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기

콘스탄티노풀최후의날(터키여행58부)

이모르 2021. 4. 3. 23:14

 

 

 

콘스탄디노풀 공방전 최후의날 명언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 도시에서!”

- 지원군 소식을 찾으러 나갔던 베네치아 선박의 선원들 중 -
스스로를 베네치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자들아, 무엇보다도 기독교도로서의 의무를 다 하자. 전투가 시작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지마라. 위치를 벗어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 공화국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 베네치아 공화국 바일로 지롤라모 미노토 -

 

 

 

우리를 배려해준 술탄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오하지만 이 도시를 넘겨줄 권한은 나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소. 우리는 강요가 아닌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음을 결심했고,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 

항복을 권하는 술탄의 최후통첩에 대한  스탄티노스 11세의 대답

 

이교도 의 창검으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제국을 지킬수 있도록 주님께 빌어주소서 모든걸 주님께 바치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당신 품안에 거두어 주소서

 

 사람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은 네 가지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 콘스탄티노스 11 -

 

 

 

내 아이들아, 용기를 잃지 말거라. 우리는 우리가 주인인 이 도시에서 넘치는 부귀와 경이로운 영광을 누리다가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목숨만이 남았지만 그 또한 영원할 수 없다. 때늦은 후회지만 황제 폐하와 우리에게 소중했던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그 날 죽어야 마땅했다. 더는 죄짓지 말자. 악마가 활을 우리에게 겨누고 있다. 사랑하는 로마인의 아들들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이름으로, 우리 또한 죽어 그분에게로 가자.”   

 - 루카스 노타라스-

    

 

 

자신감에 도취된 투르크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변 하인들 중 누군가가 내 수박을 훔쳐갔다. 범인을 잡아야 하니 모든 하인들의 배를 갈라라.”, (루카스 노타라스)의 아들이 외모가 출중하다고 들었다. 내게로 데려오라.”  - 투르크 술탄 메흐메트 2 -

 

 

 

콘스탄티노플 함락

콘스탄티노플은 330 5 1일에 창립자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전까지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리우던 도시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 같습니다.지중해 일대에서 큰 세력을 자랑하던 비잔틴 제국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기독교 세력과 동방의 이슬람교 세력에 의해  그 영토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한 때 서로는 지브롤터 해협, 동으로는 페르시아와의 경계지역, 북으로는 이탈리아에 접한 알프스 산맥, 남으로는 나일 강 상류에 이르던 영토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1204년의 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일시적이지만 제국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라틴 제국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60년 만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제국을 재건하기는 했지만 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일어나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던 오스만 투르크족이 강력한 적으로써 등장하게 됩니다.계속 세력을 확장한 투르크는 1354년에는 유럽의 끄트머리라고 할 수 있는 갈리폴리를 점령하게 됩니다.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서구 해양국가인 베네치아나 제노바는 당시 서구에서 벌어진 내분에 휩쓸려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고 비잔틴 제국은 자력으로  반격할 능력조차 상실한지 오래였습니다.

 

이후 투르크의 발칸지방을 향한 진공은 계속 되게 됩니다. 1362년에는 아드리아노폴 리가 1363년에는 필리포폴리가 점령되면서 트라키아 지방은 완전히 투르크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1365년 투르크는 수도를 아시아의 부르사에서 유럽의 아드리아노폴리로 옮기면서 서정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트라키아 지방과 인접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비잔틴 제국은 투르크에게 연공금을 바치게 됩니다. 하지만 투르크의 서정을 그칠 줄 모르고 1385년에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함락, 1387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테살로니카 까지 함락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의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이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누엘2세는 직접 서구에 가서 투르크에 맞서  위한 원군의 파견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1402. 술탄 바예지트가  이끄는 투르크의 대군은 소아시아의 앙카라에서 칭기즈칸의 몽골군에게  괴멸 당하게 됩니다.

