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반역자의단죄

이모르 2020. 12. 13. 10:03

몇일 있으면 3.1절

몇사람 민족반역자는 어떻게 처단되었나??

 

참고자료:언론기사 모음

 

이완용(李完用) 암살미수사건을 보건대 이완용 습격사건이 발생하기는

1909년 12월 22일 상오 11시 30분이었다. 이완용이 명동천주교회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것을 이재명(李在明)이 군밤장사로 변장하고

교회당 문 밖에서

밤을 굽고 있다가 달려들어 단도로 찌른 것이다.

 

 

 

이재명의사

 

이완용

 

 

 

옹위하는 이완용의 집 하인을 먼저 찔러

죽이고 땅에 엎어진 이완용의 복부를 여러 번 찔렀는데 이완용은

병원의 가료로 죽음을

면했다

 

 

이재명은 1903년 기독교인이 되어 1907년

대한노동이민회(大韓勞動移民會)의 하와이

이민모집에 응모하여 미국에서 수년간 노동에 종사하였다.

귀국 후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가 한일합방이 되리라는 소문을

듣고 귀국하여

이 거사를 실행한 것이다.

 

이때 이재명과 함께 거사한 이는 12명이었고, 이들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정간격을

두고 이완용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는데 이재명이 인력거에 오르는

이완용을 찌르고 붙

들리자 이동수는 훗날을 위해 몸을 피하고 다른 동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또한

한 사람이 붙들려 다른 사람까지 붙들리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서로의 행방을 알리지 않

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9명은 얼마 안되어서 체포되고 이재명은 사형,

다른 사람들은 최고 15년의 형을 받게 되었다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한 일본군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건청궁으로 침입,

명성황후를 살해하였고 훈련대의 1대대장 이두황, 2대대장 우범선,

3대대장 이진호(李軫

鎬)이 일본군에 협력했다.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

이어를 결정하게 하였고, 을미독립운동의 계기가 됐다.1897년

10월 대한제국 건국과 함께 명성황후(明成皇后)에 추책되었으며,

국장을 치르고

청량리에 장례되었다가 경기도 남양주 홍릉으로 개장되었다.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명성황후를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명성황후를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다고 묘사했다.

 

 

고영근

 

 

고영근의 호패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이던 우범선은 1895년 10월 8일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로 일본 낭인 등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경복궁에 난입할 때 병력을 이끌고 동참했다.

우범선이 훈련대 병력을 동원했기에 일본의 명성황후 제거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으며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시체를 태우고 매장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범선과 일본인처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2품인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던 고영근.폭탄 테러 사건에 연루돼 일본으로 망명한 고영근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핵심 인물인 우범선이 일본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게 접근했다.

 

시해사건이 있은 지 8년이 지난 1903년 11월 24일 오후 7시께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의 자택에 우범선을 초대한 고영근은 하인과 함께 우범선의 목과 턱 주위를

여러 차례 찌르고 머리를 쇠망치로 때려 살해했다.

 

"오호 통재라, 을미사변 때 우범선은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체를 태우는

극역대악으로 천하의 공분을 샀도다. 대한의 신하 된 몸으로, 하늘을 같이할 수 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서 원수를 갚음을 위에 아뢰고 아래에 알린다

"고영근은 조선의 대신들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에 자신의 살인 동기를 이렇게 적었다.

그는 편지를 지니고 경찰에 곧바로 자수했다.

 

 

미국인 스티븐스의 사건을 살펴보면 1906년 미국의

스티븐스는 왜정부(倭政府)의 추천으

로 오국(吾國)의 외교고문(外交顧問)에 선임되어 재임하는 동안에

이등(伊藤)이 보호조약

 

을 강제 체결하는 것을 극력(極力) 알선하고 한국의 월봉(月俸)을 받으면서

왜적(倭敵)에게 충성을 다하여 한국 침략을 일삼던 자였다.

 

 

미국인 스티븐스의 사건을 살펴보면 1906년 미국의 스티븐스는

왜정부(倭政府)의 추천으

로 오국(吾國)의 외교고문(外交顧問)에 선임되어 재임하는 동안에

이등(伊藤)이 보호조약

 

을 강제 체결하는 것을 극력(極力) 알선하고 한국의 월봉(月俸)을 받으면서

왜적(倭敵)에게 충성을 다하여 한국 침략을 일삼던 자였다.

