 모두 부지런하여사방에서 길쌈질이 /

한창으로 벌어진다네한가위의 이런 길쌈놀이/

규중처녀들 예절이 아니랴소란스리 아귀다툼을 하여/

줄당기기 보다야 얼마나 나으냐

 

 

 

 

1900년대 아일랜드 물레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스토텔레스와벽계수  (0) 2021.01.06
광성보에가다  (0) 2021.01.06
소탐대실과트로이의목마  (0) 2021.01.06
안중근의여순감옥  (0) 2021.01.06
안중근의사의명언  (0) 2021.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