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의 전경모형둔황 막고굴 17호굴(장경동)모형 11세기-12세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굴 1900년 발견당시 석실안에 3m가 넘는 높이로 수많은 두루마리가 쌓여있었다 수량은 확인된것만 4만점이 넘고 연대가 있는 문서중 이른것은 4세기 늦은것은 11세기 기다 문서의 80% 이상은 한문문서 90%는 불교관련 문헌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이 인도를 부르던 명칭 천축 이 인도를 동서 남북과 중안으로 나누면
다섯 천축국이 된다 1300여년전인 723년 당나라에 유학온 신라승려 혜초는 중국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뒤 먼저 동축전에서 불교성지를 참배하고 중천축구 남천축국
서천축국 북천축국을 순례했다 그런다음 서역으로 넘어가 대식국의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처 파미르 고원을 넘어 둔황을 지나는 대장정 끝에 727년 당나라수도 장안(지금의시안)으로 돌아왔다 4년에 걸친 약2만 km의 대장정이었다
727년 신라승려 혜초가 인도와 서역 여행을 마친뒤 중국땅 장안(시안)에서 왕오천축국전
을 완성했고 그것이 둔황의 막고굴에들어간것을 프랑스 동양학자 폴펠리오가 발견하여
막고굴 관리자로부터 헐값에 이들 고문서를 구입해 본국 프랑스로 보냈다 약탈이나 버금갔지만 어쨌던 돈을 주고 구입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소유권을 주장할수 없다
이詩로 혜초가 신라인 이라 판독되었다 한다
진본 60cm 왕오천축전 8세기 프랑스 국립도서관소장 통일신라 시대 혜초가 인도서역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기록 한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으로 총227행 5893자.총길이358cm다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의 정치경제 문화 풍습등을 알려주는 세계유일의 기록이다 올초봄에 국립박물관에서 왕오천측국전이 전시되고 있었을때 친구들과 관람을 하였는데 혜초의 대단한 의지에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14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는것도 힘든 지금의 자발성으로 생각한다면 2만km 를 어떻게 걸어서 몇 년씩 오고 갔을까?
어떤 의지로 어떤 답을 얻고자 고행을 자초했을까??
때로는 식인종도 있었을것이고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을 가치관
앞에서 모두 놀라고 있을때 해설 안내책에 명시된 터키에 대한 언급이었다
왕오천측국전에 명시된 돌궐은 지금의 터키를 말하는데 해초는
어떻게 거기까지 가시게 되었나???
대서사시 혜초와의 대화 130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분의 노고를 감격하여 맞이했다
역사공부하면 자주 들어 하던 왕오천축국전 진본을 확인하던중 활자 하나 하나가 또렸
또렸하게 쓰여져 있었다 춘곡에게 해석을 부탁하니 이르기를 최초 발견자도 옛 고서
판독 학문을 연구하여 발굴 하였는데 어찌 나같은 필부가 알겠는가? 하다.
다음은 왕오천측국전에 소개한 돌궐견문록이다
터키의 콤마게네 왕국 BC1세기에 성립되어 72년 로마제국에의해 멸망 되었다
알튼데페/ 아르진잔에 있는 유적지 터키의 아라랏산이나 하산산 같은 높은산맥을 돌아 사리골고다 같은 사막지대도다녔을 혜초의 행로 존경스럽다 신라경주는 국제무역의 도시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괘릉의 서역 무역상 (사진출처 동아일보)
황남대총 천마총등 4-5세기의 경주 곱ㄴ에서는 모두 25점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다 이유리그릇들가운데는 로만글라스뿐아니라 페르시아에서 만든 페르시안 글라스도있다 동부지중해의 유리가 페르샤와 중앙아시아를 거처 신라땅으로 들어온것이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소장
돌궐(투르크) 이호국들의 이북으로가면 북쪽으로는 북해 서쪽으로는
서해 동쪽으로는 중국에 이르며 그이북은 모두돌골족이사는 강역이다
돌골족은 불법을 알지못하며 절이나 승려도 없다
의상은 모직외투와 모직상의이며 고기를 먹을거리로삼는다
성곽을 거처로 하는일도없으며 펠트천막을 집으로 삼는다
살러다닐때는 이천막을 몸에지니고 물과 풀을 따라다닌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깍고 여자는 머리를기른다
언어는 다른나라와 같지않다
파사국(페르샤) 토화국에서 서쪽으로 한달을 가면 파사국이다 이나라 왕은 전에 대식을
지배했었다 대식은 파사왕이 낙타나 방목하는 신세였으나 후일 반란을 일으켜 파사왕을
시해하고 주인이됐다. 그래서 지금은 대식에게 병합됐다.의상은 예부터 헐렁한 모직상의
를 입었고 수염과 머리를 깍으며 빵과 고기만만 먹는다 비록 쌀이있더라도 갈아서 빵만
만들어먹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교역을 좋아해 서해에서 배를타고 남해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자국에서
여러보물을 가져온다 그러다보니 그나라에서 보물이 나온다고들한다 곤륜국에가서 금을
가져오기도한다 또한 배를타고 중국땅에도 가는데 곧바로 광저우까지가서 능 비단 생사
면 같은것을 가져온다 이땅에서는 가늘고 질좋은 모직물이난다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며
하늘을 섬기고 불법을 알지못한다.
