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화성행행도병풍

이모르 2020. 12. 14. 19:03

보물1430호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

 

 

 

정조대왕이 즉위하고 일성이 "짐은 장헌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이는 사도세자를 복권시켜 왕위의 정통성을 확립시키고

왕권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

 

정조의 어머니이며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부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

1795(정조 19) 2 9일 창덕궁을 나와 100리 길을

행행(行幸)하여 화성(華城지금의 水原)에 가서

16일까지 장헌세자의 묘원인

현륭원(顯隆園)에 전알(展謁)하고 봉수당(奉壽堂)

진찬연(進饌宴)을 베풀었다.

 

그 밖에도 노량진 앞 한강에 주교(舟僑)를 놓는 등

여러 가지 부속행사가 다양하게 치러졌다. 이는

그해가 죽은 정조의 생부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주갑(周甲)이 되는 해로 부모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는데, 화성 건설의 명분을 높이고

왕권 강화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 의궤로는 처음 활자와 판화를 함께 갖추어

서지학적 의의가 깊고 당시 새로운 화풍이 반영된 작품이다.

권수 1, 본편 5, 부편 4.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국립중앙박물관 및 개인 소장

 

 

 

화성성묘전배도  (華城聖廟展拜圖)

 

1.화성성묘전배도 (華城聖廟展拜圖 제1폭)


윤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인데,

이 호암미술관본은 창덕궁본과 달리 이 장면이 첫 번째로 배치되어 있어 특히 주목되고 있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선왕묘(文宣王廟)는 화성 남쪽 3리쯤의 산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산자락으로 빙둘러 배치하고 그 안에 작게 묘당과 행사장면을 묘사한 색다른 구도를 이루었다.
가장 뒤쪽의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의 오른쪽에서 정조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繖扇) 시위(侍衛)들이 서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시좌하였다. 그리고 작은 차일이 쳐진

중앙의 명륜당(明倫堂)과 외신문(外神門) 주변에는 시위들이 겹겹이 서서 호위한 채

더욱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반면에 성묘 밖의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부민(府民)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8폭 중에서도 산수 표현이 가장 정중하고 뛰어나게 묘사되어 주목된다. 문성왕묘의

건물이 1795년 8월 7일에 준공되어『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설에 실려 있는 모습과 거의 같은 점으로 보아 이 그림은 이때 정조의

지시에 의하여 새로 개건된 문성왕묘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생각된다.

이 계병은 1796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낙남헌방방도 (洛南軒放榜圖)

 

2.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1795년 윤2월 11일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서 성묘 전배를 마치고

유생들을 시취한 뒤 낙남헌에서 거행한 방방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과거(科擧) 시험 합격자 시상식으로 華城 행사 기념 과거(科擧)

시험 중 별시(別試)에 해당된다. 문과(文科) 5명, 무과(武科) 56명 합격하였다.

이날의 시험 문제는 “근상천천세세수부(謹上千千世歲壽賦)”로

혜경궁(惠慶宮)의 60세 생일 기념 별시(別試)였으므로, 혜경궁(惠慶宮)의

장수를 기원하는 부(賦)를 작문하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직접 출제를 했는데,

무과(武科) 실기 시험은 활쏘기로 정조대왕이 직접 통제하고 채점을 했다.

그리고 무과(武科) 합격자는 양인(平民)이 많았다.

 

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3.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정조 19년인 1795년 윤2월 13일 수원 화성행궁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탄신 60주년 잔치다.

 

혜경궁은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奉壽堂) 안에 머무르고,

그 바로 앞 왼편에 정조가 자리를 잡았다.

융복(戎服ㆍ왕을 호위할 때 입는 군복)을 차려 입은 친인척과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당에는 여령(女?ㆍ궁중무용을 하던 여성)들이

다양한 궁중정재(呈才ㆍ무용)를 선보였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렇듯 세밀하게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가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23일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6호 ‘봉수당진찬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한다고 예고했다.

그림에서 봉수당으로 통하는 중앙문 밖에 길게 늘어선

백관들의 모습이 행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림 속

마당에선 여령들이 ‘선유락’을 추고 있다. 신라시대 귀족의

뱃놀이에서 유래한 선유락은 여러 색으로 꾸민 배를 가운데

놓고 닻줄을 붙잡아 배를 휘감으며 추는 춤이다. 위대한

사람을 그리지 않는 조선시대 기록화 방식에 따라 혜경궁이나

정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혜경궁이 자리한 봉수당 안쪽은

구슬발로 가려져 있고, 정조의 자리임을 암시하는 호피방석이 있다.

