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1일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 혹은 면악이라 불렸지만
남산과 대비되는 뜻으로 북악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조선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5년(태조4)음력 12월29일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일반인이 제사를
올리지못하게 하였다 합니다
태조실록8권 1537년에 명나라에서 온 사신 공영경을
접대하면서 중종(재위1506-1544)이 이 산의 이름을
추가해 달라 할 때 공용경은 “공극” 이라는 이름을 사용
공극 산 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옛 명인들은 백악산을 어떻게 그렸을까요
정선이그린 白岳山
영조16(1740)년 정선이 한성부서윤을
지낸 金貞謙(1709-1767)에게 그려준
그림입니다 간송미술관소장
김윤겸(金允謙 1711-1775)그림 백악산
김윤겸은 본관 안동 장동김씨로
서얼출신 역의 책임관원으로
산수화 특히 진경산수화를 많이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득신(金得臣1754-1822)의 백악산
김득신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풍속화가입니다
간송미술관소장
엄치욱(嚴致郁)의 백악산
엄치욱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으로
정조때 지은 경기도화성공사를 그렸고
금강산의 묘길상도 또한 그의작품이다
안종식(安中埴 1861-1919)의 백악춘효
안중식은 장승업으로부터 그림을 배웠으며
뛰어난 그림솜씨로 어진그림도 참여했습니다
경복궁 향원정 뒤로 눈덮힌 북악산
압제 일본
경복궁의 파괴를 통한 최종목표는
조선 총독부신청사 건립이었습니다
총독부 청사는 조선의 어느관청 건물보다
크고웅장하여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임을
과시할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조건과 맞아 떨어지는
장소가 경복궁이었습니다
조선왕궁의 법궁으로 국가경영의 중심에 있었다는
상징성과 북악산을 배경한 지리적 위엄까지
갖춰져 총독부는 건설에 혈안이 되었습니다다
남산의 총독부 (왜성대)가 협소해지자
1916년부터 총독부를 확장 이전할 곳을 물색하다가,
경복궁내에 광화문등 많은 시설물을 헐어내고
1918년 7월에 착공하여 1925년 10월에 낙성하여 이전합니다.
북악산으로부터 뻗어나오는 경복궁 지맥을 차단하는
위치에 날일자(日)의 총독부 건물을
배치하는 간악함을 보였습니다.
신교 옛 모습 1909년-1927년 사이
독일 선교단이 촬영한 신교의 모습.
뒷쪽으로 북악산 전경이 손에 잡힐듯 다가온다.
독일 성베네딕토 상트 오리엔탈 수도원 소장.
좌 1927년 이후 지금의 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겨진 광화문 밑
빨래하는 여인들이 보인다
우 광화문의 원래의 해치상
좌:1927년 이전된 광화문 우:한국동란중 파괴된 광화문
2018년 3월1일
도선 산우회에서는 매년3월1일
역사의 현장으로 기념산행을 합니다
올해는 일제로부터 수난을 격었던
경복궁을 지켜보던 북악산을 갔습니다
청운공원출발 오전 10시37분
북악산 정상까지 50분 11시22분
숙정문 오후 12시38분 1시간30분
하산 종료 오후2시13분
3시간36분 거리 5.8km
북악산 정상에서 보이는 비봉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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