그러면 혜초가 터키를 방문할때 터키의 정세는 어떠했나?? 백과사전을 인용해보면
6세기 중반 돌궐족은 동북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으나, 당나라에 의해 밀려나 중앙아시아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이후 투르크족은 이슬람화 되었고,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 제국(터키어: Selçuklular 셀주크룰라르, 페르시아어: سلجوقيان 살주키얀; 아랍어 سلجوق 살주크, 또는 السلاجقة 알-살라지카)이 등장하게 된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 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며,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에서 발흥하여 중동에서 투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다
지도에서 보듯 동쪽끝 동방에 있는 신라 에서 인도대륙을 지나고 유럽에 인접한 이란 터키까지의 대장정은 불가사의 한 일이 아닐수 없다
혜초가 동천축국에서 찾은 마하보디탑 실제로는 탑모양의 절이다
이 마하보디사에 도착한 혜초는 부처의 모습을 그리며 느낀 기쁨을 오언시로 남겼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하리오
가파른길 험하다고 근심할뿐
업연의바람 몰아처도 개의찮네
여덜탑을 친견하기란 실로어려운데
오랜세월 격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 지겠는가
하지만 이아침 내눈으로 보았노라
혜초의 행로에서 출토된 방한화 와 구리로 만든 안대
모자를쓴 해골 기원전 20세기-기원전10세기 모자를 쓰고 있는 여성의 두개골 발견당시
두개골에 약간 틀어올린 머리카락이 남아있었다 모자 정수리는 뾰족하고 모자 왼쪽에
깃털등을 묶었을 나뭇가지 두개가 꽂혀있다 모자 꼭대기 부분에는 털을 꼬아 만든 띠가
장식돼있고 깃털은 남아있지 않다
나무로 만든 미라 기원전20세기-기원전10세기 누란사오허 묘지출토 신장문물고고학 연구소소장 나무를 깍아 얼굴과 몸통. 다리를 만들어놓고 눈과 입을 조각해 만든 사람의 미라출토당시 나무관에 매장되어있었다 사람이 타지에서 사망해 시신이 없을 경우 나무미라를 대신해 안장한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매우 진귀한 사례다
동로마 금화 6세기 닝샤 구위안 출토 닝샤구위안 박물관소장 조그만구멍이있어 장식품으로 사용됐을수 있다 발견 당시 죽은이의 눈과 귀 입부분에 놓여있었다 정면에는 동로마 황제의 얼굴이 뒷면에는 십자기둥을 잡고 앉아있는 날개달린 여신이 새겨져있다 아래 오언시 또한 왕오천측국전에 수록된 혜초의 시인데 여행중 외롭고 괴로움을 나타내며 눈물을 뿌리는 인간적인 면을 표현한 대목입니다...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대는 서쪽 이역이 멀다고 원망하고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눈쌓인 산마루 아스라한데
험한 골짜기 도적떼가 길을 트누나.
새도 날다가 가파른 산에 짐짓 놀라고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 건너기 어렵네.
평생 눈물을 훔쳐본 적 없는 나건만
오늘만은 하염없는 눈물 뿌리는구나.
차디찬 눈은 얼음까지 끌어 모으고
찬바람 땅이 갈라져라 매섭게 부는구나.
망망대해는 얼어 붙어 단을 깔아놓은 듯
강물은 제멋대로 벼랑을 갉아먹는구나.
용문엔 폭포수마저 얼이 끊기고
우물 테두리는 도사린 뱀처럼 얼었구나.
불을 벗삼아 층층 오르며 노래한다마는
과연 저 파밀 고원을 넘을 수 있을런지.
터키에서 느낀 것중 하나는 처녀들은 하나같이 균형잡힌 몸매의 미녀들이다허나 단음식 문화 때문에 아줌마들은 뚱보일색이다 남자들도 배가 나와있다
국토는 흑해 에게해 지중해가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다 면적은 776,723 펴앙미터 이고 국민은 터키인.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인.아랍인.보스니아인.조지아인.서어카시아인.알바니아인.아제르바이젠인.체첸인등 다양한 인종들이 마치모자이크모양 구성되어있고 국민대부분이 이스람교이나 소수가 기독교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자료:동아일보
고고학자 알리클르치카야 의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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