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는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창 8:4)이 있고
아브라함이 살았던 하란(창11:31)이 있으며 애굽의 느고 왕과
유다의 유시아 왕이 전투를 벌렸던 갈그미스(대하35:20)가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고향인 다소(행9:11)가 있다
다소(Tarsus)
터키 동남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타르수스는 헬레니즘 시대와
고대 로마 시대의 번창한 도시로 BC72년경에는 로마의 속주
길리기아 왕국의 수도가될 만큼 문화와 학문이 발달하였다
지금은 터키 동남부 지역의 관문도시인 이다나에서 서쪽으로
약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농촌 도시로 변모했다
타르수스 (Tarsus) 는 다소의 다른이다
타르수스는 기독교인들이 꼭 가보고 싶은 성지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다소"가 바로 타르수스이며
사도 바울의(Stpau)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집터에는 집터 흔적과 우물만이 남아있다
바울이 사용했다는 작은 우물은 깊이가 35m 밖에 되지 않지만 수천년동안 바르지 않고 있다한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 서있는 허물어진 성문이 보인다
터키 다소 의 클레오 파트라의 문
이성문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유명한 클레오 파트라의 문이다
주점41년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 파트라는 지중해를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안토니우스 장군을
찾아 온 것이다
크레오 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를 유혹하여 자신의 보호자로
삼았으나 암살당하자 안토니우스 장군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다소 까지 찾아왔다
다소에서 이두사람의 만남은 그후 역사를 크게 바꿔놓았다
다소의 세워진 크레오 파트라의 문은 그녀의 다소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고대의 다소는 12m간격으로 3개의 분리된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후에 비잔틴 제국으로 기독교 국가가 되어 이문을
바울의 문이라 불렸다고 한다
크레오 파트라는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과 두 번씩 결혼하고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권력 투쟁을 하여
왕좌에 오른후 마케도니아 의 마지막 여왕이되었고 다시
프톨레마이오스 14세 에게 왕권을 찬탈당하자 로마의 실권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 안토니우스로부터 오리엔트
통치권을 얻어 내지만 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크레오파트라 군은 악티움 전투에서 크게 패망하고 둘은 자결하고
만다
악티움 해전
당시 로마는 제2의 3두 정치로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을 맡았고.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서부를 맡아
통치하였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된다.
소아시아 와 이집트를 통치하게된 안토니우스 는
기원전 37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한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누이인 옥타비아를 정식 부인으로 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다시 결혼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BC 43년 되면, 그들 둘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발단은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의 성공을 자축해 알렉산드리아
시가에서 개선행진을 벌인 것이었는데, 로마인들은 이 행진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개선식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낸 불경스러운 행사로 본 것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여제사장에게 맡겨둔 유언장을 옥타비아누스가 공개하게 되는데,
그 내용에 로마인들은 더욱더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안토니우스가 자식으로 인정하고 유산을 남겨준 것은
모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식뿐이고 전 부인인 풀비아와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가 낳은 자식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장지를 알렉산드리아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소원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진정이었지만, 안토니
우스의 유언은 정치적 유언이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은
로마 민중의 가슴 속에 안토니우스
에 대한 배신감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증오심을 활활 타오르게 하였다
BC 32년, 31세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결전의 시기가 찾아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국지전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세계를
누가 수중에 넣을 것인가를 결
하는 문자 그대로의 결전이었다.
즉,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다툼은 정치사상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누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권력투쟁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민중의 동의를 얻는 것은 어려웠다.