 

술탄까지 포로가 되어버린 패배는 바로 투르크 궁정에  내분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20여년간 평화가  계속되게 됩니다. 하지만 20년 후 다시 세력을 키운  투르크의 공격에 비잔틴 제국과 다른 나라들은 다시 연공금을 바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술탄 무라드2세는 정벌보다는 내정에 힘써서 그후로 거의 30년간 대규모 군사행동은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1451년 술탄 무라드2세가 마흔일곱의 나이로 죽  그의 아들 메메트2세가 술탄이 되면서 상황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집념.메메트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비잔틴 제국이나 오리엔트 여러 나라들과의 우호 조약을 재확인하고  제노바나 베네치아와의 우호통상조약도 재확인 해 줍니다.

 

거기에다 세르비아 왕의 여동생으로서 술탄의 하렘에 헌상되었던 마라를 고국으로 되돌려주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하지만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에도 불구하고 메메트2세가 즉위한 후 불과 한 달만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사절을 서구에 보내게 됩니다하지만 원군 파견 문제는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재합동 문제가 결부되어 해결이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1452년 메메트2세는 인부들을 모아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 쪽 연안에 요새를 짓습니다.

 

유럽의 성이라는 뜻의 '루멜리 히사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요새는 건너편 연안에 세워져 있는 아시아의 성이라는 뜻의 '아나돌루 히사르'라는 이름의  요새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배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 즈음 우르반이라고 하는 헝가리인이 메메트2세를 찾아와 자신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파괴할만한 강력한 대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흥미를 가진 메메트2세는 이 헝가리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 대포를 만들 것을 명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3중으로 이루어져서 지중해 세계에서도 가장 견고하다고 일컬어지는 성벽입니다.) 한 편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 출신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오가면서 동서합동에 노력하던 이시도로스는 교황 니콜라우스 5세에게서 군자금을 받아 제노바 배 한척과  키오스에서 제노바 용병을 모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됩니다  제노바용병은 용병인 만큼 가격이 비싸서 200명  정도를 고용했을 뿐이었습니다.동서교회의 합동이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12 12일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동서교회의 합동 성립을 축하하는 미사가 거행됩니다.

 

하지만 수도사들과 서민들의 반발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리스 정교회 대표들은 합동을 기록한 문서에의 서명을 거부했고 일반인들은 합동 미사를 거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회인  성 소피아 대성당에는 발길을 끊어버립니다.

 

 

박물관으로 변한 비잔틴 대성당 소피아

 그러던 중 1452 11 26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던 베네치아의 선박이  루멜리 히사르에서 발사된 포화로 격침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베네치아의 대사 미노토는 술탄에게 사자를 보내 승무원들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하고 12 8술탄의 명에 따라 선장은 말뚝에 박혀 죽고 다른  승무원들 전원은 몸통이 둘로 잘려 죽는 형에 처해집니다.

 

우호조약이 체결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한 것에 베네치아는 투르크와의 우호관계가 위태롭다고 판단합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각국의 상인 사이에서는 동요가 일어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황제와 협력해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로 결정합니다. 해가 바뀌고 1453년 헝가리인 우르반은 대포를  완성하게 됩니다.

 

비잔틴 성벽 현재모습 전투 당시 붕괴한 성벽

 

'우르반의 거포'라고 불리우는 이 대포는 그 당시에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그 위력 또한 엄청났습니다. (당시는 폭발하는 포탄이 아닌 커다란 돌덩이를 발사했습니다.

