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기

에베소의유곽 터키여행46부

이모르 2021. 4. 2. 09:02

첼수스 도서관앞 광장에서 감격하게 된다 아우그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가 해방될때 감사의 마음으로 세운  마제우스 문 뒤에 있는 아고라 에선 씨끌 씨끌 여러 사람들이 논쟁하는 소리가 들려올것 같은 기둥이 서있고 생선이며 아데미 신상을 파는 은세공업자 들이 외처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광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유곽에 대한 이야기다

아고라에서 토론하고 생필품 구입하고 첼수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유곽으로 향한것인가?

정중앙 비밀통로는 유곽과 연결되어 은밀하게 왕래하던 통로이다.

정중앙 비밀통로는 유곽과 연결되어 은밀하게 왕래하던 통로이다. 첼수스 도서관 건너편에는 유곽이 있어서 뱃사람들이나 귀족들이 즐겼다 한다, 몇달 몇년을 기다린 부인을 피하는 뱃사람 이라던지 귀족들은 체면상 지하통로로 기다싶이 하여 유곽에 갔다고 하는데 정중앙 하단 통로가 지하 통로 입구이다  

 

위의 건물들은 사랑을 파는  유곽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는데 그 옛날에는  사창가의 집은 거리에서 가장 번화한곳에 기거를 하면서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를 돈을 받고 파는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에페스 유곽 입구에 음각된 발의 크기에 못미치는 사람은 미성년자로 출입을 제한했다한다 맞은편의 유곽 건물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20만명의 도시인 다양한 인종들이 저마다 직업에 종사 하면서 생활하는데 그중 한부분이 몸을 파는 여자들도 있었으니 오늘날 거리의 여인들의 역사는 오래 전부 인가 싶다.

폼페이의 유곽에 그려진 벽화
폼페이 창녀들의 침실

폼페이 창녀들의 침실 로마 폼페이 유적중 사창가의 침실에 쓰여진 낙서중엔 “세금이 너무 비싸다” 라는 문구도 있다 하는데  원래 유목민이었던 로마인들은 그리스 를 비롯한 주위 문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로마에도 매춘이 성행했는데 매춘부는 대개 두계층이 있었는데 하층은 현재의 매춘부와 같이 극장이나 경기장 주의에 기거하며 지나가는 남자 들을 유혹했고 고급 매춘부들은 귀족이나 상류 계급의 군인 과 부자들을 상대 했는데 그리스의 매춘부에 비하면 지적 면에서 훨씬 뒤졌으며 그만큼 사회의 인식도 낮았다.한다 로마 사회는 성인이 소년을 유혹하는 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으며 소년들도 그것에 항의하지 않는 이른바 동성애가 묵인되던 사회였다. 그리고 이런 사회 에서 혼인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처럼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스킨 섹스나 정열적인 관계.엄숙한 부부의관계. 가 구분 지어  보아야한다. 고대로마 시대에는 공창이 주요세원으로 떠올라 당국의 보호 받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는 영주나 교회의 인가 형태로 공창이 유지됐는데 교황 율리우스2세. 레오 10세. 클레멘스7세 등도 매음업을 허가 했다  한다.

데일리 메일지에 의하면

로마 지배하였던 영국 버킹햄지방의 햄블던에서 발굴한 97명의 유골은 이들 모두가 엄마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한다.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어린이 유골이 집단으로 쏟아져 나온 현장은 옛 창녀촌이며 끔직한 영아살해 이유는 영국을 점령한 로마 군단의 병사 들에 의해서 임신한 창녀들은 당시 피임이나 낙태에 대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정복자들을 접대했던 창녀들이 원치 않는 아기가 태어날 경우 즉시 죽여서 창녀촌 안 집단 매장지에 묻었다한다.

 

사진출처:데일리 메일

아이들이 여러 이유로 죽었다면 나이가 제각각 달라야 하는데 한결같이 출생 직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고대 로마의 법률인 로물루스 법에서 보면 전쟁과 정복을 위해 남성의 힘을 많이 요구되었고 그런이유로 로마의 모든 시민은 첫딸만을 양육할 수 있어서 나머지 여아는 계곡에 버리는 등의 전쟁을 위한 식민지배를 위해 남성만을 키웠고 교육또한 남성에게만 우선권이 있었다. 당시 로마의 법은 2살미만의 영아의 경우 생사여탈권은 아버지가 결정하는데 특히 아이가 기형이면 당연히 죽게 했다 기원전 1세기 한 로마 시민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보관되어 있는데 “아직 알렉산드르에 있소 아기를 잘 돌보시오 월급은 나오는대로  집에 보내겠소 한가지 아기를 낳아 아들이면 살리고 딸이면 버리시오“  그리스의 문화를 부러워 했던 로마는 창녀에 까지도 차이가 많았다

프랑스작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배심원 앞에 선 프리네"

두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보자

그림에서 프리네는 수치심에 얼굴을 가리고 있다  기소자 에우티아스 는 맨왼쪽 앉아 있는 사람인데 변호인 히파리데스 가 프리네를 싸고 있던 천을 벗기는 순간 에우티아스 보지못하게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다 너는 볼자격도 없다는 듯이

 

1예)는 우리나라 황진이 닯은 수준높은 그리스 창녀이야기다 기원전4세기 그리스에 헤타이 라불리는 직업매춘부가 있었다. 헤타이라는 직업여성들의 자격은 첫째가 빼어난 용모와 탁월한 몸매외에 어디를 가서도 우아하게 보일 교양과 예법 그리고 섹스 테크닉이 있어야 좋아했다 그당시 최고의 유명 헤타이는 아프로디데 의 모델이 될정도로 아름다운미모를 갖추고 있어 아데네의 남자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프리네 였다 그를 원하는 많은 남성들이 유혹의 구해가 많았으나 그러나 자존심 강한 그녀는 눈길한번 주지않았다 그에 자존심이 상한 사람들중 하나인 에우티아스가 그녀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했는데 그 기소 내용은 “에리우시스”의 신비극을 하면서 전라로 출연하여  신성을 모독했다는것이었다  그녀는 법정에 출두하여 배심원들 앞에 섰다  변호인은 연인으로 당대 최고의 웅변가이며 연설가인 히파리데스 였다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하여 변호인은 결심을 하게 된다 배심원들 앞에서 프리네의 전라를 보여주기로 한것이다.

