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모음

첫눈에대한시모음(엘랑비탈의고궁산책)

이모르 2020. 12. 12. 15:28

 

 

 

엘랑비탈화가의 겨울고궁산책

 

함박눈 오는날

고궁에서

까치 직박구리 지져긴다

 

춘당지 원앙은

소복히 쌓이는 눈속에

사랑을 노래한다

 

회화 나무에

쌓인눈은 사도세자의

한은 덮어주고

 

백송 나무에

쌓인 눈은

순백의 정절을

표현한다.

 

사락사락

소복소복

쌓인 눈속엔

 

생명의 폭발

봄의 의지가 숨어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남상학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첫눈/송수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미욱한 세상, 깨달을 것이 너무 많아

그 깨달음 하나로 눈물 젖은 손수건을 펼쳐들어

슬픈 영혼을 닦아내 보라고,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 영혼이 있고,

내 생명 무거운 육신을 벗어

공중을 나는 새가 되라고,

살아 있는 티벳인이 되라고

한 밤중에도 하얗게 내린다.

히말라야 삼나무숲을 흔들며,

말울음 소릴 내며 이렇게 고요하게

지금 첫눈이 내린다.

 

<첫눈 시 모음> 이준관의

'첫눈은 언제 오나' 외  

+ 첫눈은 언제 오나  

첫눈은 언제 오나.
나는 첫눈을 기다리지.

첫눈이 와야
정말 겨울이 시작되지.

첫눈 오는 날을 위해
나는
장갑이며 털모자며 목도리며
모두 준비해 두었지.

첫눈은  
밤에  
사박사박 몰래 온다는데,

캄캄한 밤
개가 컹컹 짖기만 해도
나는 가슴 두근거리지.


(이준관·시인, 1949-)

 

 




+ 첫눈  

첫눈이 신나게 한판 춤추며 굿판을 벌린다
한껏 치장한 나무도 화들짝 웃음소릴 자아내며
눈웃음 친다. 모두들 도원경에 빠져 가까스로
헤엄친다. 몽롱하다.


(이승복·시인, 1959-)

 

 




+ 첫눈  

고양이 걸음으로
소리도 없이

양지쪽 잎새 위에
누워 있다가

햇살 한 자락
슬그머니 끌어잡고

스르르 눈 감은
게으른 사랑


(이계윤·시인, 1940-)

 

 




+ 첫눈  

까아만 밤에
내리는 함박눈

바라만 보아도
순결해지는 가슴속에
기척 없이 남겨진
발자국 하나

한 겹, 두 겹, 세 겹
덮히고 덮히고 덮혀서
아득히 지워졌던 기억

선명하게 다가오는
얼굴 하나


(목필균·교사 시인, 1954-)


+ 첫눈

사형장 옆
못다 핀 국화 꽃잎 위에
밤새 내린 첫눈이 쌓여 있다

창살 너머
결핵수들의 얼굴이
야윈 손에 쥔 바둑알만큼 희다

눈 맞으며
먼길 찾아온 아내의
마른 기침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빛 저켠
교도소 흰 담벼락이
다시 눈 맞으며 높아지고 있다


(문부식·사회운동가 시인, 1960-)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정호승·시인, 1950-)

 

 




+ 첫눈

해마다 겨울이 오면
첫눈을 기대합니다

은연중 손꼽아
첫눈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꿈같이
첫눈 내리면

마음이 들뜹니다
가슴이 춤을 춥니다

어느새 수북한 나이 잊고
잠시 동심의 시절로 돌아갑니다.

첫눈을 바라보면
첫사랑이 문득 생각납니다

첫눈의 송이 송이마다
첫사랑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첫눈을 기다림은
순수한 사랑을 기다리는 것

세월 가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를
나의 순수를 꿈꾸는 일입니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사랑/ 조태일

 

첫눈이 내린다.
어디고 없이 제멋대로
내리고 내리는 것 같지만
내릴 곳을 보아 가며
서둘지 않고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지상의 왼갖 성명聲明들을 잠재우며
지상의 왼갖 낙서들을 지우며
한량없이
하이얗게 내린다.

높고높은 하늘을 지나서
가파른 절벽을 지나서
풀잎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움직이는 것들 위에 내린다
숨쉬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
꿈꾸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

오오, 오오, 소리치지는 않고
오오, 오오, 그 입모양만 보이며
우리들 귓바퀴 근처에 내린다.

보아라, 보아라, 소리치지는 않고
보아라, 보아라, 그 입모양만 보이며
우리들 눈앞에
뺨 비비며
첫눈은 그렇게 그렇게
붐빈다.

