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광성보에가다

이모르 2021. 1. 6. 19:17

 

 

 

 

2013년6월12일

초등동창생 들이  수학여행을 하는날이다 ㅎ

 

 

 

 

 

 

내가 저수지에 있는 팬숀에 가서 손구도 하고

팬숀에 있는 노래방에서 노래도 하며 1학년 입학때 기분을 연출하였다

우리가 만나면 몇 번이나 더 볼 것 인가...??

 

숙녀 분들 여님들의 웃음 속 에서 역사 이야기를  나누고

또는 노래방이 있어 인상적인 “꽃나비 사랑” 을 열창하는데

친구들은 가수 뺨치는 성량 으로 노래를 불러 듣기 좋았다

 

 

 

김석원 군이 열창했던 꽃나비 사랑

 

 

사랑하는 친구들은 호수가를 산책하며 쑥을 뜯고 있었고

저편 고려산이 물안개가 걸처있어 푸른 신록으로 산수화 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사람들의 느낌이고

다른 친구들은 여러가지 일로 불만을 표시하는 친구도 있다

 

그럼 오늘 역사의 현장

덕진진과 광성보 분오리 돈대를 견학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수학여행 온 것같은 분위기는 어릴때 이야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옛 교정에서 토끼 풀 뜯어다 먹이던 이야기

입학식 때 있었던 추억을 말한다  

 

 

 

 

해마다 그냥 목적지에 가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에서

탈피해 올해는 역사적 테마를 찾아서 걷기를 하는데 광성보의 숲길은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곳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과 해병 600여명이 조선군

600여명을 전멸시키다 싶이 한 처절한 전투가 있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앞서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대동강까지 올라간 미국 상선인 셔먼호가 평양을 공격하여 만행을 저지르던중 간조로

물이 빠져 꼼짝 못하게 되자 조선군이 공격하여 불살라 버린사건) 의 사과 및 책임 추궁,

그리고 통상조약을 무력으로라도 체결할 목적으로 함대가 발진하였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5척

(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은 청나라

주재 공사 프레드릭 로우와 90문의 화포, 800명의 병력을 대동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일본의 나가사키 를 출발하여 원정에 나섰다.

 

지금의 인천 국제 공항쪽으로 항진하여 강화도에 이르러 초지진 덕진진을

초토화 시키고 광성보로 진격한다

 

미군의 진입을 돕기위하여 성으로 지상에서 USS 모노캐시의 함포사격이

이루어졌다

 

546명의 선원과 105명의 해병대가 요새의 서쪽 언덕에 집결했다

포병대가 요새를 포격함과 동시에 미군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했다

 

반면 조선군은 예하 3개 초소 가 모두 타 군영 소속 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한

조선군은 외지에서 징병 해 와서 지형을 숙지못하여 눈뜬장님 같은

상태였다.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 뿐이었다. 나머지 미군 사상자는 모두 성벽 위에

기어오른 뒤에야 발생했는데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휴 맥키 대위는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찌른 창에 배가 뚫려 치명상을 입고

USS Monocacy 선상에서 죽었다.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맥키 대위(당시 계급은 중위)를 찌르고

자신들을 노려보면서 그도 죽었다고 한다.

 

포병대가 요새를 포격함과 동시에 미군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했다. 포격이 중지

되자 미군은 휴 맥키(Hugh McKee) 중위의 지휘하에 요새로 돌격했다. 느린 재장

전의 한국 소총은 레밍턴 카빈과 상대가 되지 않았고 한국군은 돌과 모래까지 던

지며 저항했다. 맥키 중위는 요새 안으로 앞장서 진입하던 중 총을 맞고 사망했다.

 

질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 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무기가 없는 자는 돌로, 혹은 흙을 뿌려서 저항을 했다. 함락 직후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 시도했으나,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투신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

 

남북전쟁의 베테랑들도 독종같이 달라붙는데 질릴 대로 질린 모양.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병사는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전후 기록들도 대개 "완전히 바르긴 했는데... 뭐야 이 놈들 무서워."에 가깝다.

 

"수자기"라 불린 한국군 지휘관 어재연의 깃발은

찰스 브라운(Charles Brown) 상병과 휴 퍼비스

(Hugh Purvis) 일병에 의해 탈취되었다. 어재연 장군은 제임스 듀거티(James 

Dougherty) 일병에게 사살되었다. USS 콜로라도의 목수이자 기수였던 사이러스 

헤이든(Cyrus Hayden)은 한국군의 포화을 뚫고 미국 국기를 성벽에 계양했다.

