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 밤중에 도착한 다음날 변두리 호텔 주변의 산책나가서 야생화를 관찰한 도암의 말은 몇몇꽃은 우리나라꽃과 같은것이다.라고 첫소감을 피력하였다 이국정취에 호텔주변을 산책하고 첫 일정은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유람선을 타며
주변 관광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보스포러스를 보며 나갈때는 오른쪽이 유럽이다 다리를 돌아올때는 그반대로 좌측이 유럽쪽었다.
가이드의 설명은 유적하나 하나 를 설명하고 있었다 불르모스크 돌마흐체
궁전 뱀의궁전 귀족들의 별장 최고급 사립학교 그리고 세계사에 큰영향을
준 루멜리성을 설명할 때 쯤엔 딴청을 피다가 배가 방향을 트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사진이 없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풀의 함락은
이 루멜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람 세력의 잦은 침공으로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풀의
성곽에 의지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마지막 최후공격을
목표로 루멜리성 을 쌓았는데 이요새는 1.000명의 기술자와 2000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1452년 불과 4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3개의 탑과 이탑을 따라 연결된 성벽으로 되어있다 해안에 있는 탑이 할릴파샤의 탑으로 12각형이고 오른쪽에는
사루자 파샤탑으로 직경이 24m 이고 높이는33m 라 한다 왼쪽에는 자가노스 파샤 탑이며 바다로부터 높이가 57m이며 넓이는 남북으로 250m.동서로 130m 로 1953년에 콘스탄티노풀 정복 500주년을 기념하여 복구되었다.
루멜리 성
이 성의 완공으로 오스만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통행권을 장악하여
흑해로부터 들어오는 비잔틴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고 머지않아
콘스탄티노풀이 함락되어 천년에 걸친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끝나게
되었다 한다. 이후 비잔틴의 자료들을 모아 천년의 한을 올려보았다.
터키영토는 북위36-42도 동경26-45도로 아시아와 유럽대륙 사이에 자리하고 아시아 대륙 영토는 아나톨리아 유럽대륙에 속한 영토는 트라키아라 칭한다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로 “동쪽의나라”태양의동쪽“지역 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고대에는 “소아시아”라고 불리었다 이스탄불해협과 치낙칼레해협 아르마라해는 터키영토를 둘로 나눈다. 아나톨리아는 12.500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큐축 체크메제 군지역 내의 야름부르가즈 동굴 탐사에서 구석기 시대의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B.C 667년에 트라카야에서 기원한 메가리언이 이주해와 비자스의 지도아래 사라이부르노에 정착하였다.정착인들은 이곳의 지명을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 정하였다 해상무역역의 발달로 도시는 빠르게 발전하여 도시를 확장해갔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비잔틴 제국 영토.
붉은색이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했을 때의 영토이고,
노란색이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등이확장한 영토다.
유스티아누스1세(482-565년)
(유스티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대규모 토목공사와 행정기구 재편
등에 힘써 향후 수백년간 제국이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라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돌리려 애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지막 로마황제 였다.
산 비탈레 성당의 벽화 가운데 하나.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유스티니아누스고
그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관료가, 왼쪽엔 성직자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와 성직자 사이에 있는 인물은 성직자가 아니라
벨리사리우스다.그만 나란히 놓지 않고 뒤로 뺀 이유는 뭘까...?
밸리사리우스(506-565년)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는
비잔틴 제국 최대의 명장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활약했다.
현재의 유고슬라비아인 일리리아에서 태어났다.
벨리사리우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정확한 혈통과 출생 날짜를 알 수 있는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호위병이었다가 그의 주목을
게 되어 26세에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후 벨리사리우스의 일생은, ‘유스티니아누스 때’
라고 이야기되는 군사활동과 많은 부분 겹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대외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사산 조 페르시아와의 분쟁을 계속한 것과, 옛 로마 제국의
영토들을 되찾으려 시도한 것이 그것이다.
벨리사리우스가 지휘관으로서 맨 처음 전장에 선 것은 530년이었다.
다라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 맞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의 칼리니쿰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는 완패하고 만다.
결국 비잔틴은 페르시아와의 휴전협정을 추진했고, 호스로 1세가 새로
페르시아의 왕이 되면서 532년에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로마에 입성하는 밸리 사리우스
여러 경로로 발달해가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B.C 330년에
정복한후 비잔티움은 마케도니아 지배를 받다가 B.C 146년에는 동으로 동으로 진출해온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우던 고대 화염방사기
비잔틴 해군의 주병기로 이것 때문에 천년을 비잔틴으로
살았다 한다
비잔틴 병기
비잔티움은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해 제국의 새수도로
공포 되며 “콘스탄티노풀”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된다.
로마제국이 395년 동서로 뷴리되면서 콘스탄티노풀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맥을 같이하게된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성지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그 위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수령으로 하는 라틴제국을 건설합니다. 이때 콘스탄티
플은 심하게 약탈당했고 가뜩이나 위태한 지경에 서있던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수복을 위해 근 반세기 가까운 기간동안 라틴 제국을 쫓아내기 위해 국력을 소진합니다.
1024년 제4차 십자군 원정때 도시는 라틴군에 의해 엄청난 약탈 파괴를
당하고 제국의 통치권을 잃게되었고 1261년 다시 비잔틴은 부활되었으나
1453년 5월 29일오스만제국 술탄 메메드2세에 의해 정복당하고
이 도시는 3일간의 약탈이 행해진 후 동로마 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때부터 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으로 불리워지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 문화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고고학자 알리 클르치카야 지음 터키북에서 발췌)
티베르강 전투에서 영감을 얻어
기독교로 개종하고
칙령을 발표하는 콘스탄티누스1세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274.2.27~337.5.22]
콘스탄티누스 대제.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
정식 명칭은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린다.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퇴위 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로서도 유명하다.