 

 

스티븐스는 해임되어 귀국할 때 이등(伊藤)의 비밀청탁(秘密請託)을 받고

상항(桑港,샌프

 

란시스코)에 건너가 신문지상에 발표하기를 “한국의 궁중(宮中)은 실덕(失德)이

많고 완

 

고당(頑固黨)은 인민의 재산을 빼앗으며 인민이 우매하여 독립할 자 격이

 

없으므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노국(露國)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하고 또 “이등(伊藤)이 한국을 다스리는 정책이 유익한 고로

한인(韓人)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정재관(鄭在寬) 등이 분격하여 1

908년 3월 스티븐스를

 

방문하고 그 이유를 힐책하다가 감히 의자를 들어쳤고 동월 22일 스티븐스가

워싱톤으로가려고 오크랜드 역에 나가 있는 것을 우리 대동보국회원 전명운이

권총으로 저격하다가 불발되고 다른 쪽에서 장인환이 두 방을 발사하여 한 방은

전명운을 오중(誤中)하고 한

 

방은 스티븐스를 명중하였는데 병원에서 가료(加療)한 결과

전명운은 완치되고 스티븐스

 

는 사망하였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원래 서로 모의한 것은 아니었다. 장인환은

미국법원으로부터 그 우국

 

지정이 높이 평가되어 15년 징역형선고를 받고 사면되었고

11년만인 1919년 1월1일 가출

 

옥으로 석방됐다. 또한 전명운은 90일간 갇혔다가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역사의 심판엔 시효가 없다"는 교훈,어디로

 

안두희 암살 10년을 맞으며

방학진 기자

 

지금부터 꼭 10년 전인 19961023

오전 1130분 경 인천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제 몸조차 가늘 수 없는 한 노인을 46세 버스기사가

몽둥이로 수차례때려 숨지게 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 버스기사는

사건 직후 인근 천주교 성당을 찾아가

자신의 행위를 신부에게 고해성사하고 곧바로

경찰서에 자수를 하였다.

그 남자가 살인에 사용한 몽둥이에는

정의봉 정의 도덕 통일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몽둥이를 정의봉이라고 일컬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박기서였고 사람들이 정의봉이라

이름붙인 몽둥이로 응징당한 노인은 안두희. 바로

1949626일 낮 1230분 경 백범 김구를

경교장에서 권총으로 살해한 암살범. 안두희를 응징한 박기서는

각계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1998년 삼일절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다니던 직장에서는 그에게 권고사직을 권하는 등

보이지 않는 불이익이 그를 따라 다녔다.

이제 56세의 중년인 그는 여전히 부천에서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그동안 백범 암살 사건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곽태영 권중희 등 개인들의 노력에

이어 199512월 국회는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를 만들어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보고서를 발표했으나

그들 스스로의 고백처럼 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진상규명은 역사가들이 할 일이라면서 속 시원히

그 진상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에

이어 한국의 주류 세력들의

암묵적인 은폐 공모행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때문에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개인들이

끝까지 매달린 것은 실오라기 같은 안두희의 양심이었다.

하지만 안두희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은커녕 기존의 자백을 번복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에 따라 박기서의

행동에 대해 달리 평가할 수

있지만 적어도 당시 박기서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안두희에게 진실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의

자연 생명을 단 1초라도 단축하는 것이

역사의 단죄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행동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숱한 한국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 우리 모두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그러나 여전히 그 날의

사건을 교훈은커녕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있는 김창룡

 

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창룡의

미망인에게 사자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상태이다.(애초 원고는 김창룡의

딸이었으나 김씨가 최근 사망하여 김창룡의 미망인이 원고

자격을 승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대전지역

시민단체들이 몇 년째 대전 국립묘지에 있는 친일군인

김창룡 묘 이장을 요구하면서 그를 백범 암살의 배후

하나라고 언급한 것이 그 이유이다. 원고측 즉 김창룡의

미망인은 김창룡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이 오직 김창룡은 백범 암살을

사전에 모의한 적이 없으므로 배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전 모의는 없었고 사후 처리에 가담했으니 배후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파렴치에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1995년 국회가 채택한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보고서

암살의 배후편을 보면 김창룡의 역할이 아래와 같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어

특별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에 개입한 사람은 총참모장 채병덕과 특무대의 김창룡이었다.

안두희는 그의 회고에서 사건 전에 김창룡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사전 개입은 아직 명백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로써는 김창룡이 사건의 뒷처리에서 누구보다 직접

개입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중략) 결국 군부에서는

장은산이 사전에 직접 명령·지휘하였고, 김창룡은

사건의 뒷처리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 외 전봉덕, 김창룡, 채병덕, 원용덕, 김병삼 등은

외곽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현재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창룡의 미망인에게

사자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상태이다.(애초 원고는

김창룡의 딸이었으나 김씨가 최근 사망하여 김창룡의

미망인이 원고 자격을 승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대전지역

시민단체들이 몇 년째 대전 국립묘지에 있는 친일군인

김창룡 묘 이장을 요구하면서 그를 백범 암살의 배후

하나라고 언급한 것이 그 이유이다. 원고측 즉 김창룡의

미망인은 김창룡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이 오직 김창룡은 백범 암살을

사전에 모의한 적이 없으므로 배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전 모의는 없었고 사후 처리에 가담했으니 배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파렴치에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1995년 국회가 채택한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보고서

암살의 배후편을 보면 김창룡의 역할이 아래와 같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어 특별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에 개입한 사람은 총참모장 채병덕과 특무대의 김창룡이었다.