래서,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그 로마인 장군을 용병대장으로 만들어버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그 해 가을, 로마 본국의 모든 지방자치 단체는 옥타비아누스를 '
국가 로마을 수호하기 위해 적 이집트를 공격하는 원정군 총사령관' 에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 투쟁은 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벌어지는 국가간의 전쟁으로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해
온 폴리오나 플란키우스와 같은 참모들은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울 때부터 안토니우스의 동료였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이 로마와 이집트의 대결로 바뀐 것을 알고는
안토니우스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이반은 로마 병사들이 안토니우스를 버리는 발단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원정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그에게 기대했던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고, 시민들에게 연수입의
분의 1, 해방노예에게는 연수입의 8분의 1에 이르는 임시 특별세를
부과함으로써 민중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출전을 앞두고 치르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것은 신들에게 로마의 수호를 기원하고, 로마군의 승리를 빌고, 적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으로, 공식적인 로마의 적은 클레오파트라였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반면,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페수스에서 사모스섬을 거쳐 서쪽의
아테네로 옮기면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본영에서의 나날은 화려한 잔치로 끝이 났는데, 걸핏하면 우울해지는 안토니우스의 기분을
북돋우려고 클레오파트라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와 브린디시에 집결하는 가운데 BC 32년이 지나갔다.
BC 31년 3월,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갔고, 안토니우스는 지난해
겨울부터 이미 그리스의 파트라스에 본영을 설치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거기서 겨울을 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BC 31년 9월 2일 아침, 싸움이 벌어진 해역의 이름을 따서 역사상 '악티움 해전'이라고 불리는
결전의 막이 올랐다.
날씨도 쾌청하고, 동쪽에서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포진단계에서부터 모든 것이
안토니우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동풍에서 북풍으로 바뀌면서 전세는 역전이 되었다.
3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 나가서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지휘까지
맡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지옥 같은 광경은 이집트 여왕을 보통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돛을 올리고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본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 뒤
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뒤에 남은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아그리파의 함대에 포위되었고, 끝내는 로마군에 포획되었다.
옥타비아 누스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이집트 선박임이 분명한 배는 전리
으로 뱃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불태워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지옥같은 전쟁터로부터 달아나 곧장 이집트로 향했고, 반대로 안토니우스는 남쪽으로
곧장 도망쳐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하였다.
그는 전투에서의 충격으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단지 해변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바다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편지를 써서 혼자 살고 싶으니까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적었다. 그러나 클
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의 간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를 격려하여 다시 전쟁을 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안토니우스는 믿을 만한 참모 하나 없고, 하루가 다르게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달아나는 병사들을
보면서, 군대를 재편성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맞설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이 끝난 뒤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로 유유히 추격하면서, 복종을 맹세하는 군주들과 동맹관계를 경신하는
등 안토니우스의 방임 통치로 문란해진 각 속주의 통치기구를 재정비하였다.
이렇듯,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로마 세계의 동부가 옥타비아누스의
세력권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였다.
해가 바뀐 BC 30년, 시리아까지 와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편지가 도착하게 된다.
자신은 자결을 선택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안토니우스는 로마군이
접근해 오자, 마지막으로 남은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기병들이 모조리 적진으로 돌아서면서 안토니우스는 점점
불리하게 되었다.
바티칸 박물관의 크레파트라 조각상 로마군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오벨리스크와 위조각상을 로마로 옮겼다한다
대영 박물관의 클레오 파트라의 관
이 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클리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절망에 빠져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칼로 제 가슴을 찌르게 되었으나,
즉사하지는 못하였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전령이 달려와서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였다.
거짓으로 죽었다고 알린 것을 후회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을 알리는 전령을 보낸 것이다.
많은 출혈로 기진해 있던 안토니우스 부하들에게 자기를
여왕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마저 핼쓱해진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았다.
안토니우스는 그가 늘 원했듯이 클레오파트라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토니우스가 죽은 8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이집트 수도에서 이 승자에게 저항을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전해들은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보물을 줄테니, 그 대신
카이사리온을 왕위에 앉혀달라는 협상을옥타비아누스와 벌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보물이 들어있는 영묘에 침입하였고,
카이사리온을 살해하였다.
쌍둥이 남매인 10세의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는 로마로 보내져아버지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옥타비아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6세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도 형과 누나와 함께 로마에서 양육된다.
이리하여 어떻게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클레오파트라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 가운데 옥타비아누스가 죽인 것은 카이사리온 뿐이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셋 모두 살아남았다.
카이사르의 아들, 즉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BC 333년부터다.
300년 동안 계속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0년에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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