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기

에베소의노천대극장 터키여행45부

이모르 2021. 3. 30. 19:57

 

Agora 는 고대 에패스의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하는 집회장으로 쓰인 야외공간으로 어원이 “모이다”란뜻의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의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광장을 의미한다. 고대 에페스는 B.C 334년 바케도니아 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비롯하여 인더스강 까지 진출하면서 바케도니아는 짧은 기간동안 고대 근동에서 헬라스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수용인원 25.000 에페스의 노천대극장

 

 

에페수스의 노천극장 입구

 

 

히에라 폴리스의 노천극장 수용인원 1.5000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수용인원 50.000 명

 

이때를 기점으로 그리스역사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렉산드로스의 부하였던 리시마쿠스 장군이 건설한 신도시 에패스에 서민들의 아고라는 노예매매 까지 이루어 졌다 한다 이곳부터 연결된 항구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거리이다 항구거리 양쪽에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아르키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페소의 현관이다 기원전 2-1세기 마케도니아는 새로이 떠오른 강국 로마와 전쟁을 벌린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97년 필립포스5세가 기원전 168년엔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대패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안티고노스왕가는 폐위되고 왕국은 분활되었다. 기원전 149년 잠시 복원되는듯 하였으나 이듬해에 로마에 패배하고 로마에 직접 지배를 받게되어 마케도니아 속주가 설치되었다. 로마의 지배하에 에페스의 대형 노천극장은

 

 

 

클라우디스 황제

 

트라젠 누스 황제 

 

트라젠 누스 황제 

클라디우스 (Cladius)황제(A.D. 41~54) 때 공사가 시작되어 트라젠카드(Trajanghkd)황제(A.D. 98~117)때 완성되었다. 터키 전역에 산재한 노천극장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관중 약 2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극장이다. 3단 구조이며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있다. 사도 바울이 선교중  은세공장이들과 논쟁이 붙었던 곳이라 한다. 196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피온산의 서쪽 기슭을 이용해 지은 이극장은 기원전 100년경에세워졌는데 처음에는 현재 보는것보다 월씬규모가 작았던것으로 보이며 서기1세기에 대대적으로 증축된것으로 보인다 AD 2세기 초에 로마시대에 완공되었으며, 지금도 공연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이무대에 서기를 원하고 소리의 울림을 과학적으로 설계하여 건축을 했기때문에 지금도그어떤 공연장보다 소리의 울림이 좋다고 한다 건축 초기에는 공연을 위한 곳으로만 이용되었지만 이후 로마제국의 유행(?)에 따라 검투사 혹은 맹수와의 결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구레데스 거리에서 쉘수스 도서관과 아고라를 지나며 가이드가 물었다 어느분이 노래 잘하는 분 계시면 귀뜸해 주세요 고대 극장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요 지금도 세계 유명 가수들이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니까요. 나는 도암을 주저 없이 추천하였다. 그의 성량은 어느 가수에 못지 않았기 때문인데 허나 그들 부부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할수 없이 가이드는 대극장 중앙에 서서 합창으로 만남을 부르게 하였는데 도암이 베이스로 빽을 넣어주니 멋진 하모니가 되었다 이에 같이 간 일행들이 도암의 독창을 열열히 청하여 박수를 치고 있었다

 

 

드디어 도암이 아리아가 시작된다 했더니 아쉽게도 도중하차 하고만다 이에 사람들이 평보보고 노래하라 청하여 우리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열창하였다. 그리하여 주변에 있어 관중이 된 외국인 관광객들의 환호와 엄지척 박수를 받았다

고대 대극장 주후 41년에 착공하여 117년에 완공된 그러니까 완공해로부터 1894년이 흐른 2011년 이 무대에서 내가 독창으로 노래를 부른 것 이다 몇십분의 자유시간을 얻어서 객석 의자에 앉았는데 의자 갈고리 모양 앞쪽이 휘게 만들어 졌는데 이것은 사운드가 휘몰아 극적인 효과를 낸다고 하였다. 저기 극장 가운데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렸던 고대 인 들의 사투와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아 영화 커크다그라스 주연의 스팔타쿠스가 셍각났다.

 

 

스파르타 쿠스로 분한 커크 다그라스

 

 

노예군단

로마군단

 

 

대격전

 

처형

 

검투사(劍鬪士)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말기에 이른 로마 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73년 카푸아에서 일어나 71년 훗날 삼두정치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크라수스가 이끄는 진압군에 패해 모조리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한때 이들 반란군은 정예 로마군단을 연파하며 12만 명에 이르렀으나 내부 분란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결국 6,000여명의 노예가 포로로 잡힌다. 그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져 아피아 가도 양편에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된다

 

 

 

 

 

 

 

 

 

 

검투사(劍鬪士, 라틴어: gladiatōrēs)는 고대 로마 때 경기장에서 사람이나 야생 동물, 범죄자 등과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직업적 전사를 말하며, 검투 경기는 이들 검투사가 벌인 스포츠 경기였다.

검투사의 어원

 

로마 시대 검투 경기는 수도 로마뿐만 아니라, 로마 공화정과 제정에 걸쳐 제국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이 말의 어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채택한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에서 유래했다. 검투사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기원전 73년에 발생한 노예들이 해방을 위해 로마 공화정를 상대로 싸운 계급투쟁인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주도했던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였다.

 

검투사의 세계

 

격투기가 직업인 사람들

검투사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검투사는 노예로서 멸시당했고 힘든 환경에서 훈련되었으며 죽음에 있어서 조차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그들은 관객들에게 로마의 무술 윤리를 제공했고, 대중의 관심을 받게 하였다.

 

학교

1세기경에는 이미 검투기는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이었으며 여러 학교와 검투 스타일이 존재했다고 한다. 싸우는 스타일은 보통 전투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무술 대련에 가까운 것으로서 실제 검투 경기 중에는 서로 상대방의 스타일을 알고 싸울 수 있도록 같은 학교의 검투사를 대련시켰다고 한다.

 

규칙

 

검투사가 반드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은 아니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시기에는 이미 죽기까지 싸우는 검투 경기는 아주 드물었다. 특별한 경우 있는 죽음에 이르는 경기는 따로 “sine missione”라고 부르고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심판이 경기를 계속 시켰으나, 일반적으로는 한쪽 검투사가 어느 정도 부상을 입을 경우 관중들이 “habet, hoc habet”(그는 당할 만큼 당했다)라고 말하면 끝내거나 심판의 판단으로 시합을 중단시켰다.

 

보상

 

그러나 관중들이 패배한 검투사의 죽음을 요구할 경우, 검투사의 소유주의 재량에 따라 죽음을 용인하기도 했다. 이 경우 죽은 검투사의 가족에게 소유주가 일정액의 보상을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보상비가 오늘날의 비용으로 약 10억 원 정도에 해당하여 자칫 밑지는 장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검투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하며, 죽음은 대부분의 경우 사고사였다고 한다.

 

검투경기의 금지

 

검투 경기는 4세기 말경까지 계속되었다. 서기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검투 경기를 금지시키는 법령을 통과시켰으나, 실제로는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검투경기를 몰락시킨 것은 시대적 변화였다. 검투기에 대한 관중의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살인을 금기시하는 기독교가 계속 세력을 늘리는 관계로 검투 시합을 해서 버는 수입도 계속 감소하여, 마침내 399년이 되면, 호노리우스가 제정한 검투기 금지령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로마 시내의 검투 경기는 404년에 있었고, 440년에는 로마 제국의 기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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