그러니까 낙하할때의 힘으로 성벽 등을 부수는 것입니다.)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연공금을 바치겠다고 제의했지만 메메트2세는 전면 항복을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측은 단합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황족이자 재상인 노타라스 같은 사람은 '교황의 삼중관을 보느니 콘스탄티노플이 터번으로 뒤덮이는걸 보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베네치아인은 베네치아인 대로 그리스인들을 경멸하고 있었고 그리스인은 그리스인 대로 베네치아인들을 싫어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또한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에 거류구를 이루고 있는 제노바인들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고 이는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인 모두에게 증오의 대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육군 총지휘관은 제노바인인 주스티니아니, 해군 총사령관은 베네치아인인 트레비사노였고 병력은 육군 병력이 그리스인 4713, 서구인 2천명. 도합 7천명 정도였고 해군 병력은 제노바 대형 범선 5, 베네치아 군용 갤리선 및 좀 더 대형인 상용 갤리선 5, 크레타의 상용 갤리선 3, 이탈리아 해항도시 앙코나, 스페인의 카탈루냐, 프랑스 프로방스의 범선이 각각 1척씩 3, 비잔틴 국적선 10. 도합 26척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력은 역시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10척이었습니다.한편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2세는 연공금을 바치는 기독교국으로부터  소아시아의 반군을 친다는 명목으로  지원을 요청한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원군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참여하게 됩니다.

투르크군의 병력은 총독 이샤크 파샤의 지휘하에  아시아로부터 온 아나톨리아 군단 5강제로 징병되거나 속거나 약탈에 눈이 멀어 지원한 부정규병 5, 카라쟈 파샤가 지휘하는 유럽군단 5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 군단 15천 등  거의 17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1453 326일 투르크군은 아드리아노폴리에서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위한 출진을 시작합니다. 전쟁 전야.1953 4 2일 비잔틴 제국은 투르크의 해상으로부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사슬을 콘스탄티노플 쪽 성벽의 탑과 금각만 건너편에 있는 제노바의 갈라타  거류구의 탑에 연결합니다.

 

이스람거점 루멜리성

 

해상에서의 전투력은 제노바나 베네치아가 투르크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지만 수로만

따지면 열배나 되는 투르크군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생각해 낸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체제를 살펴보면. 콘스탄티노플은 가장자리가 약간 둥그스름한 삼각형의 반도 위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그 삼각형의 밑변, 즉 마르마라 해에 접해 있는 쪽은 바닷가라는 것 이외에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내려오는 심한 조류와 북풍의 영향으로 비잔틴 제국이 생긴 이래 1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번도 공격을 받은 적이 없는 지역입니다.

 

 

우르반 거포

 

이곳에 배치된 것은 추기경 이시도로스와 그가 데려온 병사 200명이 맡았습니다.

그보다 남쪽은 스페인 영사 펠레 프리아가 이끄는 카탈루냐인들이 더 남쪽은 투르크의 망명왕자 오르한과 그의 부하들이 맡았습니다. 하지만 금각만 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흘러드는 조류의 사각지대였고 북풍 역시 마르마라 해 쪽과는 비교도 안되게 약한 지역이었습니다.

 

 

비잔틴 역사에서 콘스탄티노플이 유일하게 정복된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도

이곳을 공격한 십자군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 갈라타와 연결된 쇠사슬이었습니다. 해양방어의 주체는 베네치아였기 때문에 선착장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 성벽의 방위는 베네치아가 맡았습니다. 재상 노타라스는 귀족들을 이끌고 라틴인 방어 지역에서 황궁까지의 성벽을 맡았습니다.하지만 투르크의

주 공격로는 나머지 한쪽 면. 바로 육지에 면해 있는 지역이 될 것이었습니다.

 

 

비록 황궁 주변만 한 겹이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삼중 성벽이긴 하지만 그것만을 믿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황궁을 둘러싼 한 겹의 성벽을 지키는 이들은 대사 미노토 지휘하의 베네치아인들, 그보다 남쪽으로는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이끄는 제노바군 500, 뤼코스 협곡이 있어서 더욱 낮아지는 지점., 메소티키온 성벽으로 불리우는 지역은 황제가 친히 그리스  정예병을 이끌고 지키게 되었습니다.