그 앞에는 왕에게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불리는 복숭아

선도(仙桃)를 바치는 모습도 보인다.

‘봉수당진찬도’는 정조가 1795년 8일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릉원(顯隆園)을 다녀온 행사를 기록한

병풍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 중의 한 폭이다.

한양 도성이 아닌 화성행궁에서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연 데에는

화성 건설의 명분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숨어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되는 ‘봉수당진찬도’는 ‘화성능행도병’의

다른 그림과는 떨어진 단폭(單幅)으로만 전해 온다.

 

낙남헌양로연도 (洛南軒養老宴圖)

 

 

4.낙남헌양로연도 (洛南軒養老宴圖)

1795년 윤2월 14일에 정조대왕은 화성(華城)지역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개최한다. 노인 관료 15명. 화성(華城)

거주 노인 384명이며 신분은 구분하지 않았다.

 참고로, 당시 화성(華城:현재의 수원)의 남성 인구는

 약 3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정조대왕이 화성(華城)을

신흥 도시로 개발하기 시작한 초기였으므로, 아직 인구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노인들에게는 노란색 손수건을 묶은 지팡이를 지급하고, 비단 1필씩 선물로

지급하면서, 꽃도 나누어 주었다. 장엄한 궁중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로 잔치가 개최되었고. 그리고, 384명을 제외한, 양로 잔치에

미처 참가하지 못한 나머지 노인들을 모두 수배하여, 자손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신분 구분 없이 음식과 술을 대접하였다.

제공된 음식은, 왕과 노인들이 모두 동일했으며,

이 때 78세의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계단을 올라 왕 앞에

나왔을 때, 정조대왕의 발언하길, "힘은 비록 좋으시지만,

 80의 원로께서 어떻게 계단을 직접 올라오셨습니까? 또한 경(敬)은,

여러 노인들의 대표자 이십니다. 편하게 내려가서 바깥 정리를 지시하십시오.

조금 뒤에, 내가 뒤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왕과 신하는 상호간에 서로 존댓말을 사용했음.)

이외에, 수원 지역의 모든 백성들에게 각종 선물이 주어졌는데...

홀아비,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 등에게 혜택을 더 많이 주었다.


.

 

서장대야조도 (西將臺夜操圖)

 

5. 서장대성조도 (西將臺城操圖) 혹은 야조도

1795년 윤2월 12일 서울 호위 도시로서 새롭게

조성된 화성(華城)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는 군사 훈련 행사 장면이다.

 장대(將臺)라는 것은, 성곽 방어 지휘 본부이다. 현대의 화력

시범에 해당하는데, 일종의 군사 퍼레이드 성격의 훈련이므로,

 민간인들도 함께 참여하며 축제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6.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1795년 윤 2월 14일 정조대왕은 어사대가 있는

득중정(得中亭)에 임어하여 활을 쏘고 불꽃놀이를 즐겼는데.

이 불꽃놀이의 광경을 그린 것이 득중정어사도이다.

득중정이라는 명칭은 현륭원 천봉후 첫번째 맞는

사도세자의 탄신일에 수원부로 행차하였을 때 어사하고

그 사정을 득중정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면을 보면 좌측 위쪽에 차일이 쳐진 낙남헌이 작게 배치되고

그 안에 어좌가 마련되어 있다. 낙남헌 뒤로 노래당의 용마루가

이어지고 거기서 다시 우측으로 꺽인 곳에 위치한 득중정에도

사각형의 흰 차일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아래 어사대에는

혜경궁의 가교가 있고 명부들이 시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꽃놀이에는 혜경궁도 구경을 나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사대 우측에는 취병을 경계로 장춘각이 서 있고

그 아래에 화성행궁의 서쪽 담장이 조금 보인다.

화면 아래로 행궁 밖에 있는 몇 채의 건물이 일렬로

배치되었으며. 하단에는 화성의 성벽으로 마감되었는데.

그 왼편 구석에 보이는 옹성이 있는 이층 누각이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이라고 추정된다. 이 득중정어사도는

주변 건축이나 인물 묘사를 많이 집어넣어 현장의 상황을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감 나게 떠올릴 수 있게 하였다.

