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군의 용맹성은 육이오 동란때 유명하다
6·25동란시 터키군은 1951년 10월 말경 미 육군
제 9군단에 배속 돼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시
경기도 김량장리와 151고지에서 '
전투는 백병전으로 끝난다'는 터키군의
전통을 입증하며 중공군 1900여명
사살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하는데!!!!
참전 전사자 721인 위령탑을 부산에서
흙을 퍼와 세웠다 한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앙카라 한귀퉁이에 한국민간기업이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관리가 않된다
하다가 돌궐족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옛중국이 동쪽에 있는 오랑캐 라는 돌궐은
유목민으로 터키사람들을 말하는데
고구려때 우리와 많은 인적교류가 있었다 하여
컴에 조회해본 결과는
"몇년전 독일 국영방송 ZDF에서 한 '훈족의
침략과 게르만족의 대 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는 로마를 공격한 훈족의
추장 아틸라가, 고구려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라는 대목인데!!
옛고구려 영토 걸안과 돌궐등이 함께해
다민족 고구려였다 하는설도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넓힌 국토는
중국중심부 까지 파고든다
중국이 역사를 마구 자기 유리한대로 하고
고구려유적들을 파괴 방치 외곡시키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방명록에 서명하고 간단한 글도 남기고 터키인이 관리하는 모금함에 1달라씩 헌금도 하고
잠시 다른데로 흘렀지만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져서 터키인들이 형제국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스람의 습성에서
찾을수 있다고 했는데 이스람문화는 같이 같은
목적으로 피를 흘리며 싸워서 이룬
정의는 형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밖에서 알라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하면 국내로 시신을 반입 안하고
현지에 묘지를 쓴다고 하는데 6.25동란때 전사한 터키병사들은 釜山 유엔군
묘소에 잠들어 있지만 우리 1997년 IMFDP 경제위기때 터키가 큰지진이 났는데
각나라마다 돈을 보냈지만 한국은 형제국이라 하면서도 벵그라데시 만도
못하게 원조금을 보내서 결국 터키교민들이 모금운동을 벌려 한국에서
온것 같이 했다고 한다.
그밖에 터키인을 감동시킨 2002년 워드컵 한터키4강전에서 어마어마한
터키국기를 태극기보다 먼저 터키국기가 울려퍼질때 관중석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이벤트를 보고 감격했다 하였다
우리 아리랑과 위스크다르 각각 자국민요를 불렀던 파묵칼레의 터키소녀
터키민요 위스키다르는 실지 휴계소의 종업원이나 그
림엽서 파는 어린소녀도 잘불렀었다..
동란때 터키병들이 부르던 그리고 우리세대가 즐겨 외곡해 불렀던
우스키다르 라는 노래의 배경을 가이드가 설명하는데 신문기사내용
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터키군이 한국전에 참전하고, 전쟁후에도
유엔군으로 남아 있었다. 터키군이 한국에 가져온
노래로서는 어려서 어른들에게 무심코 들어서
일부를 많은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는 위스크다르라는 터키 민요이다.
이것이 당시로는 터키민요인지도 몰랐고,
위스크다르가 이스탄불의 한 지
명인지는 더욱 몰랐다. 당시 기억으로는
"위스크다리 찾아왔더니"로 알고 있어서
다리 이름인줄 알았었다.
위스크다르라는 터키 민요의 진짜 제목은 캬팁이다.
캬팁이란 서기, 비서정도의 공무원을 말한다.
위스크다르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이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우리는 위스크다르를 위스크
달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위스키달라, 소주달라 .. 하는 식으로 장난스레 기억하고
있다. 위스크다르는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 때에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제 2대 황제 오르한 가지가 비잔친의 콘타쿠지노스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을 1347년 위스크다르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후 5년만에 위스크다르는 오
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위스크 다르는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지역에 대한 원정의 출
발점으로서 중요한 군사 기지 역할을 했고, 시간이 지남녀서 군사는 물론 교역의 중심지 역할
을 하였다 위스크다르는 옛날에도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한다. 이스탄불을 가장 아름다운 시각에서 보기
위해서는 꼭 위스크다르를 들려야 한다. 위스크다르에서 보는 이스탄불 도시의 실루엣은 한 편
의 화폭이 아닐 수 없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활홀감을 자아내게 한다.
