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영화 남한산성보다(남한산성13부)

이모르 2020. 12. 23. 13:14

 

 

2017 106

 

안박사 부부와 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하였습니다

줄거리는 1636년 인조14년 병자호란 청의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나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 척화신과 화친파

들의 명분싸움이 분분한데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여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분)

끝까지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영의정 김유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분) 그 사이에서 인조(박일해분)

의 고민은 깊어가고 와중에서 성을 지키려는 민초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처서 전투의지를 잃어갑니다

와중에 영의정 김유의 오만한 시행착오 로 아군을

사살하는데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분)역활로 외부로

왕의 칙서를 전달하는데 왕의 칙서를 받고도

공격하지 않는 조선 지원군 으로 결국 항복하고

김상헌은 자살하고 맙니다

 

여기서 역관 정명수의 말은 가슴을 파고듭니다

최명길이 그대도 조선사람이 아닌가?”

정명수 나는 노비로 조선에서 버림받았소

이미 나는 의 신하요

김상헌이 전방 임진강 시찰시 강 길을

안내해준 사공에게말한다

청병들이 내려오면 길을 안내 해줄 염려로

여기 있으면 않되니 나와

한양으로 가자 앞날을 책임지겠다

늙은 사공은 이렇게 답합니다

먼저 난(정묘호란)때 임금을 건네 주었으나

좁살 한되도 받지 못했으나 청군이 오면

먹을 것을 주지 않겠는냐고 답하여

김상헌이 그를 할 수 없이 죽인다

 

김상헌이 성을 사수하는 아군에게

가마니를 지급하는데

영의정 김유는 군마가 먹을게 없어

죽는다며 가마니를 회수해 말에게

먹입니다 그 과정에서 민초들의 전투력은

저하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굶주린 민초들에게는

이념이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기아의 죽음앞에서 임금 나라가

어디있겠습니까???

작금의 정치지도자 들도 잘 새겨둬야

할 대목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논픽션 영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그려야

되나 사료와 다른점이 있어 그사실을

적어 봅니다

   

우선 영화에서는 조선의 증원군이 광주에서

안위만 생각하여 공격하기를 주저하고

김상헌의 연락병이 대장장이 라는 걸알고

오히려 죽이려 하나

 

이긍익의 연려신기술에 광주 쌍령 전투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4만군사가 팔기군 3천에게

쌍령전투에서 처절하게 참패하는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을 하는 장면은

극화의 극대화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만

김상헌은 청으로 끌려갈 때 유명한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를 남겼으며 청의 刑部에서

취조를 받을때도 그 기개를 굽히지 않아

취조관들을 감동으로 몰아넣어 존경을 표합니다 

매국노 역관 정명수 조차 오히려

통역을 김상헌을 유리하게 설명합니다

 

瀋陽日記는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가 생활하던 모습을 시종들이

일기로 기록한 것인데 현재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고 대양서적에서 펴낸

이석호역 중 김상헌. 신득연. 조한영. 채이향.

4인의 문초과정에서 정명수를 대감이라 부르며

목슴을 구걸하는 3인을 꾸짖으며

곧 죽을 사람이 목숨을 구걸한들 살수 있겠는가

하며 웃는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어 여기

발췌하여 올려봅니다

 

辛巳年(1641)

朝鮮仁祖 19

明 毅宗 崇禎 14

淸 太宗 崇德 6

18

 

 

 

 

 

 

 

 

 

인물소개 /출처 위키백과

최명길

1605년 생원시에 입격한후 그해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14년 병조좌랑에서 삭직된 뒤 복권되었으나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했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발하여 그 뒤 1623년 인조반정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군되었다.

정묘호란 당시 화의론을 펼쳤으며 항복이 결정된 후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청나라와의 협상을 성사시켜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대명, 대청 외교를 맡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군 선봉장을 만나 시간을

끌어 인조의 남한산성 피신 시간을 벌었다.