어사도를 그린 이날도 정조는 첫번째는 유엽전 30발을

쏘아 24발을 맞추었고, 두번재로 장혁(掌革)에다 3발을

명중시켰고, 세번재는 유엽전 25발을 쏘아

24발을 명중시킨 놀라운 솜씨였다.

 

환어행렬도 (還御行列圖)

 

 

7.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는

 

정조대왕이 화성(華城:수원) 행차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 2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 동안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내려가 여러 가지 다채로운 행사를 치른다.

 

특별히 이때를 기념해 행사를 치른 이유는 1795년이 혜경궁홍씨가

회갑이 된 해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는 동갑이었다.

 

혜경궁홍씨는 28살 한창 좋을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시아버지 영조에 의해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대참변이었다.

전 세계 역사를 다 뒤져봐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아들 살해였다.

 

물론 아들의 심병(心病)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결단이었다.

남편 없는 궁궐은 온통 정적들뿐이었다. 그 살얼음판같은 궁궐에서

혜경궁홍씨는 아들 정조가 아슬아슬하게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니 가슴 조이고 애타는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리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보내고 33년이 흘렀다.

 

다행히 아들은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 오래 살아서 좋을 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회갑연을 베풀었다.

특별히 아버지 묘소가 있는 화성에서.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회갑연을 마치고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모든 행사장면은 8폭 병풍으로

제작해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궁중에도 들였다.

 

 

 

한강주교환어도  (漢江舟橋還御圖)

 

.

 8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



1795년 윤2월 16일 화성행행의 마지막 날 당시 서울

남쪽의 한강 노량진(鷺梁津)을 지나가는 모습이다. 한강은

강의 폭이 600m 가량으로 너무 넓기 때문에, 현대적인 교량

건설 기술이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는, 교량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용선(龍船)을 이용하여 도하(渡河)를 했었는데,

이것도 번거롭기 때문에 주교(舟僑)를 가설하여 이용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직접 저술한

국가 표준 주교인 '주교지남(舟橋指南)'을 통하여 확인 가능하다.

실제로 사용된 선박은 48척 이었는데, 그림에서는 축약되어 묘사되고 있다.

원래 주교 가설 작업 기간은 20일 예정이었는데,

실제로는 11일 소요되어 완성되었다.

교량 중간의 가장 화려한 중심은, 왕(王)이 아니고,

왕의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이다. 왕(王)은

그 뒤쪽에서, 왕(王)의 어머니를 보호하는 형세를 취한다.

 

 

 

정조의 화성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오늘날 우리들이 조선시대의 의궤를 기록문화의 꽃이라 하는 것은

의궤의 기록이 상세하고 관리가 철저한데다 책을 정성들여 만든 것이

예술품의 경지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원행을묘정리의궤』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의궤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혜경궁의 회갑을 맞으며.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

 

1795년(정조 19)은 조선 왕실에 큰 의미가 있는 해였다.

이 해에 정조는 왕위에 즉위한 지 20년이 되었고,

영조의 둘째 부인이자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는

나이가 망육(望六) 즉 51세가 되었다.

또한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는 회갑이 되는 해였고,

이미 사망한 사도세자는 부인과 동갑이었으므로

역시 회갑이 되는 해였다.

1762년 당쟁에 휘말려 죽음에 이른 사도세자의 무덤이

처음 조성된 곳은 현재 서울시립대학교가 있는 배봉산이었다.

정조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지세가 좋지 않아서 부담이 되었는데,

1789년이 되어서야 천하의 명당지라는 화산

아래로 무덤을 옮길 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1795년이 되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까지 혜경궁은 한 번도 남편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화갑이 되는 해에 이곳을 방문하여

모친의 마음을 위로하고 화성행궁에서

회갑 잔치를 개최하려 했던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

 

2.정조의 행차 준비

 

정조가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을 다녀오는

행사는 1794년 연말부터 시작되었다. 12월에

행사를 주관하게 될 정리소(整理所)를 장용영에 설치했고,

이곳에서 근무할 고위 관리를 임명했다. 또한 행사 경비를 위해

사전에 마련해 두었던 십만 냥을 선혜청에서 정리소로

이관시켰고, 화성행궁에서의 잔치 절차를 정하기 위해

숙종 이후 궁중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의

기록을 검토하게 했다.