저녁 해질 무렵 위스크다르에서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도시의 건물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
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오스만 제국의 영화가 해협의 푸른
물과 어우러져 해안 저편에서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을 갖게된다. 위스크다르는 그 옛날
위스크다르의 처녀가 해협 건너 이스탄불을 바라보면서 캬팁이라는 노래를 불렀음직한 도
시로 남아 있다.
역사의 도시 위스크다르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캬팁이라는 노래이다. 캬팁은 오스만 제국
때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터키의 전통적인 민요이다. 따라서 작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터키인의 사람을 받으면서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이 민요는 부르
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느리게 부르면 구슬픈 곡조가 되고, 빠르게 부르면 흥이 생기는
그런 노래이다. 노랫말을 보면, 위스크다르에 살고 있는 처녀가 젊은 공무원을 사모하는
연가이다. 캬팁의 가사를 우리 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비가 내리네 내 님의 외투 자락이 땅에 끌리네
내 님이 잠에서 덜 깨어 눈이 감겼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깃 달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내 님을 위한 손수건에 사랑을 담았네 어느새 내 님이 바로 옆에 있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랴 내 님의 깃달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옛날 터키의 처녀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녀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 손수건을 훌려 사랑을 고백했다.
21세기를 사는 이 시대에 생각해 보면 얼마나 낭만적인가!
터키의 역사(백과사전옮겨옴)
아나톨리아는 옛날에는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11세기
이후 셀주크투르크의 등장으로 차차 이슬람화하였다.
13세기 말 여기에서 성립된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은 16세기에 아시아·유럽·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편으로 참전하였다.
패전을 틈타 그리스군이 본토에 침입해오자 1919년
케말 파샤(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루메리아 권리옹호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정부가 연합국과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영토를 연합국에 할양하는 등 터키의
사실상 해체를 결정하였다)을 맺자 앙카라에서
터키 대(大)국민의회를 소집하고 국민군을 조직하여
1922년 9월 그리스군을 완전히 격퇴하였으며,
11월에는 술탄제(制)를 폐지하였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체결된 로잔 조약 결과 세브르
조약의 주요부분이 폐기되어 터키는 소아시아
본토와 동부 트라키아의 확보,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국제관리 참가 등이 인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국
선언이 있었고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권리옹호단은 공화인민당(Republican People's Party)으로
개조되었다.
1924년 칼리프제(制)가 폐지되고 주권재민(主權在民)
대국민의회를 유일한 입법기관으로 하는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이어 승원(僧院)·영묘(靈廟)
폐쇄와 승단(僧團) 금지, 일부다처 금지,
터키모(帽)·베일 금지(1925), 법률의 유럽화,
태양력 채용(1926)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1928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조문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1931년 대국민의회에서는 공화·국가·민주·산업 국유·
세속·개혁의 6개 주의가 공화국의 지도원리로서
채택되었으며, 1934년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또한 에타티슴이라고 하는 국가자본주의제도를 채용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한 결과 철강, 섬유, 제지,
화학제품, 식료품 등의 생산이 증대하였다. 한편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도 노력하여 1933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1936년 몽트뢰 조약에 의하여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관리권과
재군비권(再軍備權)을 회복하였으며
1937년 중동의 안정을 위하여 인접국인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사다바드 조약을 맺었다.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1945년 2월 독일·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 중립을 지켰다. 1946년 1당
독재가 종식되고 정당결성의 자유가 허용되자
젤랄 바야르가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1950년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공화인민당을 누르고 제1당으로 등장하였다.