 

 

 다시 더 남족 다시 지형이 높아지는 지역은 그리스인, 베네치아인, 제노바인 각 부대가 각각 하나씩의 성문을 중심으로 방위를 맡았습니다.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의 삼중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 4일의 일이었습니다. 투르크군의 배치는 콘스탄티노플의 육지쪽 성벽 앞을 나눠 남쪽 끝에서 뤼코스 협곡에 이르는 구간은 이샤크 파샤의 아나톨리아 군단이, 거기에서  북쪽으로 협곡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지대, 성 로마누스 군문을 중심으로 하는 구간에는 술탄의 본진과 할릴 파샤가 이끄는 투르크 기병과 예니체리 군단이, 이보다 더 북쪽, 카리시우스 문에서 황궁을 돌아 금각만까지 이르는 구간은 카라쟈 파샤의 유럽군단이, 그리고 부정규군단은 두 군단의 배후에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금각만 북쪽에서 보스포루스 해협까지의  갈라타 언덕, 즉 제노바 거류구 외곽에 해당하는 지역은 각 군단에서 차출한 병사들로 구성된 자가노스 파샤의 군단이 배치되었습니다.4 4성벽 앞 4킬로미터 지점에 포진한 투르크군은 그 다음날 술탄의 명에 따라 성벽 앞 1.6킬로미터 앞에 또 그 다음날 역시 술탄의 명에 따라 성벽 앞 400미터 앞에 포진합니다처음 메메트2세는 비잔틴 측이 가지고 있는 대포에 의한 포격 때문에 4킬로미터 밖에 포진했지만  그것이 기우라는 것을 알고 더 성벽 가까이 포진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굳이 두 번에 걸쳐서 포진을 한 것은  부하들에게 술탄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투르크 군의 포진에 비잔틴 측은 투르크의 공격이 뤼코스 협곡이 가장 낮아지는 점, 즉 성 로마누스 군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주력이 집중 되리라 예상하고 육군의 총지휘를 맡은 주스티니아니가 휘하 병사 500명과 함께 황제의 그리스 정예와 합류하여 이곳을 방위하게 됩니다또한 공백이 생긴 지역은 베네치아 부대가 메우게 되었습니다. 4 8일 드디어 투르크군은 대포를 설치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방위측은 외성벽 10미터 지점에 있는 방책을 보강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제 방책 바깥편에 가죽과 양털을 쑤셔넣은 주머니를 늘어 세워 조금이라도 충격을 완화시키려 하였습니다. 또한 투르크 해군의 마르마라 해 북상중이라는 소식에 4 9일 금각만 입구에 펼쳐진 쇠사슬 안쪽으로 제노바의 대형범선 5, 크레타 선박 3, 앙코나 선박 1, 비잔틴 선박 1, 합계 열 척이 수비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금각만 안 콘스탄티노플 쪽 선착장에는 기동대로서 베네치아 갤리 군선 2, 역시 베네치아의

상용 대형 갤리선 3, 비잔틴의 갤리선 5척 등이 기동대로서 대기하였습니다.

 

4 11일 해군 제독 발토글루가 지휘하는 투르크의 함대가 마르마라 해를 지나기 시작했습니다. 투르크 해군 병력은 갤리선 12, 대형선이 70내지 80, 수성선이 20내지 25, 나머지는 소형선으로 모두 합쳐서 145척이었습니다. 도착한 투르크 함대는 보스포루스 해협 출구에서 약간 들어간 쪽 그곳만 운좋게 조류나 북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원주라 부르는 해역에 정박했습니다. 이즈음 투르크군의 대포 설치 작업도 완료되었습니다대포는 황금문 앞에 2, 페가에 문 앞에 3, 성 로마누스 군문에 4, 황궁 앞 칼리가리아 문에 3, 합계 12문이 설치되었습니다.전초전4 12. 처음으로 투르크군의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수비군측은 탄환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만든 가죽이나 양털을 쑤셔넣은 주머니는 아무 쓸모도 없었습니다. 대포를 발사하는 투르크군도 대포의 조작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한번 발사할때마다 대포는 크게 요동칠 뿐만 아니라 토대에서 굴러떨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특히 거포는 더 조작이 어려워서 하루에 일곱발을 발사하는게 고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곱 발의 포탄이 준 피해는 다른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들이 준 피해를 다 합친 것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투르크군의 대포공격과 동시에 해상에서도 투르크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투르크 함대는 방어 사슬 돌파를 위해 기지에서 나와 금각만 입구를 향해 들이닥쳤습니다. 방어측은 트레비사노의 지휘로 방어 사슬을 따라  선박의 벽을 만들고 대기중이었습니다.