1795년 새해가 되자, 정조는 정순왕후와 사도세자,

혜경궁에게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하게 8자 존호(章倫 隆範 基命 彰休)를 올렸다.

이는 국왕에게 올리는 존호와 같았는데,

정조는 사도세자를 국왕의 지위에 복권시킴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95년 2월에는 행사 연습에 들어갔다.

행렬이 지나가는 한강에 배다리(주교)를 놓는

공사가 11일 동안 진행되었고, 정조는 창덕궁의

후원에서 혜경궁을 모시고 가마 타는 연습을 했다.

가마는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윤2월 초에는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는 연습을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가교도

 

 

3.화성에서의 행사

본 행사는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7박 8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윤2월 9일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창덕궁을 출발하여 한강가의 용양봉저정에서 점식을 먹고

시흥현 행궁에서 잠을 잤으며, 이튿날에는 사근평 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화성행궁에 도착하여 잠을 잤다. 평상시

국왕이 화성을 방문할 때에는 하루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이번에는 노인을 모셨기 때문에 이동 속도를

늦추어 2일 만에 도착했다.

이 때 국왕의 행차는 총 길이가 4km에 이르는 성대한

행렬이었는데, 행차가 이동하는 길가에는

많은 백성들이 구경을 나왔다.

실록에서는 이들을 관광 민인(觀光民人)

즉 관광하는 백성들이라고 기록했다

윤2월 11일부터 화성에서의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날 정조는 화성 향교를 방문하여 공자의 신위에 절을 했고

유생들을 만나 경서를 주면서 학문에 힘쓸 것을 권했다.

행궁에 돌아온 정조는 문과, 무과 시험을 치러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문과 시험장은 우화관이었고

무과 시험장은 낙남헌이었다. 이중에서 무과 시험은

이미 한 달 전에 1차 시험을 치렀고,

이 날은 최종시험만을 치렀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방방도

 

4.12일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참배했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으로 방문한 혜경궁은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고, 모친을 모시고 온 정조는 회한에 잠겼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 서장대에서 주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오후에 시작한 군사훈련은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반대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강력한 위력 시범이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서장대성조도

 

5.혜경궁의 회갑 잔치

 

13일에는 행궁 봉수당에서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회갑잔치가 열렸다.

정조는 봉수당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의 ‘봉수당(奉壽堂)’ 이름을 짓고

친필 현판까지 써 두었는데, 이 날의 행사는

건물의 이름에 부합하는 행사가 되었다. 회갑잔치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종친과 혜경궁의 친정 식구들이 참석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봉수당진찬도

6.신풍루사미도

14일 오전에는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지급했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특별히 죽을 지어 먹였다.

오전에 정조는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개최했는데,

정조는 행사에 참석한 모든 노인들에게

비단 한 필과 비둘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명아주 지팡이,

지팡이 끈으로 사용할 노란색 비단을 주었다.

오후에 정조는 경치가 좋은 방화수류정을 둘러보았고

 행궁의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활쏘기 시합을 벌였다.

 

윤2월 15일에 정조는 귀로에 올랐다. 국왕의

행차는 사근평 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시흥 행궁에서

잠을 잤으며, 이튿날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7.행사를 마치며

행사가 끝난 후에는 사후 처리가 남아있었다.

정조는 먼저 십만 냥의 경비에서 남은 것을

‘을묘정리곡’이라 이름하고 전국의 군현에

배포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혜경궁의 은혜가 전국의 백성들에게 미침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다음으로 정조는 행사에 관한 기록을 철저하게 정리하도록 했다.

국립 인쇄소인 주자소에 의궤청을 설치하여 의궤를 편찬하고,

의궤의 인쇄가 끝난 다음에는 혜경궁을 비롯한 102곳에

배포하도록 했다.

의궤 배포처를 일일이 지정한 것은 국왕이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왕실 가족만을 위하는 행사로 끝나지 않았다.

혜경궁의 회갑잔치와 함께 노인을 위한 양로연, 젊은 사람을 위한

문무과 시험, 어린 학생을 위한 학문 권장,

일반 백성을 위한 쌀 배급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왕실의 기쁨을 만백성과 함께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정조는 이러한 행사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려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을묘년(1795)에 있었던

국왕의 행차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는 중요한 의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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