바야르를 대통령으로, 멘데레스를 총리로 한 민주당
정권은 국영산업의 축소, 민간기업의 조성(助成),
민간 외자의 도입을 기본정책으로 하여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발전, 도로·댐의 정비
등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반면 적자 재정에서 오는 인플레이션, 정부의
언론탄압 등에 대한 불만이 군부·언론계·지식층·
학생들 사이에 퍼져 1960년 5월 27일 구르셀 장군의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다.새로 수립된
군사정권(국가통일위원회)은 신헌법을 제정하고
전(前) 민주당 수뇌를 재판·처형했다. 정당활동이
재개되어 공정당(민주당의 후신), 신(新)터키당,
노동당 등이 결성되었다. 196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새 국회가 소집되고
민정이관 후 구르셀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 과반수를 넘는 정당이 없었으므로
공화인민당 총재인 이노뉴가 총리로 임명되어
3차에 걸친 연립내각이 조직되었다. 1965년 10월
총선거에서는 공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단독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좌파의 반정부활동 강화로 국
내치안이 악화된 가운데 군부의 압력으로
1971년 3월 내각이 총사퇴하였으며,
이를 대신한 에림 내각에 의하여 11주의 계
엄령이 선포되었다.
1973년 10월 총선거에서는 공화인민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단독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여
공화인민당 총재 에체비트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되었다.1974년 2월 터키
군부는 키프로스 분쟁에 개입하여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1977년 6월 총선거에서도 공화인민당이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안정 다수를 이루지 못하고
좌우 양진영의 대립이 깊어져 무력충돌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1978년 12월 종교갈등과 쿠르드독립운동 등
민족분규의 빈발로 정치적인 위기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9년 10월 중간선거에서 집권 공화인민당이
참패함으로써 21개월 만에 물러났다. 1980년
9월에는 육군참모총장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주도하에 전격적인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여 데미렐
총리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터키의 생활모습
터어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며,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문제발생시
적극 도와주려 합니다.
전통적으로 체면과 무예를 존중하며, 매우
정열적이고 다혈질이나 서두르지 않으며,
신앙의 전사(戰士)라고 불리는 가지(Gazi)의
정신을 윤리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터어키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지
정학적인 특성으로 동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Desert Flower / Uska Dara(우스크다라)
Usk dara Gider Iken
Usk dara gider iken, ald?da bir yaghmur.
K?tibimin setresi uzun eteghi ?amur.
K?tip uykudan uyanmush g?zleri mahmur.
K?tip benim ben k?tibin el ne kar?sh?r.
K?tibime setereti balto ne g?zel yarash?r.
Usk dara gider iken, bir mendil buldum.
Mendilimin i?ine de lokum doldurdum.
K?tibimi arar iken, yan?mda buldum.
K?tip benim ben k?tibin el ne kar?sh?r.
K?tibime kolal? da g?mlek ne g?zel yarash?r.
* * * * *
As I was going to Usk dar, it started raining.
My secretary’s long skirt trailed in the mud.
우스크다르 가는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 비서의 긴 스커트가 진흙에 끌렸다
The secretary was tired and her eyes were sleepy.
My secretary and I were not holding hands.
My secretary’s coat was not very comely.
내 비서는 지쳤고, 그녀의 눈은 졸음에 찼다
내 비서와 나는 손을 잡고있지 않않다
내 비서의 겉옷은 흐트러져 있었다
As I was going to Usk dar, I found a handkerchief.
There was Turkish candy inside my handkerchief.
우스크다르 가는길에 손수건을 발견했다
내 손수건 안에 터키 과자가 있었다
Looking for my secretary, I found her at my side.
My secretary and I were not holding hands.
My secretary’s starched blouse was not very comely.
내 비서를 찾어보니, 그녀는 내 옆에있었다
내 비서와 나는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
내 비서의 풀먹인 블라우스는 꾸겨져 있었다
'우스크다라'는 1950.6.25 당시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Turkey 군대로 부터 유행된 노래로,
원래 '터키'의 민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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