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독립군 최전선에서 싸웠으며 23살
약관의 나이로 의열단을 조직
倭놈들과 앞잡이를 공격 처단하여
왔던 약산 김원봉선생은 광복후
천하에 악질 독립군 잡아죽였던
외놈 앞잡이 경찰 노덕술
에게 체포되어 갖은 모욕과 고문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월북하게 됩니다
당시 일제 강점기 경찰 였던 자들이
그대로 대한민국정부수립후 경찰요직에
포진 하므로서 변함없이 애국인사들을
괴롭힙니다 반공투사로 변신
비운의 김원봉선생은 북에서도
이용당하고 청산가리먹고 자살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좌우익 떠나 그분의 탁월한 항일
투쟁은 깊히 존경 할만 합니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64회 현충일
추념식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것과
관련해 일부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김원봉에게
서훈을 해야한다'는 서명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관련 글이
올라와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중경에서 열린 1941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김원봉(오른쪽 끝)이 김구·조소앙·
신익희(왼쪽부터) 등 임정 요인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출처 조선일보 DB
그러나 당시 자유한국당과 나경원원내
대표의 적극적인 반대로 수포로 돌아
갑니다
비운의 김원봉선생 가슴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 (1898년 음력 8월 13일) -
1958년은 일제 강점기의 의열단장이자 상해 독립군
“내가 왜놈 앞잡이 노덕술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 약산 김원봉 선생(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약산의 동지들이 남긴 회고담 등을 모아보면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이 ‘감히’ 의열단장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을 모욕하고 능멸 것은 사실 같습니다.
1947년 3월22일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 화장실에 앉아 있던 선생을 체포했고,
심지어는 선생의 따귀를 때렸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노덕술이 누구인가. 두 손 두 발을 결박해서
천장에 매달아 구타하고 코와 입에 물을 들이붓는
물고문을 자행하는 등 독립투사 3명을 고문치사한
악질경찰이었습니다.
선생은 그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후 \
의열단 동지에게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고 통곡하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고 했다합니다.
약산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48년 월북합니다.
좌우합작을 추진했지만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하고 노덕술 같은 자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월북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여겨집니다.
그렇게 월북한 약산이 북한정권의
초대 검열상(감사원장)을 지냈다는 것이
독립운동 경력에 붉은 줄을 쳐놓았습니다.
2005년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독립유공자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한
약산은 독립유공자 자격을 얻지 못했습니다.
물론 약산은 한때 공산당 재건동맹에 참여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때는
장제스(蔣介石) 중국 국민당 정부 내의 골수 우익
조직으로 공산당 때려잡기가 임무였던
‘남의사’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비판이 일자 약산은 “일제 타도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이면 누구와도 손잡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미 군정의 일각에서도 “약산은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지도자”라
표현했습니다.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지론을 지닌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이즈음에 다시 노덕술을 떠올려봅니다.
1949년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된 노덕술은
‘나라에 요긴하게 쓰일 기술자’라는
이유로 풀려났습니다.
육군 헌병대장으로 변신한 노덕술은
한국전쟁 도중에 화랑 및 충무무공훈장을
3개나 받았습니다.
약산이 그 장면을 보았다면
너무도 기막힌 일이 아닌가.싶습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김원봉 친필
광복후, 1947년 2월에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친일
왜놈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김원봉은 악랄한 사상경찰 노덕술로부터
빨갱이 두목이라고 모욕을 당하고
뺨을 맞으며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김원봉은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몰라”
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7월 19일에 김원봉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여운형이
암살당했습니다.
김원봉은 좌우합작운동에 헌신했지만
친일파와 우익정치깡패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게 되고, 계속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남았습니다.
월북 후 김원봉은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
등의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를 통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반김일성 전선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1958년 11월, 김일성이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하면서
김원봉 역시 이들과 함께 숙청당했습니다.
북에서는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김원봉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애국열사능에
묻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묘소조차 없으며 지금까지도
중대역 반란 죄인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인터넷신문 후아이엠 김영수 강은실 기자
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약산 김완봉 당시 현상금은
김구 주석보다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타이완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이다.말하자면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선 것이다.
의열단 단원 단장 김원봉
창립을 함께 한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이었다.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단원 중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김익상은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또 김익상은 이종암, 오셩륜과 함께 상해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 시도하였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탁을 투척하였고,
김지섭은 일본 동경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은 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總領事館)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의열단 의 주요 의거
1.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2.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 하였다
3.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4.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5.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하였다.
6.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하였다.
7.1924년 6월 1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8.1924년6월: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배정자 이용구회장 암살 시도 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함
9.1924년 6월7일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 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0.1926년 12월 28일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노덕술(盧德述, 은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 후의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일제 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많은 독립투사를
고문 사망케 한 악질 왜놈 앞잡이었습니다
광복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공투사로 변신 수도경찰청 간부로 재직하면서.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의 이종형, 박흥식과 함께 \
주범 중 한 명입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냈고
국회의원 까지 넘보고 명대로 살다 죽습니다 .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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