(여기부터는 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한부분을 대신)(투르크 사수들이 이를 향해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었다.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 동쪽 성벽에 빽빽히  들어앉은 투르크의 대포들도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투르크 군선들은 기독교도 선단에 접근하자마자 불붙인 나무들을 던져댔다. 갈고리를 매단 밧줄을 던져 배를 끌어당겨서 올라타려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실패로 끝났다. 포탄은 거리가 너무 멀어 미처 배에 닿기도 전에 바다로 떨어져 물보라를 튀기거나 자기 편 선박을 격침시킬 뿐 전혀 쓸모가 없었다.

 

불붙은 나무 때문에 일어난 불은 선원들 익숙한 방화작업으로 곧 진화되었고, 화살도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서구측의 대형선은 투르크의 선박보다 훨씬 높았고, 그 높은 돛대 위의 망루에서 내리 꽂는 화살의 명중률이 훨씬 높았다. 해전의 경우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해양국가 세력이 경륜에서나 능력에서나 투르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실제로 투르크 함대는 공세를 취하려고 방어사슬을 벗어나 외해로 나간 기독교  해군에 포위되어 전멸하는 것만은 면하기 위해 허둥지둥 기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해전의 패전에 메메트2세는 대포의 개량을 명했고 이로 인해 며칠 후 방어사슬 밖을 회항중이던 선박 한 척을 명중시키게 되자 기독교 함대는 그 이후로 자유로이 방어 사슬 밖을 왕래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4 18. 일주일에 걸친 포격으로 외성벽은 굉장히 큰 손상을 입었고 특히 메소타키온

성벽 일대의 손상은 거의 치명적이었습니다. 또한 주변의 외호도 투르크군에 의해 거의

메워져버렸습니다. 일몰 후 두 시간이 지나자 투르크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수의 투르크군이 성벽에 매달렸지만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꺼번에 많은 병사가 투입되어 투르크군의 움직임을 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네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투르크군이 먼저 병사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투르크군의 전사자는 자기편 발밑에 깔려죽은 사람을 포함해서 200여명. 한편 비잔틴 측은 사망자가 한명도 없고 단지 얼마간의 경상자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투르크군의 첫 번째 공세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해전의 성공과 실패그 동안 교황이 자금을 내어 조달한 무기와 탄약을 실은 세 척의 제노바 배는 강한 북풍으로 인해 에게 해에 있는 키오스

섬의 항구에 발이 묶여있었습니다.

 

세 척 모두 대형 범선이어서 역풍을 안고 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남풍이 불기 시작하자 바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해협 근처에서는 황제의 명으로 식량을 실은 그리스 배와 마주쳐서 함께 네 척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들어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해상 봉쇄로 인해 해협에는 투르크 배라고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4 20.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온 네 척의 함선들은 투르크군과 교전을 치르게 됩니다. 투르크군의 제독 발토글루는 돛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배는 제외시키고 나머지 모든 선박을 이끌고 출전했습니다.

 

정오 무렵, 투르크 함대가 북상중인 네 척의 선박을 막아 섰습니다. 하지만 북쪽에서 흘러오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류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투르크 선박은 조종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네 척의 배는 이를 무시하고 북상을 계속했고 투르크 선박들 역시 이를 뒤쫓았습니다.한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네 척의 배가 곶 끝머리에 접근해 이제 왼쪽으로 돌아서면 금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순간에 바람이 멎어버렸습니다.