 

 

 

 

첫눈/권경업

 

첫눈 온 날이면

 

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

뽀득뽀득 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

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 보는

그리움의 소리

 

 

 

첫눈이 내리던 날/이규호


첫눈이 내리던 날
달려가 너를 만나고

하얗게 뒹굴던 그 날
하얗게 빛나던 첫사랑

아니야 사소한 이유로
아니야 우린 꽁꽁 얼었지

흰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때 그 모습만 떠올라

사랑이 많을 것 같았는데
누구 하나 남지 않았네

아니야 세월이 흘러도
아니야 나의 첫눈은 너

차곡차곡 그리움이 얼면
빼곡 빼곡 독한 기억에
서걱서걱 서러운 마음에

눈이 울어 눈이 울어
네가 녹아 이 겨울에 또 잠기네


아니야 시간이 끝나도
아니야 나의 영원한 눈사람


눈이 울어 눈이 울어
네가 녹아 내 맘에 고여
눈이 울어 눈이 울어
네가 녹아 이 겨울에 다 잠기네

 

 

 

첫눈내리던날/이재봉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흰 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흰 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첫눈에 반한 사람에게 /우심 안국훈

  

한 사람을 만나고

금세 사랑에 빠진 건

어떤 생각이나 이유 없이

그냥 마음에 끌린 거다

 

그윽한 눈으로 보고

따뜻한 손으로 스치고

냉철한 머리로 생각하고

아름다운 가슴으로 느낀다

 

꿈과 열정이 있으면

뜻하는 건 다 이룰 수 있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마음조차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첫눈에 반한 사람은

치명적일수록 더 달콤하고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당신과 함께하면 언제나 그러하다 

 

 

 

 

첫눈/박인걸 목사

 

첫눈을 맞으며

마냥 좋아 날뛰던

그 시절 추억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황혼이 내려앉아

찬바람에 뼈가 시린

수척한 나그네는

눈이 와도 감격이 없다.

가로등 언저리에

벌떼처럼 나는

순백의 눈발을 볼 때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설레던

심장의 고동소리 대신

이제는 눈길을 걸으며

숨이 찰 뿐이다.

 

 

 

첫눈/장석주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의 빈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내게첫눈 같은이/김용택

 

 

처음 당신을 발견해 가던 떨림
당신을 알아 가던 환희
당신이라면 무엇이고 이해되던 무조건,
당신의 빛과 그림자 모두 내 것이 되어

가슴에 연민으로 오던 아픔,
이렇게 당신께 길들여지고

그 길들여짐을 나는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사코 거부할랍니다.
당신이 내 일상이 되는 것을.
늘 새로운 부끄럼으로
늘 새로운 떨림으로
처음의 감동을 새롭히고 말 겁니다.
사랑이,
사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 사랑을 이끌어 낼 사람 어디 있을라구요.
기막힌 별을 따는 것이 어디 두 번이나 있을법한 일일라구요.
한 번으로 지쳐 혼신이 사그라질 것이 사랑이 아니던지요.
맨처음의 떨림을 항상 새로움으로 가꾸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그것은 의지적인 정성이 필요한 것이지요.
사랑은 쉽게 닳아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대한 정성을 늘 새롭히는 것이

나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나는 내 생애에 인간이 되는 첫관문을 뚫어주신 당신이 영원
으로 가는 길까지 함께 가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당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당신처럼 귀합니다.
당신의 사랑도, 당신의 아픔도,

 당신의 소망도, 당신의 고뇌도 모두 나의 것입니다.

당신 하나로 밤이 깊어지고 해가 떴습니다.
피로와 일 속에서도 당신은 나를 놓아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기도, 명상까지도 당신은 점령군이 되어 버리셨습니다.
내게,
아, 내게
첫눈 같은 당신.

 

 

 

 

 

첫눈/김경미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다

 

 

 

첫눈 / 김경미

마침내 그대편지가 오고 천천히 밖으로 나선다

하늘이 낮고 흐리고 어둑하니 자꾸 뒤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대로 다했고 무엇을 못했을까
뱀의 머리위를 지나듯 살라 했건만 낙엽밟듯 살아왔을까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줄 이제야 알겠거니
너무 많이 화를 내거나 울어왔던가
생각할수록 시간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는데

창밖으로 문득 첫눈 쏟아지네
희디 흰 형광가루들 순간 점등되는 지상
낮고 흐린 하늘이 떨어지면서 저리 환한 눈송이
되는 이치를 아무래도 그대와 걸으며 생각하노라면

첫눈 밟듯 살다보면
삶은 거저 내준 게 처음부터
너무 많았다고 따뜻한 눈물 글썽여지리라.