 

그림에서 가림천을 벗기는 변호인 히파리데스는 “신에게 자신의 모습을 빌려줄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프리네를 죽일수 있겠는가?”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할정도로 완벽하다“ 고 외쳤다. 이에 넘어간 배심원들은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이 만든 법은 효력이 없다며 무죄를 평결했다

 

귀스타브 모로 1874- 메살리나

귀스타브 모로 1874- 메살리나

나는 손으로 만지는 것이나 눈으로 보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내가 보지 않은것.내가 느끼는 것 뿐이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모로 그의 미술에 대한 철학을 대변하는 마치 상징주의의 모토와 같은말이다

2예는 스스로 음욕을 못이겨 창녀생활을 한 메살리나 이야기다 메살리나 발레리아 는 로마4대 황제 클라우디스의 3번째 부인이었다 그의 방탕한 행실은 훗날 타키투스.카시우스 디오.수에토니우스 같은 역사가들에 의해 공개 되었는데 풍자가 유베날리스는 황후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이렇게 개탄했다. 황제가 잠들기가 무섭게 매살리나는 가운을 걸치고 황금 가발을 쓴 채 여자 노예를 데리고 황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악취가 감도는 사창굴의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메살리나는 로마에서 가장 천한 곳 매음굴에서 “뤼키스카” 라는 가명으로 창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지나갈 때마다 황금 가루를 바른 젖꼭지를 내밀며 유혹한 후 몸을 팔았다 밤새 육욕을 채운 후에도 만족할 줄 몰랐던가 동이 틀 무렵 내키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돌려 몰래 궁전으로 되돌아 왔다. 메살리나가 몸을 판 매음굴은 로마에서도 천민들이 찾는 화대가 가장싼 곳으로 신분을 속이고 비천한 남자들과 변태적인 성 행위를 즐겼다 그런 그녀가 원로원의원이며 집정관인 가이우스 실리우스 와 사랑에 빠져 황제를 음해 하려다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 두가지 사례를 보아 그리스의 창녀들과 로마의 창녀들을 비교하면  모든면에서 질적으로 열등한것은 로마의 창녀들이다 

 

네로와 함께 있는 어머니 아그리피나

 

3.에는 황실의 성문란

메살리나와 경쟁상대 였던 네로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이야기다 아그리피나는 로마황제 칼라쿨라(재위37-41)의 누이동생이자 폭군네로의 어머니이다 14살 때 친오빠 칼라큘라와 관계를 갖고 2번째 남편 “아헤노바르부스라”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네로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3번째 부인 메살라나가 암살당하자 숙부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결혼하고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황제를 독살한다 네로는 황제가 된후 어머니의 정부 파큘라스를 추방하는데 이에 격분한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네로에게 저주를 한다.

점점 자기에게 가해오는 아들 네로의 압박에 겁이난 어머니는 네로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성의 포로로 삼았다. 백주 대낮에 벌리는 모자의 추행을 보고 환관들은 놀라워 했다

그들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네로의 싫증으로 오래가지 못하였고 이윽고 어머니를 시해하고 만다.

 

젊은 황제와 그의 모친 아그리피나(Agrippina)가 새겨진 금화

4.예 는 폭군 네로 이야기다

레로는

55년 이복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59년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62년 아내 옥타비아 를 죽이고

65년 자기의 스승이었던 로마철학의 대표주자 세네카를 죽였다.

64년 기름 창고의 사고가 원인인 9일동안 계속된 로마대화재로 잿더미만 남게된

로마시민들은 “황제가 방화하고 튜터를 키고 노래하였다” 는 소문으로 황제를 증오하기

시작했다이에 네로는 시민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름다는 강박관념에 기독교도 들에게

방화죄를 뒤집어 씌워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갑자기 최포된 기독교인들은 잔인한고문과 네로가 보는앞에서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산채로 사자 밥이 되게 하였다 오히려 군중은 기독교도 들에게 동정심이 들게되서 네로가 방화했을 거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원로원에서 국가에 해로운 인물이란 판결로 자살하고 만다.

 로마제국의 5대 황제 네로(Nero)

(서기37년-서기68년)는 로마를 폭정하여 크리스트교를 박해로 성 베드로.

성 바울 같은 사도 들을 죽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여장하여 해방노예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신부가 되기도 하고 거세시킨 미소년을 여장시켜 황후로 맞이하기도 했다 자기 자신이 여장하여 해방노예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신부가 되기도 하고 거세시킨 미소년을 여장시켜 자기 정실(황후)로 맞이하기도 했다. 이렇듯 물란한 군중의 타락을 에베수스의 대극장에서 은 세공업자들 부터 돌팔매를 받은 사도 바울은 로마권의 상황을 이렇게 질타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로마서 1:26-27)

고대로마 시대 공창에서 실제 사용되었던 동전을 보면 오늘날 포르노

영화 빰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