 

이에 네 척의 선박은 조류에 밀려 더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투르크 함대는 이를 쫓았습니다. 네 척의 배는 바로 닻을 내리고 전투 태세를 취했습니다. 압도적인 수의 투르크 함대는 수로 밀어붙였지만 결국 네 척의 함선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도 못했고 그들이 금각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도 못합니다.

100여척의 투르크 배가 네 척의 배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해전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메메트2세로 하여금 해군력의 열세를 한번에 만회할 만한 방법을 생각해 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육상을 통해 함대를 금각만 내로 진입시키는 일이었습니다.

4 22일 정오 무렵. 육상을 통해 이동해 온 투르크 함대가 금각만 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4 23.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의 작전회의 때 베네치아 함대의 선장 코코의 소수 정예로 야습을 가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어 다음날인 24일 결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노바 인들이 이 사실을 알아버렸고 그들은 자신들도 야습에 동참시켜줄 것을 요구합니다. 어쩔수 없이 이를 수락하고 바로 야습을 하려 했으나 제노바 선원들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나흘 뒤인 28일로 결행을 연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 갈라타 거류구에 사는 제노바인들 중 술탄과 내통하는 사람이 계획을 알고 투르크 측에 정보를 제공합니다.4 28. 예정대로 야습은 시행되었고 결과는 참패. 선단 맨 앞에 있던 선장 코코의 쾌속선은 대포에 맞아 격침되었고 나머지 네 척의 배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비잔틴 측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뱃머리를 돌려야했습니다. 격침당한 코코의 배에 타고 있던 승무원 중 40명이 투르크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던 연안까지 헤엄쳐 갔지만, 메메트2세는 이들을 육지 쪽 성벽에서 훤히 보이는 곳까지 끌고 나가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이에 비잔틴 쪽도 시내에 잡혀있던 투르크인 260명을 성벽 위에 늘어 세운 다음 하나하나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야습의 실패로 인해 갤리선 한척과 소형 쾌속선 한척, 그리고 숙련된 선원 90명 가까이를 잃었고 투르크 함대는 더욱 수비를 견고하게 하며 금각만 안에 둥지를 틀게되었습니다.

 

4 31. 메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 성벽과 금각만 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 앞 해상에 부교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이는 500미터 정도에 폭도 병사 다섯명이 나란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부교였습니다. 게다가 부교 군데군데에 옆으로 돌출한 대를 만들어서 여기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로 인해 갈라타 지구의 자가노스 파샤군과 이원주에 정박한 투르크 해군 본대 간의 연락이 훨씬 더 쉬워졌고 부교 위로부터 금각만 쪽 성벽으로의 포격이 가능해졌습니다. 비잔틴 측은 지금까지 금각만의 제해권을 쥐고 있어서 마음놓고 소수의 수비병만을 배치해 두었지만 이제는 이곳으로의 공격도 방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한편 수비측은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5 3일 베네치아 대사 미노토와 트레비사노 제독은 황제로부터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와 있을 베네치아 함대에게 급히 원군을 청할 것을 요청하고 이에 그날 밤 자원자로 구성된 쾌속선 한 척이 방어사슬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베네치아 측의 동향을 살펴보면.2 18. 콘스탄티노플에서 원군을 청하는 사신이 베네치아에 도착2 19. 베네치아 원로원 소집. 이 회의에서 15척의 갤리 군선 지휘를 위한 사령관과 부사령관을 선출합니다.2 25.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베네치아의 원군 파견을 로마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나폴리 왕, 그리고 헝가리 왕에게 통고.3. 베네치아 조선소에서 함대의 건조 및 정비 진행. 선박 정비를 위한 3천 두카토 임시지출.4 13. 원로원으로부터 알비소 롱고를 사령관으로 한 베네치아 군에 4 17일 출항하도록 지령을 하달한다. 이 내용은 '테네도스 섬에 도착하면 네그로폰투스 기지에서 오는 자코모 로레단의 함대를 5 20일까지 기다려서 합류하고 이때부터 로레단의 지휘하에 들어갈 것. 로레단은 네그로폰투스에서 이끌고 온 함대와 롱고 휘하의 본국 파견 함대, 여기에 크레타에서 온 함대 전원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할 것.'하지만 이 출항은 이틀 연기되어 4 19일에 출항하게 되고 5 20일까지 테네도스에 닿아야 하는 네그로폰투스 주둔 함대의 출항 명령은 5 7일에야 로레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또한 바로 테네도스 섬으로 가라는 것도 아닌 먼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 코르푸 섬에 가서 그곳 총독을 승선시키고 다시 네그로폰투스로 돌아와서는 크레타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대가 오면 테네도스로 향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거기에 황제와 교섭할 특사를 대동하라는 또 다른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일 등으로 인해 5 20일까지 테네도스에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롱고 함대 역시 예정보다 사흘 늦게 테네도스에 도착해서 아군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5 7. 해가 기울고 네 시간이 지났을 때, 투르크군의 2차 총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투르크군의 공격은 2킬로미터도 안되는 메소티키온 성벽에 집중 되었습니다.

