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장준하 선생님 명언(베르디 개선행진곡)

이모르 2020. 12. 16. 15:42

 

1973년 12월24일 장준하·백기완 선생의 주창으로 시작된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은 불길처럼 번져 박정희 정권을 위협했다. 사진은 12월24일 서울 종로 와이엠시에이 총무실에서 장준하 선생이 서명운동 시작을 선언하는 모습(왼쪽), ‘개헌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고를1면 머리기사로 소개한 12월29일치 <동아일보>(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군중속의 고독
어느 날 한 오리가 낳은 알들이 모두 부화하였는데,  그 중 다른 새끼들과는 다른 외모의 못생긴  오리 새끼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새끼 오리들과 다른 동물들은  색이 다르다는 이유와 못생겼다는 이유로 이 미운 오리 새끼를 괴롭혔고, 어미 오리가 처음에는 부드럽게 다독여 주지만 나중에는 어미 오리마저도  새끼 오리가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고통받던 미운 오리 새끼는 무리에서 떠나고 마음씨 좋게 생긴 할머니의 집에서 살게 되지만 그곳에 있던  암탉과 고양이의 놀림을 이기지 못하면서 다시 도망쳤습니다. 다음 해에 미운 오리 새끼는 강에서 강물을 들여다보다 알고보니 출생의 비밀인 고니(백조)의 새끼임이 밝혀져 오리보다 훨씬 아름다운 고니들 무리에 합류해 살아갔다는 내용이지요 이쪽 저쪽 어딜가나 생각이 다르다는 걸로  배척 당하고 고독 하지만   이런 생각 해  봅니다 왜?  나이들었다 는 공통점 만으로 많은 사람 들이  오직 진실을 외면 할까요   

理念
어떤 것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생각이나 견해.을 달리하다"이성의 작용으로 얻어지는 최고의 개념을 말하는데요 이영훈 류석춘 지만원 주옥순  김문수 같은 사람들이 좋게 보인다 하는게  몹시도 밉게 보이는 게  미운 오리 새끼의  이성 입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나이먹어 배척 당하고 외로워 지지만 그냥  견딜만 합니다 블로그는   깨인자여 따르라 는 식으로 글 올리니 악풀이 많지만  많은 선각자들이  피압박 속에서도  正義를  지켜 가며 외롭게  죽음을 맞이  하였듯 좁은 도시속  많은 군중속의 외로움 견디며  살아 갑니다
왜  나이먹은 사람들은 모두 꼴 보수로 진실을  외면  할까요?

 

 

2020년 5월 30일  SNS 글 우라니아 님이 글을 올렸습니다  

우라니아 

북유럽 문화에는'얀테의 법칙 (Jante Law) 이란 게 있습니다.동화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는 덴마크는 UN이 발표한 인류 행복 지수에서세계 200여개 국가 중 해마다상위권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 이겠습니까?? 물론 덴마크의 이상적인 복지와 교육 시스템도  그 이유로 들 수 있지만 국민 행복의 토대에는 ‘얀테의 법 (Jante Law)’ 이라는것이  절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얀테의 법칙’'은 덴마크의 작가가 쓴 소설에 나오는 10개조의 규칙입니다. (보통사람의 법칙이라고도 함)

《보통사람의 법칙 10훈》

1. 나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2.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좋은사람 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3.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각하지 말라.
4.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하지 말라.
5.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6.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7. 내가 무엇을 하든지 잘 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9.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10.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위 열 가지는 '내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나를 남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내가 특별하다고 인정받다가  이것이 결핍되면 불행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얀테의 법칙’의 요지는  ‘'너는 평균보다낮은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라도 더 특별할 것이 없고, 모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타인에 대한 신뢰와 개개인을 존중하는 문화의 토대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평균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균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평균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 사회적 뒷받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충족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합니다. 덴마크 국민들이 행복한 이유는 결코 부유해서가 아니라  ‘'평등’' 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 공동체적인 문화가 뿌리내린 것이 그 열쇠인 듯합니다. 행복은 결국 긍정에서 태어나고, 감사를 먹고 자라며,사랑으로 완성된다는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씨리우스 