 

 

첫눈과 함께 부치는편지/고은영

 

이 밤
가슴에 엉긴 그리움으로
내 삶의 비루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첫눈이 내립니다

 

먼발치 그대 사랑의 기억 위에
떨리는 몽환의 조각을 기워가며
그곳에도 눈이 내리고 있나요

 

계절은 이제
겨울의 한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11월 밤 하늘에 잿빛 음표들이 끊임없이
그리움의 추상화를 그려냅니다

 

절망과 환희를 오가며 허물어지는
나의 영혼 위에 번지는 저 하이얀 눈

 단절의 고립 안에서
고독과 설렘의 이중주에 놓인
보고픈 그대의 얼굴처럼
애환이 서린 굵은 눈송이들이
온 밤을 나풀대고 있습니다~~

 

마치 그대의 미소에 베이던
행복의 부피처럼...

 

 

첫눈/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눈 내린 날의 첫줄 -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 나는 바닥과 병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첫눈/김수목

 

깨어진 얼음덩이가

풍덩거리는 저수지 위를
얼음 조각만 밟고
통통 뛰어 건너편 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보았다.
순간처럼,
빠르게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몸을 날려
저수지를 건넜던 것이다.
저렇듯 가벼운 몸짓으로
내 마음속에 첫눈이 내린다.
하늘의 공기방울을 밟으며
내 마음을 통통 가로질러 온다.
   

 

 

 

 

겨울 첫눈파티에 당신을. /장수남


너는. 강변 바람 되어
언제부터인가 혼자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 멀어질 때 너는
왜 뒤돌아보지 않았을까.

마른 잎 새 엮어 누굴 위하여
만들었는지 작은 배 한척이 강변에
밧줄을 올리고 있었다.

타세요.. 저음의 남자는
손을 내민다.
오늘저녁 겨울 첫눈파티에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겨울밤 첫눈을 기다리고 싶은 여자

그녀는 강가에 서서
추억속의 첫눈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긴 꿈을 기다리면서 누굴
사랑하고 싶었다.
                

 

 

 

 

첫눈내리는 소리/평보

 

고목 까치소리 요란하다

싸리울 참새 지져김 부산하다

내 이럴줄 알았다

 

밤새 함박눈이

세상을 바꿔 놓았다

 

봄날 낙화의 꽃비처럼

비틀대며 포개진다.

 

장독대 위로

싸리울 위로

소리없이 쌓여간다

 

하얀세상

흰둥이 검둥이

삽살개 뛰놀며

어지럽힌다

 

회 안에서 암 닭이

꼬꼬 거린다

숫 닭은 목청 돋구어

길게 꼬끼오

눈 풍경을 즐기고 있다

 

쌀 한주먹 뿌려주신

할머니

참새들 몰려와 잔치한다

 

뽀드득 뽀드득

이웃집 분이가

마실 오더니

덮어 놓은 이불속으로

숨어버렸다

 

 

 

 

자존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최북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도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안다. 그러나

그 보다 약 백몇십년 앞선 시대의 스스로 눈을 찔러버린

우리나라의 화가 최 북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 북(18세기)은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다.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여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리었고

 

호는 붓 한 자루에만 의지해 먹고살겠다는 호생관(毫生館)이었다.  

 그는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쪼개 칠칠(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칠이는 못난이,  바보를 일컫는 속어이다. 그는 아무 곳에도

 매인 데가 없는 자유인이었다.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그리지 않았다.

 화가에게 눈은 목숨과 같이 귀중한 것일 진데,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가면서도 기성의 권위와 강요에 굴하지

 않는 기질을 보여주었다.

 고흐가 자기 내면의 감정으로 귀를 잘랐다면 최 북이 눈을 찌른 것은

 외적 권위와 강요에 대한 대항이었다. 한 세도가가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 북은 그려주지 않았고 여러번 강요해도 끝까지

 응하지 않자 세도가는 강압적으로 신체적인 위협을 하려 들었다

 이에 최북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남이 나를 강압해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차라리 내가 나를 위해하마”라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버렸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국을 주유했다.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그 경치에 탄성을 터트리다가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못 속에 뛰어 들기도 했다. 최 북은 전국 명승지에서

 노닐며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했고 인정에 취했고 자기예술에

 도취되어 숱한 명품을 남겼다. 그는 욕심이 없으면서도

 광기의 기질이 있었다.

 예가는 당당한 자유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거침없이 살다간 최북

 

 

 

 

당나라 유종원의 시 ‘강설(江雪)’

 

온 산에 나는 새 한 마리 없고
온 길에 가는 이 하나 없구나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홀로 낚시하는 차가운 강에 눈이 내리네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최북이 강설 시를 테마로 그렸다는 한강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