그 뒤 화의와 항전을 놓고 김상헌 등의 척화신에

맞서 화의론을 주장했다. 이때 직접 항복문서를 지었는데,

척화신 김상헌이 이를 찢고 통곡하자 항복문서를 다시 모았다.

 

 

김상헌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고

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이 정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교수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최명길은 이를더러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수나 있겠냐며

쇼를 한 것이라 비난했다.

정축하성(소위 삼전도 굴욕) 때 인조를 따라가지 않고

남한산성 뒷문으로 나가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갔다.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안동 소산으로 은퇴하였다.

1638년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영의정 김류

 

[산성일기41].

자기 가족들을 피란시키기 위해 아들을 피란지인

강화도 감찰사를 시킨 자도 있고,

그 자의 아들은 왕의 식솔들을 팽개치고 강화로

피난한 후 배를 내어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수들은 임금이 있는 지척에서

척화신(斥和臣=청과 전쟁하자는 신하들)

내놓으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어 이를 승지(承旨)

"도대체 어느 안전에서 이런 행패

를 부리느냐"고 말리자 군병(軍兵)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크게 노하여 장차 난동이 일

어날 지경입니다.

체찰사(體察使 : 전란시 임금을 대신하여

군무를 관할하는 임시직으로 재상이 겸직)

김류(金鎏 : 15711648)의 행적은 더욱 가관입니다.

김류는 인조의 측근 중의 측근입

니다(야사에 따르면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왕이

될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 바로 김

류의 아내라고 합니다). 청나라가 위장전술로

우마(牛馬)를 두고 가자 김류는 군사들

을 내몰아서 싸우라고 독촉하나 군사들은

위장전술이라고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김류는 비장(裨將)을 시켜 병사들을 칼로

마구 찌르니 병사들은 할 수 없이 나가서 싸

우다 순식간에 3백여 명이 전멸합니다.

그러자 김류는 전사자가 40여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면서 다른 장수가 호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남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뿐만 아

니라 병사들이 전멸한 마당에 퇴각 깃발을

늦게 들었다고 초관(哨官 : 대대장급)

베어 죽입니다[산성일기52].

 

인조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조선시대에 왕은 집권하면 널리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여

사형수도 사형을 면제해 주었으며 대부분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풀어주었다.

그러할진대 즉위 직후에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하고 처형당한 고관대작들의

 일족들을 멸문 당하게 한 행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연산군은 발끝에도 못따라갈 수준인 것이다.

이러한 광포한 성격은 뒤에 가족까지

살해했다는 혐의를 사게 된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다.

 

 

정명수

 

조선 중기의 인물. 조선 500년 역사상에

손꼽히는 매국노 중 하나이다.

그 이름은 명수(命守)라고도 하는데, 본래 평안도

은산 출신의 사람이다.

본래 천례(賤隷)로서 한미한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을 간단히 말하면,

"나라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나라를 버리겠다"

를 실행하며 산 사람.

1619년, 광해군의 명을 따라 강홍립이 명의 후금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을 당시에 병졸이

되어 요동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 등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후금의 군대에게 의하여 참패를 당하자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여진어에 능숙하다는 장기를 살려 포로 해방

이후에도 청나라에 남았고, 또한 조선 내부의

사정을 후금에 알려 후금 조정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1636년, 인조 때에 병자호란 이 발발하자타타라

잉굴다이 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의 역관 노릇을 하며

금의환향했다  호

란 이후에는 잠시 조선에 남아있으면서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정에 압박을 가하여

그 벼슬이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에서 온갖 횡포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병조 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몽둥이로 폭행하였고,

조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불렸으며,

또한 자신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청나라로 돌아갔는데 그 곳에도

조선 조정을 계속해서 압박하며 괴롭혔다.