위 우라니아 글에 대체적으로 공감 하지만 우리나라의 몇몇 사람들 을 예로 든다면 전혀 다른 감정이됩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교수 며 현 이승만 학당 교장
이라는자 는 우산국도 실체가 없었다 하여 독도를 일본땅 이라는 암시를 주고위안부 들은 자발적 매춘였다 합니다   여기에 학술연구라는 명목으로 동조하는 연대교수 류석춘
그리고 광주 망언으로 낙선한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괴담을 만들어내는 지만원 아베수상님 죄송합니다 주옥순 이런 괴물들은 철저히 무시하며  내가 더 그들보다 똑똑 하며 그들 보다 나는 아주 좋은 사람 이라 생각 합니다 세상은 소수가 끌고 가는데  이런 사람들의 난동을 보고만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엘리트 친한친구들 조차 팩트체크없이  마구 지껄여 댑니다 가짜뉴스 이런말 듣고 그냥  있다면 좋은사람 일까요? 다소 소원해 지더라도 잘못을 지적합니다 싸우듯 했지만 얻은건 없어요 위 글처럼   잘났다고 착각한다 는 말 밖엔 들려올 말 없습니다 전번 대선 앞서 내글 조회가  하루 로그인한  사람만 몇천명씩 보았어요 진보의 글들 였지요 했더니 악플이 막 달리고    건강조심 하라합니다 하지만  난 절대 내글 내리지  않았어요 내가 특별하다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들의 하는짖이 너무  어이 없어요 박사  교수  면 뭐해요 나보다 영적으로 열등 한 사람들이죠 난 그들보다 똑똑 합니다 마누라는 늘 걱정으로 울며 부탁 합니다 당신 생각 옳아도 절대 논쟁 마라   친구 다  멀리 가버린다 합니다 비록 외롭더라도 그들은 나쁘고 나는 좋은 사람 입니다  ㅎ ㅋ ㅎ  사랑해요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1945년 8월 첫 만남 때부터 비롯됐다. 장준하(왼쪽)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의 육군 중위로, 박정희(오른쪽)는 일제의 괴뢰국 만군의 육군 소위로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았다.

아직도 이런 친일파 들이 득세하며 뻔뻔 함을 부끄럼 없이 처신하는데는. 그동안 이어졌던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제에 보호막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반면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하셨던 장준하 선생님과 그의 가족들은. 말할수 없는 많은 아픔과 핍박속에 살아야했습니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정희 와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습니다.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합니다.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고 합니다.이 때문에 결국 장준하 선생님은 각흘산에서 의문사 합니다. 유신의 서슬 퍼런 압제 시대에 철저히 진실은 숨겨진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되어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금기시 되었습니다.그런 사연으로 아직까지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장준하가 미첩보부대OSS 대원이었던 1945년 8월.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OSS 작전명은 이었다. 1기생의 훈련은 8월 4일 종료되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그가족들의 삶 또한 처절하였습니다. 전월세 집을 전전하며 고통받는 시련의 생활이었습니다. 해군신병 훈련소 동기생이 었던 장남 장호권박사는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해군도 월남전에참전 특히 의무병은 해병소총소대로 배속 실전에 임하였기에 훈련은 해병훈련을 능가 할 만큼엄했습니다. 탈영병이 나오고  혹독한 훈련에 신음소리 한번 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훈련소 수려후그는 고속전투 수송함을 타고 월남 모항 에 정박합니다 당직사관으로 부터 권총한자루실탄몇발 지급 받고 문서 송달을 위해 B(부라보) 지역에 다녀오라. 하명을  받고 그지역은 밀림 지역이라황급히 귀대 하였으나 정박중이던 군함은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즉시 주월 사령부로 찾아가는데불행중 다행으로 미군 수색대를 만났고 영어 를 할수 있어.  그는 주월사령부에  도착하였으나 사령부 측에서 당신 어떻게 여기 와 있나 ???  수송 전투함  승함 명단에도 이름이 빠져 있다 합니다    군적 군번을 조회후 후속 수송함으로 귀국 할수 있었다 합니다  제대 후 로도  아버님의 사인 규명을 밝히려다 수사기관에 끌려가 맞아 턱뼈가 바스러져 은 으로 인공턱뼈를 하고 다니고 있지요 군사정권 시절은  독립투사의 가족들은 친일파의 자손들과는 대조된 삶을 살았습니다.이제부터 라도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이 쫒기듯  살아가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수필집 "돌메개" 를 소개한 출판사 소개글을 옮겨와 보았습니다.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일본군이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입니다.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쉬저우→린촨→난양→라오허커우→파촉령→충칭→시안→상하이→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집니다.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합니다진정한 나라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웅변하는이 책을 통해 장준하라는 역사의 거목을 추모하며 다시금 오늘을 돌아보고자.합니다

 

 

광복군 대원들 (1939년 4월 4일)

장준하 義士  어록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박 정권의 가장 날카로운 반대자였던 장준하선은 이 성명이    나온 뒤 <씨알의 소리>에 실린 '민족주의자의 길'을 통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인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이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있는 것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일본 누리꾼이 올린 高木正雄(다카키 마사오) 출처 미디어 오늘

 