 

위글은 여러곳에서 모셔와 편집한 것입니다

 

 

 

신미양요와병인양요의 침입로

 

 

 

 

 

신미양요에 참가한 1370톤급 uss Monocacy의 모습

 

 

작전회의를 주도하는 로저스 제독

 

 

USS콜로라도호에서 신미양요 참전 기념 사진을 찍는 미군 장교들

 

 

 

 

 

신미양요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가 미해군 콜로라도함에 실려있다

어재연 장군기는 136년이 지난 2007년에 대한민국에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왔다

 

 

 

한미 최초의 교전으로 점령당한 덕진진  

 

 

조선군 포로

 

 

미군함정에 파견된 조선 관리가 조선군 포로들과 접견하고 있다

 

전투종료 조선군의 처참한 시신들

 

최신식 조선군 군복 1881년

 

 

19세기 미해병

 

 

 

 

 

 

 

 

 

 

 

광성보 에 진열된 조선군의 포

 

 

강화 갑곳진에 전시된 포

 

 

 

 

 

2011년 1월1일 해맞이 여행때 찍은 분오리 돈대

 

분오리 돈대에서 보이는 동막 해수욕장

 

 

 

 

 

 어재연 장군 생가

 

어재연 장군 영정

 

 

어재연 장군은?

 

충북 음성군으로 가는 길목인 이천의 율면 산성리에는 신미양요 당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미국과 맞서 싸운 어재연장군의 생가가 있다. 장군의 생가는 울창한 소나무숲을 뒤로 하고 마을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아우 어재순과 함께 순국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이다. 아버지는 어용인(魚用仁)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하여 1864년(고종 1) 장단부사를 거쳐 1866년에 공충도(公忠道)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해 로즈(Rose) 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하였다가 1871년(고종 8) 2월 도총관·금위영 중군에 임명되었고, 이해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삼군부(三軍府)에서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추천하여 강화도에 급파되었다.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그는

 6월 11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의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을 맞아 야포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하여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 적의 창에 난자되고 머리를 베어갔다’고

적고 있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겸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에 추증하고, 그와 함께 백의종군한

아우 어재순(魚在淳)에게는 이조참의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군이다.



- 두산백과사전에서 -

 

조선의 서양교류가 몇번이고 기회가 있었는데도

형이상학적 유교의 사상 때문에 서양문명을 배격한체 쇄국으로

일관하다가 종말엔  서양문명을 일찍이 받아들였던 일본의 지배를

받게 까지 이르게 된다

 

미국과 조선군의 전과는 비교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대원군은 광성보의 전투 후에도

더욱더 쇄국정치를 시도해 나간다

 

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우리나라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한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강요하기위해 남연군묘를 1868년(고종5)2회에 걸처 도굴하려다 실패한다

이만행으로 대원군과 조상을 중하게 여기던 유교사상의 백성들 까지 

반 서양의식과 흥선대원군의 쇄국주의가 더욱 굳어 지게 되고 천주교도 들도

탄압을 받게 된다  

 

아래 전과 대비표는 위키백과에서 발췌한것입니다

 

 

전사자

조선군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 어재연(魚在淵) (중군)

• 어재순(魚在淳) (어재연의 친동생)

• 이현학(李玄鶴) (대솔군관)

• 임지팽(林之彭) (겸종)

• 김현경(金鉉暻) (천총)

• 박치성(朴致誠) (광성진 별장)

• 유예준(劉禮俊)

 

미국은 신미양요에서 공로가 큰 15명에게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 (Medals of Honor)을 수여하였다.

 

1. 존 앤드류스: 해군 3등수병

2. 알렉산더 매켄지: 해군 갑판수부

3. 새뮤얼 F. 로저스: 해군 병참장교

4. 윌리엄 트로이: 해군 3등수병

5. 찰스 브라운: 해병대 상병

6. 휴 퍼비스: 해병대 이등병

7. 사이러스 헤이든: 해군 공병

8. 프레드릭 H. 프랭클린: 해군 병참장교

9. 존 콜맨: 해병대 이등병

10. 제임스 도허티: 해병대 이등병

11. 패트릭 헨리 그레이스: 해군 선임 병참장교

12. 윌리엄 F. 루크: 해군 수습 선원

13. 마이클 맥나마라: 해병대 이등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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