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아누스 1세(Justinianus Ⅰ 482?∼565)
비잔틴 교회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하기아소피아를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1세는 그는 527년부터 565년까지 38년간을 비잔틴 황제로 굴림하였던 인물이다. 유고슬라비아 지방 출신으로 소년시절에 콘스탄티노플의 근위군사령관이던 숙부 유스티누스 1세의 양자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성장하여 군인의 길을 택했다가 518년 숙부가 황제로 선출된 뒤 정계로 전신(轉身)하였다. 그 후 집정관·육군원수·부황제로 순조롭게 승진하면서 연로한 숙부를 돕다가 숙부가 사망한 뒤 황제직을 계승하기에 이르렀다.유스티아누스 1세는오랜치세 동안에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로마법대전(法大全)》의 편찬, 옛 서로마제국 서방령의 탈환, 정통신앙의 확립이 두드러진다. 법학자 트리보니아누스에게 로마법의 개정·재편을 명하여 하드리아누스황제 이후의 칙법(勅法)을 다시 정리, 편집한 유스티니아누스법전,을 , 529년에 완성하였다.이밖에533년에는 고전법학자들의 여러 학설들을 정리해 현행법으로서 사용이 가능한 형태로 재편집한 학설집을 533년에는 법률학교용 교과서로 만들어진 법학제요(法學提要)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다 유스티니아누스법전 이후 565년까지의 칙법 158편을 모은 《신칙법》을 더하여 4개의 법률전집을 편찬하였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에서 가져온 2개의 항아리에는 물이 1250리터가 들어간다.이물은 몸을 깨끗히 닦고 들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준비된 항아리다.
사진설명
트라야누스 신전 페르가몬 왕국은 기원전 3세기에 번창하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령이 되었다
사진출처:http://blog.naver.com/injae5344/20113919850
성전 내부는 오스만 투르크족이 이 땅을 정복하였을 때, 성 소피아 성전을 허물지 않고, 벽 면에 회를 5Cm두께로 칠한다음 이슬람 문화 양식으로 바꾸었다. 이것을 1931년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발견하여 칠을 벗겨내니 그 안에 아름다운 비잔틴 문화 양식이 살아나오게된 것이며,성 소피아 성당은 다시 한번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로 주목받게 되는데 비잔틴제국 역사학자 이노우에 고이치는 로마제국의 멸망은 비잔틴제국의마지막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가 독수리 문장을 술탄아흐멧에 의해 버린 1453년5월29일에 진정으로 이루어 졌다고 말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로마제국의 멸망보다1천년이나 늦은것이다
1453년5월23일 오스만 투루크군이 함성과 귀청을 찢을듯한 군악대소리와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소리로 가까이온 이교도들은 도끼로 소피아의 청동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예언자가 말한 천사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온힘을 다해 구원해줄것을 기도하던 시민들은 참살당하고 겁간당하며 이교도의 은전을 바랄뿐이었다 4일간의 약탈은 이스람의 허락된 풍습으로 쑥대밭이 되어갈 위기에 술탄 마흐엣이 호령 하였다한다 대리석을 뜯어내는 병사를 칼을겨누고 내동이치며 너희는 약탈한 보물과 부녀자로 만족해야한다 이런 훌륭한 건축물은 짐의것이다 하고 살릴것을 명했다 한다..
정복자 술탄 마흐메드 2세(Conqueror Sultan Mehmed 2,1432.3.30~1481.5.3) 장미꽃 향기를 맡고있는 초상화
술탄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풀로 들어선다 이로서 소피아의이름은 아야소피아로 변명되고 십자가 대신 이스람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진다 정복당한후 이스람 사원으로 전환되었다 술탄 압둘 메지트(1839-1861) 시대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으며 1934년 11월24일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1935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한다
십자군전쟁
.이슬람의 동로마 침입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했다. 서방에 원병을 요청했다. 1071년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당함. 다음 황제 미가엘7세(1071 - 1078)가 교황 그레고리7세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라는 사람이 황제가 되어서 1086년 안디옥, 베데사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도시를 빼앗겼다. 그래서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레고리7세는 헨리4세와 서임권 논쟁을 하느라고 성공을 시키지 못했으나 다음 교황이 성공을 시켰다.
종교적 원인
1076년 부터 성지가 셀주크 터어키에게 점령당했다. 이들이 성지 순례를 방해했고, 교회는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동방교회까지 지배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한마디로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회가 개혁되고 신앙의 열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운동이었다.
11세기 말부터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13세기까지
총 8차례의 전쟁을 치룹니다....
제 1차 십자군 원정 (1096 ~ 1099 )-> 1096 ~ 1099년 까지 전쟁을 치룹니다....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십자군)은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슬람교( 이슬람군) 의 매복에 의해 많은 십자군이 사망한걸로 알려저 있습니다...
제 2차 십자군 원정 ( 1147 ~ 1149 )->제 2차 원정은1147년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 되면서 시작되며, 터키인들과의 여러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제 3차 십자군 원정 (1188 ~ 1192 )
-> 1188년에 프리드리히 황제가 인솔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며 ,영국의 왕 리차드1세 와프랑스의 필립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제 4차 ( 1202 ~1204 )-> 1202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이교도로부터 빼앗긴 영토와 그리스도교인의 해방을해야 한다는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이원정에 참가하였나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라틴 제국을 그곳에 설립 하였씁니다....이 과정에서 도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각해집니다.....
제 5차 (1217 ~ 1221 )->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며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습니다..십자군은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둡니다....
제 6차 (1228 ~ 1229 )-> 십자군원정 중 6차 원정이 가장 짧으며 , 교회와는 무관하게 파문중에 있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으며그는 큰 전쟁 없이 에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됩니다....
제 7차 (1248 ~ 1254 ) 8차 (1270 )-> 십자군은 6년간의 전투에서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카이로에서 완패 당해 후퇴하며 포로가 되어 7차원정은 실패로 돌아가며 , 8차 또한 실패로 돌아가며십자군 원정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결과서구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수 있으며 ,은둔적인 수도생황에서 병든 순례자에 대한 봉사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보호하는 등 외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기사 수도회를 출현케 하게됩니다....
영향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교황권이 신장되는 계기도 되었지만, 동시에 십자군 원저의 실패가 교황권이 크게 실추되는 결과도 가져왔고 ,서구의 공동체 의식을 크게 강화되는 계기가 되엇기도 합니다.....
참고: 봉서방싸이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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