 

연일 이어진 포격으로 가장 심한 손상을 입은 이 일대에 3만 명이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 맞서는 쪽은 주스티니아니 직속 제노바 병사와 황제 휘하 그리스 정예가 1천 명. 이시도로스 추기경 휘하 병사들까지 합치면 2천 명에 못 미치는 인원이었습니다.

세 시간이 넘는 격전 끝에 투르크군은 퇴각해 갔습니다. 이로 인한 방위측의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후 육상 방위군 보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결국 해군 총지휘관인 트레비사노가 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후임으로는 부관이었던 알비소 디에도가 임명 되었습니다. 5 7일 투르크군의 2차 총공격 이후 11일에 이르러 해군의 일부가 육지로 올라오면서 방위군이 보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투르크군의 3차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공격은 황궁 주변 성벽에 집중되었습니다. 병력은 5. 이전 공격으로 지친 병사들이 아닌 아나톨리아 군단과 유럽 군단의 투르크 군단이었습니다. 4시간에 걸친 혈투도 비잔틴의 수비를 깨뜨리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방위측의 피해도 커서 전사자만 해도 지난 전투의 두배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메메트2세는 지하에 갱도를 파서 성벽까지 파고 들어가 화약으로 성벽을 날려버리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투르크군에 굴착기술을 가진 자가 없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세르비아 은광에서 갱부 일을 한 자들을 이용해 갱도를 파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비잔틴 측에서 이 일을 알아채고 맙니다. 갱도를 파는 것이 발견되고 하루 만인 5 16. 비잔틴 측 기술자인 독일인 그란트가 인솔하는 그리스군은 역으로 파고 들어가 공격해서 격퇴시키게 됩니다. 또한 5 21일에도 두 번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로써 투르크 군은 갱도를 이용한 작전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투르크군은 또 거대한 공성탑을 건설하여 공격을 가해오고 이는 비잔틴 측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이에 비잔틴 군은 결사대를 내보네 공성탑을 폭파시켜버립니다. 이 두가지 일을 제외하면 방위측에게 유리한 일이라고는 없었던 5 23.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금각만을 빠져나갔던 소형선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소식은 마르마라 해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벗어나 근처 섬들을 샅샅이 뒤지며 베네치아 함대의 소식을 물었지만 함대가 온다는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농성은 벌써 50일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전설-'비잔틴 제국은 첫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세 기간에 멸망한다.''대제의 입상의 한쪽 손이 동쪽을 가리키는 것은 동쪽에서 오는 이에게 제국이 멸망한다는 뜻이다.''제국은 달이 차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5 24일은 만월이었습니다. 또 이 날 밤에 월식이 일어났습니다. 5 25일에는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받쳐들고 콘스탄티노플을 행진하다 성상이 굴러 떨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나무 위에 그려 놓은 그림 일뿐인데도 납처럼 무거워서 여러명이 힘을 합쳐서 겨우 원래 위치로 돌려 놓아야 했습니다. 5 26일에는 5월의 날씨로는 드물게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사람들은 주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이 도시를 떠남을 숨기려고 제 철이 아닌데도 안개가 끼는 것이라고 수근거렸습니다.한편 투르크 측에서도 공격을 계속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50일이 넘게 지났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건재하고 외성벽을 넘어보지도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6일의 작전회의에서 재상 할릴 파샤는 명예로운 철수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가노스 파샤의 주전론에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흘 뒤에 총공격을 행하기로 결정됩니다.