안두희는 그의 회고에서 사건 전에 김창룡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사전 개입은 아직 명백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로써는 김창룡이 사건의 뒷처리에서 누구보다

직접 개입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중략) 결국 군부에서는

장은산이 사전에 직접 명령·지휘하였고, 김창룡은 사건의

뒷처리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 외 전봉덕, 김창룡, 채병덕, 원용덕, 김병삼 등은

외곽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김창룡의 후손과 가족들의 후안무치에는

대전 국립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와 국방부도

거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창룡 묘 이장 주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나 몰라라 하는

보훈처를 보다 못해 시민단체들은 국립묘지령

개정 청원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 당시 특무부대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

홈페이지에서는 제5대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의

무공이 자랑스럽게 장식하고 있으니 10년 전

박기서의 절규는 누가 답을 할 것인가.1916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19561월 출근길에 같은

특무부대 출신 군인들에게 암살당하기까지 김창룡의 삶은

반공을 무기로 조국 분단이 고착된 왜곡된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과 끝없는 권력욕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김창룡은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 입대하여, 만주에서

조선과 중국의 항일조직 50여건을 적발하여

헌병오장(하사급)으로 특진한다. 그리고

 

1945년 그의 조국인 일본 패망 후 철원에서 체포

수감되어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송 중 탈출했고

1946년 또 다시 소련군에 체포되어 다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또 탈옥하여 월남한다.

 

월남 이후 반공국가를 충실히 만들어 가고 있던

대한민국에서 김창룡은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오늘 날 육사)

3기생으로 입교하여 95일 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해 자신의 특기인 군부 내 좌익색출 공로로

소령으로 특진하고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하여 동해안 반란사건, 뉴델리 밀담설 등 각종

사건을 조작하여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고

 

이승만 독재정권의 초석을 다지는 첨병역할을 수행하다

19561월 부하 장교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해방 후 북에서

두 차례에 걸쳐 소련군에 의해

전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용케도 탈출해

당시 친일파들이 중용되던 남한으로 월남하게 된

이 때부터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로 무장하게 되고

해방 정국과 6.25전쟁에 이르기 까지 여순 사건과

군내 좌익세력 색출을 통해 그는 일제시대보다 더욱

화려한권력을 누리게 된 것이다.

당시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 역시 한 때 좌익

경력으로 고초를 당한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한편

김창룡 사망 직후 이승만이 직접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고 하니

김창룡에 대한 이승만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1998년까지 안양에 묻혀 있던 김창룡은 유족들의 요구로

육군특무부대 후신인 국군기무사령부 주관으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의 남편(김창룡)은 애국자다. 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랬기 때문에 그(김창룡)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다면

우리 집과 맺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우리 남편

묘를 국립묘지에서 이장하라고 하느냐

 

목청을 높이는 김창룡의 미망인과 현충일 대전 국립묘지

앞에서 만일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전복을 미연에 막아낸 김창룡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을까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는

성우회(퇴역 장군들의 친목 단체)의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10년 전 정의봉을 휘두른 박기서의 문제의식은

계속될 수 밖 에 없음을 절감한다.

 

 

 

 

효창원의 백범묘소

 

 

1996년, 안두희 자택에 침입한 '박기서' 씨가 안두희 동거녀가

문을열고 나오는 틈을타 동거녀를 묶은 후 '정의봉' 이라는 목검으로

안두희 머리를 내려쳐 숨지게 하였다.

 

 

박기서씨는 안두희를 죽이고 스스로 경찰서에 자수했다.

법원은 박기서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으나,

애국단체와 많은 시민들의 힘으로 1998년 문민정부떄,

3.1절 특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 다시 그런 기회가 와도 안두희를 몽둥이로 내리치겠습니까?


"그러믄요. 마음 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인데, 제 행위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긴 겁니다. 그를 처단하고 내 발로

자수해 교도소도 갔지만 복역 기간 내내 제 행동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교도소에 있었던 그 기간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뻤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피는 좀 묻혔지만 민족정기를 말살한

인간 쓰레기를, 젊은이들의 정신을 썩게 하고, 고약한

냄새로 세상을 더럽히는 자를 자기가 처치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다.

기자에게 굳이 밥 한 끼를 대접하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면 전철역까지 당신 택시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서 남영동 역까지 신세를 졌다. 그 때문에 택시를 타고도

요금을 내지 않고 내리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누가 고종황제를 죽였는가?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1897년10월12일 고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1919년 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KBS 1TV '역사스페셜'은 15일 오후 8시

광복절 특집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을 통해 고종황제 독살설의

진실을 파헤친다.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가 찾은 것은 당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
거기에는 고종황제의 죽음이 일본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의 시신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
또한, 30㎝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제작진은 "고종이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식혜로 알려져 왔는데,
고종은 정말 식혜를 마시고 죽은 것일까"

라며 "현대 법의학을 통해
고종황제의 구체적 사인을 추적한다"고 밝혔다.

1919년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뒤이고,
고종도 이미 퇴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고종 독살설이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구라토미의 일기는 일본이 고종황제가

해외에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막으려다 여의치 않자 독살을

감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종은 이회영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1919년 19살의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와 진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친왕(가운데)의 모습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일본친정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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