A.D.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 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A.D. 330년 5월 11일 히포드럼(마차 경기장)에서 도시의 완공식을 갖고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태어난 이 도시의 이름은 비잔틴제국의 기독교 문화를 대표한다.
기독교 국가로서 123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이후 서방의
십자군 전쟁으로 탈환의지를 보였으나 이스탄불로 이어져온다
11대. 콘스탄티누스 '달라가시스' 두카스 콤네누스 팔라이올로구스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us XI)
(Constantinus 'Dragases' DukasComnenus Palaiologus/
1404.2.9~1453.5.29/재위 1449~1453)
오스만 투르크에 최후까지 맞서 싸우며 콘스탄티노풀을 사수했던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 서방의 도움을 얻기위해 로마교회에 고개를
숙였을 정도로 처절 하였으나 누구하나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신을 권유하는 신하들의 권고를 듣지않고 끝까지 자신의 도시와 백
성을 지키려 사력을 다하였다.
황제의 모든 문장을 제거하고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익명으로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한다
가운데 예니체니 지휘관 과 병사들
14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무라드 1세는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기도 했습니다. 투르크 말로 ‘새로운 군대, 신식 군대’를
뜻하는 ‘예니체리(Yenicheri)’ 군단을 창설한 것도 그의 치세중의 일이었다.
age@bln3Qm/btq0AEXkd6H/kmMWGejcHCI5XaiKGoY6nK/tfile.dat|alignCenter|srcse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vPkdE%2FbtqFXIE0lMS%2FErKuG5VmQLkixHT3iKFsrk%2Fimg.bmp" width="675" data-origin-height="900" data-origin-width="675" data-ke-mobilestyle="widthContent"|||_##]
14-15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는 러시아 인도 이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등 짖밟고 마침내 단하나 남은 강국 오스만제국을
공략하여 앙카라를 점령한다
티므르제국 을 일으킨 티무르는 풍운아적인 기질을 가지고 동양적 중동적
위선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즉 우정어린 항변 화해 포옹 그리고
끊이지 않는 코란구절을 인용뒤 이은 배반 급습 무자비한 처형이었다
그 한예로 7년동안 관용을 베풀던 바그다드에서 반란조짐이 있자 티므르
병사 한명이 바그다드인 목2개씩 가져오라 명하여 성벽에는 삽시간에
2만의 목이 쌓였다 한다.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근20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산채로 차곡 차고 쌓고 진흙과 벽돌을 함께 섞어 탑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룬 티므르제국
그는 잔인 무도하면서도 냉혹한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반면 문화 예술의 보호자라는
양면성을 보였다
단하나 눈앞에 남은 제국 오스만의 술탄 바야지트1세는 오스만의 국력을
정점에 이르게한 인물이다.
아버지 무라트1세의 위업을 이어받은 세르비아를 점령 항가리 보스니아
그리스를 경략했으며 십자군도 격파한 인물인데
그에게 티므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너처럼 왜소한 군주가 나와 감히 비교할수 있겠는가??”
바야지트의 답변은
“너를 타브리즈와술타니아 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킬 것이다” 였다
이답을 들은 티므르는 1400년8월 소아시아로 진군하였다
오스만영내 요새 시바스를 공략 3주만에 함략시켜 포로중 무스림은 살려주고
아르메니아계 4000여명의 군인 들은 산채로 묻거나 우물에 던져버렸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티므르는 1402년 6월 앙카라로 진군 1402년7월
20일 앙카라 치부카바드에서 양군 100만명이 동틀력부터 밤중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패한 술탄 바야지트1세는 도망하다가 아들과함께
붙잡혀 살려주나 화병으로 1403년 사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은 티므르에겐 소풍에 불과했다
만약그가 명(중국)을 치려고 가다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오스만제국이나
콘스탄티노풀 모두 티므르제국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엉뚱하게 오스만의 압박으로 함락위기에 처했던 콘스탄티
노풀은 그후 반세기 후에 술탄 메메드2세에 의해 함락된다
정복자 메메드2세
1453년 투르크제국의 수많은 병력이 콘스탄티노풀 성벽앞으로
진군 육해군 입체 작전이 펼처지고 우르반이라는 거포로 성벽을
부수고 있었다 현재도 이스탄불에 시내 곳곳에 부서진 성벽과 성채
들을 볼수가 있는데 도시민들은 고적지에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비잔틴 성벽
53일간 피아를 구별 못하는 처절한 전투에서 성벽앞 400m까지
진출 거포를 쏴대며 쿠르트해군의 잠행기습전진로를 뚫고 들어가게된 계기로
드디어 역사상 제일긴 1200년의 수명을 자랑하던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콘스탄티노풀 성으로 입성하는 메메드2세
정복자가 입성하기전 많은 사람들은 소피아성당에서 기도하고 전함을 타고
그레타 섬으로 도망한다
이스람의 허락된 3일간의 약탈을 거처 오스만 제국으로 합병된다
'터키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초의터키여행 터키여행16부 (0) | 2021.03.20 |
---|---|
쾨셈이야기 (터키여행15부) (0) | 2021.03.20 |
그랜드바자르 터키여행13부 (0) | 2021.03.20 |
무역상의쉼터 터키여행12부 (0) | 2021.03.20 |
에게해와다르다넬스해협 터키여행11부 (0) | 2021.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