 

5 27. 이슬람의 단식이 시작되었고 28. 메메트2세는 전군에 휴식을 명합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달이 중천을 넘어서고 한시간 정도 지난 시각. 투르크군 16만이 총투입된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총공격의 선봉은 부정규군단의 5만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기세로 공격해 왔고 이들이 공격하는 동안에도 포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의 공격이 끝나고 철수함과 동시에 투르크군 정규군단 5만의 병사가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가운데에도 포격은 계속되었고 포격은 투르크 병사까지도 날려버렸습니다. 투르크군의 2차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던 비잔틴 군에 다시 한번 타격이 가해집니다. 술탄의 최정예이자 최강의 전사들이라 불리우는 예니체리 군단의 병사 15천명이 다시 공격을 가합니다.

 

2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메소티키온 성벽에 투입된 예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가 돌격하고 다시 다음 부대가 뒤를 따르는 파상 공격을 가했고 수비측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비측은 끝없이 밀려오는 적에 맞서면서도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집중공격 대상인 메소티키온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총지휘관인 주스티니아니의 제언에 의해 외성벽에서 내성벽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열쇠를 황제에게 맡겨 외성벽을 최종 저지선으로 삼았습니다. 황제 역시도 친히 검을 뽑아 들어 외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투르크 병사들을 상대했습니다. 1시간 넘게 계속된 백병전에도 투르크군은 아니 최강의 예니체리 군단도 소득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혈전은 이제 다섯 시간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적인 순간에 방위측의 총지휘관 주스티니아니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그는 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배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고 황제는 그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성벽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줍니다.하지만 주스티니아니를 따르던 용병 500여명은 패색이 짙었다고 판단. 대장을 따라 퇴각을 하려 합니다. 이를 막으려는 황제 휘하의 그리스 병사들과 마찰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알아챈 예니체리 군단은 최후의 공격을 가합니다. 이제 방위측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더니 성벽 안은 순식간에 투르크군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절망적인 형세가 되어 방위측은 금각만으로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오래 버텼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노도와 같은 투르크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보였습니다. 난전 속에서 황제는 자신을 따르던 두 기사와 함께 싸우다 죽음을 당했습니다무사히 금각만의 선착장까지 퇴각해서 배를 탈수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남은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투르크군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리거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330 5 1일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플은 1453 5 29일 투르크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이후에도 메메트2세의 서방을 향한 공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1455년 세르비아 멸망. 1456년 보스니아 점령. 1460년 펠로폰네소스의 팔레올로구스 왕가 황족들의 영토 점령. 1461년 트레비존드 함락. 1463년 레스보스 섬 함락. 1469년 네그로폰투스 점령. 1473년 페르시아군 격파. 1475년 카파 점령. 1479년 알바니아 정복. 1480년 투르크군 남이탈리아의 오틀란토에 상륙. 하지만 메메트2세는 1481 5 3일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이집트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 중에 사망하고 맙니다. 이후 그의 손자 셀림, 술레이만 대제에 이르면서 투르크 제국은 명실공히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