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9월8일
춘성과 산길을 가기로 한날입니다
지하철 경복궁역 3번출해서 1020버스를
타고 세검정초등학교앞 하차 정자옆으로
해서 들어서는 데 초입에 작은절 현통사
밑으로 운치있는 폭포가 있었습니다
계곡물 따라 가는중 도룡룡 서식지라는
표식과 계곡을 보호하는 휀스가 처져
있었지요
백사실계곡 작은 숲속의 공원
여기는 인터넷에서 찾아낸 작은
천국이 었습니다
백사실 계곡은 임진왜란의 3대첩중
행주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자 한음 이덕형과의
우정으로 유명한 白沙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힌 이름이라 합니다
따라서 이곳에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
로 기초석 돌 기둥과 추춧돌 연못이 있습니다
우리는 백사실게곡에서 우측으로 가면 창의문이고
좌측으로 가면 북악스카이웨이 정상 팔각정이
나오는데 좌측길로 접어들어 숲길을 갑니다
아름다운 숲길엔 산새들이 노래합니다
400m 정도 오르니 약수터가 나옵니다
거기서 오솔길 숲길을 30분쯤 오르니 북악
스카이웨이 큰길을 만납니다
이정표엔 팔각정이 930m 로 되어있는데
오늘 계획은 향로봉길을 목표로 하였기 턴하여
다시 약수터 지나 이번엔 좌측으로 내려가는데
능금마을 쪽 앞 계곡엔 멀리 물봉선화 군락이고
얼음치들이 노는 청정 게곡과 소나무숲에
탄성을 지릅니다
다시 걸어서 구기터널앞 옆길로 들어서
북한산둘레 7길로 올라가 갈림길에서
우측능선을 타고 향로봉 앞 암벽 까지 올랐습니다
좌측 족두리봉 정면엔 향로봉의 위용
저만치 비봉이 보이고 사모바위 까지 절경의
풍경이 펼처져 있습니다
남산까지 360도 전방위 아름다움에
우리는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다시 하산합니다 장모님 해장극집에서 늦은 점심하고
헤어집니다
오늘 용기 있게 끝까지 인내로 버틴 두분의 짝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
부암동에서 보는 인왕산 기차바위
백사실계곡 주변
이 홍지문을 사이에 두고 종로구 홍지동과
서대문구를 나눈다,,
홍지문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호.
이 성은 1719년 (숙종45년)에 쌓은 것으로 ,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세운 탕춘대성(蕩春臺城)이다,안에 탕춘대가 있으며,,,
탕춘의 의미는 봄기운을 만끽 한다의 의미.이고
연산군은 이곳에와서 연회를 많이 베풀었다
하는 일설도 있다 한다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을
이용하여두 성사이를 이어 만들었다,
성곽둘레는 약4키로 정도 성안에는
연무장인 연융대를 만들고 군량창고도
갖추고있다,연무대는 군사들
무술을 연마하고 훈련하는곳 이라 한다
오관수문
일제가 촬영한 홍지문과 오간수문
사진 하단엔 수구문으로 되어있다
이사진은 일인들이 우편엽서로 유통되던 사진이라 한다
세검정(洗劍亭)은 서울특별시기념물 제4호로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던 정자이다.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세웠다. 인조 반정때,
이귀·김유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 결의를 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이곳에서 반란을
모의 혁명군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경복궁에 들어가
광해를 내몰고 인조를 내세웠고 논공행상의
불만으로 李适의亂.이 발생한다.
단원 김홍도의 세검정화
총융청터
연산군 시대를 만나 쇠락하고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국민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총융청( 摠戎廳 )
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軍營)을 말한다.
1623년( 인조 1 ) 인조반정 후 후금( 後金 )과의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이듬해에 일어난 이괄( 李适 )의 난에서,
그 반군이 수도 외곽인 경기도의 방어망을 쉽게 뚫고
서울을 점령하게 되는 취약성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설치되었다.
인조반정 후 왕을 호위해 공주까지 내려간
서인정권( 西人政權 )의 어영군을 강화하는
동시에, 경기도 일대의 정군과 속오군( 束伍軍 )을
조직화해 총융군으로 편제하였다.
당초 경기도내의 정군·속오군 및 별마대군( 別馬隊軍 )
등으로 편제된 총융군의 수는 약 2만여 명에 이르렀다.
경기도의 군사를 수원·광주·양주·장단·
남양 등의 5영으로 구성한 초기의 편제는
1영에 3부, 1부에 3사( 司 ), 1사에 3초( 哨 )를 둔 체제였다.
총융군은 처음부터 수도를 직접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군영이라기보다,
후금과의 관계에 대비해 수도 외곽 방비를
담당해 간접적으로 수도 방어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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