위글들은 당시의 상황에선 엄청난 파문을 몰고올지도 모를 '위험한' 글이었습니다.주위 사람들 가운데서 "너무 성급것 아니냐" 는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7.4 성명'은 우리 민족의 거울입니다. 이 놈을 우리 민족의 현실 앞에 걸어놓고 있으면 조만 간에 가짜와 진짜가 가려질 것입니다.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한 것인지 분명히 가려질 날이 곧 올 것이니 두고 봅시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1인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장준하,〈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우리 사회는 힘이제일이요  힘이 곧  정의요 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불행하고 부조리한 생각에 빠져있다 관민은 막론 하고  권력만능 권력숭배  사고에 빠져있다 힘은 정의를 가져야 하고 정의는 힘을 가져야 할 터인데 정의에게 힘을 줄수 없기 때문에 힘이  정의 라고 떼를 쓰게 되었다

 

 

매년 7월 7일을 ‘장준하의 날’로 제정, 기릴 것을 제안합니다장준하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장준하부활시민연대 공동대표 여인철2019년 7월1일

 

 

 

젊은이의 나이는 각기 26세와 24세, 1944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아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으며 주야장천 6000리 길을 걸었다. 지도의 목적지는 대륙 서단에 위치한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들의 이름은 장준하와 김준엽이었다.

 

1944년 7월 7일은 일제시대에 청년 장준하가 학도병으로 끌려가 훈련받던 중국의 일본군 부대에서목숨을 걸고 탈출한 날이다.탈출의 목적에 대해 장준하 선생은 “나의 절망속의 일루의 희망은 내가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든 중국만가면 일군을 탈출할 수 있고, 탈출만 하면 임정에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만 믿어졌다”, “충칭엔왜 가는가?충칭에는 우리 민족을 살릴 조국의 힘, 그 호수 속에 뛰어들고 싶어 가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당시 탈출할 때의 비장한 심정을 장준하 선생은 ‘항일대장정 수기 돌베개’ 첫머리에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던 막사이사이상 수상후 필리핀 공항에서 (사진 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1944년 7월 7일이 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충칭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천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그렇게 탈출 후 청년 장준하는 7개월 가량의 긴 기간을 6천리 길을 걸어 이루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 끝에 꿈에도 그리던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해 김구 주석을 만나고, 광복군에 편입됐다.그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진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국내로 들어온다.이후의 남쪽에서의 장준하 선생의 삶은 한마디로 애국, 애족, 애민의 정신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독재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어찌하여 청년시절부터 식민지 조국을 구하려 목숨건 모험을 감행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정권과 싸웠던 장준하 선생은 결국 살해당하고, 비슷한 청년기에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만주의 일본군이 되기 위해 혈서까지 써가며 일제에 부역하고, 해방 후엔 군사 쿠데타에 군부독재의 사악한 씨앗까지 뿌린 박정희는 승승장구하여 대통령까지 되었단 말인가?우리의 현대사에서 이 대목이 나에게는 해방후 친일청산 실패와 더불어 가장 가슴아픈 부분이다. 여운형 선생과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것 이상으로 분하고 원통하다.당시와 같은 엄혹한 상황에서 탈출을 꿈꿀 청년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장준하 선생은 조국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던질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청년시절에 일본군에서 탈출을 감행했고, 그 후 OSS의 한반도 진공훈련에 자원했고, 그 엄혹한 박정희 통치하에서 펜과 맨 주먹으로 투쟁의 맨 앞에 섰던 것이리라.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후대에 뭐라 가르쳐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는 불행했던 시대에 같이 태어나 독립운동과 친일 매국행위의 정반대 길을 걸었던 장준하와 박정희 중 누구를 닮으라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장준하 선생의 위대함은 그의 삶의 어느 일정 기간에만 있지 않다. 그의 청년시절부터 박정희에게 의문사를 당할 때까지 그의 전 생애가 위대한 삶의 연속이었다.나는 우리가 우리의 위인을 발굴하거나 이미 알려진 위인들에 대해서도 예우하는 것에 지극히 인색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지금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후대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위인 중 대표적 인물은 발자취나 인품 면을 같이 고려할 때 단연 장준하 선생이라는 생각이다.그리하여 나는 오늘 잊혀져가는 장준하 선생이 후대에 널리 기억되고, 자라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그를 사표로 삼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20대 청년기에 식민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날인 7월 7일을 ‘장준하의 날’로 지정하여 기릴 것을 제안한다. 

 

 

장준하/바보새 함석헌

소나무 밑 동자놈아
우리 스승 어디 갔냐?
소나무 우둑 서 있건만
동자놈 간 곳 없다약사봉아 물어보자
네 무슨 약 감추었나
스승은 숨겨놓고
죽을 死짜만 내놓느냐?우리 엄마 30년을
전신불수 누워있다.
이 산 속에 있을 스승
구름 깊어 모를네라.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박사 우 문재인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