연려신기술에 따르면 탄핵을 받아 위기에 처한 김자점

정명수에게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는 것과

장릉(인조릉)의 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새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밀고하자, 청에서 10차례나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도 모자라서 조선에서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를 노략질하기도 하는 등의 만행을 그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은 정명수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실제로 여러 조선인들이

정명수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꾀하였다.

심양에 있던 시강원서리 강효원과 시강원필선

정뇌경 등이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에

와있던 재상 박노, 신득연, 보덕 박계영, 필선 신유, 사서 김종일,

정지화 등 여러 명의 조선 관리와 모의하고는,

정명수가 부패한 행위를 저지르고 조선에서 보내온

세폐까지 노략질했던 만행 등을 청나라 형부에

고발하여 정명수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를 알고는 고발 문서를 빼돌려 불태워버리고는

박노를 협박하여 거짓 진술을 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강효원과 정뇌경 등은 무고죄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소현세자의 간청으로 교수형에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효종 4년인 1653년, 정명수에게도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경상도 성주 출신으로써, 양민출신의 군사가 되어

강홍립을 따라 종군했다가 심양에 머물게 된 이사룡이

정명수의 죄상을 형부에 고발함으로써 정명수를

모살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정명수는 곧 관작을 삭탈당하고 죽었으며,

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친족들 혹은 정명수의

청탁으로 면천하고 벼슬을 지낸 자들은

대개 벌을 받아 유형에 처해지거나 심하게는

 극형을 당해 죽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시백

 

이귀의 아들이며 유생으로 있으며 인조반정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가 되어

이천에서 길목을 지켰으며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진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 방어사로 인조를 무사히

강화도로 대피시켰다.

1629년 이후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

강화유수를 연이어 지내고 1633년, 병조참판을 지내고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과 남한산성수어사를 겸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지켰으며, 소현세자가 죽고

인조가 둘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할 때,

그는 세손(世孫)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38년, 공조판서로 승진되어 지의금부사

겸하고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청나라에

볼모로 서자를 보냇던 일로 여산에 중도부처되고

1639년, 풀려나서 충용사가 되었으며 1644년

이후에는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고

1649년, 호조판서를 지낸 뒤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을 거쳐 1650년, 우의정, 1652년, 좌의정,

1655년, 영의정에 올랐다.

1652년 효종  청나라 북경에 다녀와서

영의정까지 지냈다.

어려서 성혼·김장생·이항복 등에게 배웠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세었다고 한다.

또한 지혜가 있었으며 항상 겸손하고 청백하였다.

김육의 건의로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였다.

 

 

서날쇠

극중 서날쇠역은 실존했던 서흔남을

모델로 하였다 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영(軍營) 앞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더부룩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침을 질질 흘리던

그를 청군들은 전쟁 때문에 실성했다고 생각해

자신들 진영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그는 몸을 바로 하고는 품 안에

인조 근왕병 모집 교지를 가지고

삼남(충청ㆍ전라ㆍ경상)으로

내려가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됐다는 위급함을 알렸다.

적 포위망을 뚫기 위해 거짓으로 미친 척했던

사람 이름은 바로 서흔남(徐欣男)이다.

그는 원래 수어청 소속 장교의 노비로 주로

기와를 만들던 장인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영리하고 용감했던

그는 밤에 수시로 남한산성을 나가 적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왔다.

당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한 교지를

바깥으로 전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남한산성 안에서 관리와 양반들은 전쟁을 할 것이냐,

휴전을 할 것이냐를 가지고 입으로만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조선 장군과 군사들은 청군이

두려워서 산성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일개 노비였던 서흔남만이 목숨을 걸고 나갔다.

서흔남은 도원수 김자점과 전라감사 이시방을 만나

근왕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오겠다는

장계를 받아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인조에게 바쳤다.

이 일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가던 남한산성 백성과

군사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항전은 지속될 수 있었다.

서흔남 같은 진정성 있는 민초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나라가 수많은 외세 침략에도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