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산성일기(남한산성12부)

이모르 2020. 12. 13. 10:07

임진왜란 당시인 15924월 부산진전투를

170년뒤인

숙종때 화가 변박이 다시그린 전투도 부산진 성곽을

둘러싼 왜병과 왜선이 당시의 전력차이를 실감케한다

육군박물관 소장

 

 

 

왜장이 그린 울산성(도산성)전투도

 

동래성전투도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 장군의 모습

인조11(1633) 충북방어사 겸 안변부사인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에 주둔하면서 청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민병대를 훈련하며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壬辰倭亂때는 7년씩 끈질긴 항쟁으로 를 쫒아내는데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성대첩 권율의 행주데첩까지

홍의장군 곽재우 수많은 의병과 명장들이 등장하는데

??? 丙子胡亂때는 불과 2달만에치욕적인 항복으로처참한

인간조공을 하게 되는데 그 배경 에는 외교를 전혀 모르고 명분만 세웠던

형이상학적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큰화를 자초하게 되는데!!!!!

여기 작자미상의 산성일기는 당시의 굴욕적인 사실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역사의 기록은 아픈 과거도 잘 기억해

두어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어야

될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함락시킨 도르곤.

태조 누르하치14번째 아들인

그는 태종 치세에 중용돼 예친왕(睿親王)으로 봉해졌다.

 

병자동란(同亂)과 남한산성사정 그리고

인조의 항복

 

1. 임진왜란과 만주한겨레의 반응

한국과 살을 맞대고 사는 만주한겨레는

임진왜란(壬辰倭亂 : 朝日戰爭) 당시에 강 건

너 불구경만 했습니까?

임진왜란(1592) 때 후일 청 태조가 되는

김누루하치는 이조정권의 임금 선조(宣祖)

를 위하여 군대를 파병할 것을 제의합니다.

즉 당시 조선의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

(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는 김누루하치의 건주여진(建州女眞)

이 조선을 위하여 구원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선조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조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열

도한겨레(일본)의 군대를 피해 명나라로 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명나라가 거절하는 상

태에서 오직 명나라의 원군(援軍)만을 기다리며

평안도 의주에서 기약 없이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김누루하치(후일 청 태조)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의 입을

통하여 원군 파병을 제안합니다.

그 내용을 직접 보시죠.

"우리(여진) 땅은 조선과 서로 접해 있어서

조선이 일본군[왜노(倭奴)]에게 벌써 침

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대버일러이신)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의 휘하에 기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전투에는

매우 능한 군대입니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

가 우리의 대버일러[원문에는 도독(都督) - 후일

청 태조 김누루하치를 말함]에게 말

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좋은 분이니 반드시 정병을

뽑아 한 겨울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일본군을 정벌 살육함으로써 황조

(皇朝)에 공을 바칠 것입니다(宣祖實錄

30 25917日 甲戌)"

이에 대해서 이조정권의 피난정부는

이들이 "천한 오랑캐인 데다 그 속마음을 알 수

가 없다"고 하여 나라 전체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김누루하치의 군사지원을 거절

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군대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민중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명나라와 손잡고

오히려 청나라를 치려고 합니다.

 

 

 

 

영화 "활"의 장면들

 

2.병자동란발발을 자초하는 이씨정권

그 뿐만이 아닙니다. 후금()에 사신을 보내면서

가짜 왕자, 가짜 형조판서를 보내

기도 하고, 후금()에 보내는 글에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청태종의 즉위식에서도 조

선의 사신들(나덕헌·이확)은 절을 하지도

않았으며[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나라 대신들이 조선 사신들을 죽이려 하나

청태종은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고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에 돌아오자

자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냅

니다], 후금()에서 보내는 사신을

철저히 박대하여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양국의

무역에 있어서도 명나라에는 최고급 예물(禮物)

보내면서도 후금()에는 저질의 물

품으로 교역하는 등 후금()의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게 합니다. 후금()은 끊임없

이 조선을 끌어안으려 하는데 조선은 이를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습니다.

후금(後金 : 청나라)이 크게 일어 설 당시

조선의 혼군(昏君) 인조(仁祖)와 새끼중국

인들은 끊임없는 후금()의 화친요청을

거부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자초합니다. 당시

몽골과 만주의 지배자로 칭기즈칸의

천명을 받은 청 태종은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

지를 내립니다[산성일기(山城日記)

 

(서해문집 : 2004)].[청 태종이 인조에게보

낸 편지]

 

"조선 국왕은 들어라. 짐이

요동을 점령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끌어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1627)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

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어찌 강대하다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

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인조)

(강화도)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

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겠느냐 ![산성일기58]"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 ]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皇帝)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

을 듣고, (인조)'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그 같이 말한

저의가 무엇이냐? 대저 누구를 황제로 칭

하는 것이 옳은가 틀린가 하는 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

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天子)라도 외로운 필부(匹夫)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식으로 짐에게 말한다는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를 한번 두고 볼 것이다. 자식

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 된 자가

어찌 구하러 오지 않겠는가? 만일 명나라

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만백성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겠느냐? [산성일기58]"

 

 

당시 청병

영화속의 조선 장수들

 

 

3.남한산성의 군상들

당시 이조선(李朝鮮) 조정(朝廷)

모습은 가관입니다.

16361216, 청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에

당도하자 장수들이나 병사들은

겁을 먹어서 아예 싸울 의사조차도 없습니다

 

[산성일기41].

자기 가족들을 피란시키기 위해 아들을 피란지인

강화도 감찰사를 시킨 자도 있고,

그 자의 아들은 왕의 식솔들을 팽개치고 강화로

피난한 후 배를 내어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수들은 임금이 있는 지척에서

척화신(斥和臣=청과 전쟁하자는 신하들)

내놓으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어 이를 승지(承旨)

"도대체 어느 안전에서 이런 행패

를 부리느냐"고 말리자 군병(軍兵)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크게 노하여 장차 난동이 일

어날 지경입니다.

체찰사(體察使 : 전란시 임금을 대신하여

군무를 관할하는 임시직으로 재상이 겸직)

 

김류(金鎏 : 15711648)의 행적은 더욱 가관입니다.

김류는 인조의 측근 중의 측근입

니다(야사에 따르면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왕이

될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 바로 김

류의 아내라고 합니다). 청나라가 위장전술로

우마(牛馬)를 두고 가자 김류는 군사들

을 내몰아서 싸우라고 독촉하나 군사들은

위장전술이라고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김류는 비장(裨將)을 시켜 병사들을 칼로

마구 찌르니 병사들은 할 수 없이 나가서 싸

우다 순식간에 3백여 명이 전멸합니다.

그러자 김류는 전사자가 40여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면서 다른 장수가 호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남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뿐만 아

니라 병사들이 전멸한 마당에 퇴각 깃발을

늦게 들었다고 초관(哨官 : 대대장급)

베어 죽입니다[산성일기52].

    

 

망월사로 오르는 길목 거대 바위에 암각된 불문

우측아래 가경 병자년

이라는 연호가 새겨져 있다 가경은 청의 연호다

 

 

4. 청태종, 김홍타이지에게 인조가 항복하다.

인조(仁祖)는 국서(國書)를 보내어 청태종에게

잘못을 빕니다.

"제 나라가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형제의 나라가 되어 비록 땅을 나눠있

어도 정()이 두터웠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것을 자손만대의 가없는 복이라고 했는데

그 맹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 뜻을

거슬렀습니다. 제 천성이 유약하여 여러 신하

에 속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즉 신하들에게 속아서 전쟁을 자초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청 태종

이 황제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서 인조가

"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원수처럼 대하던 청 태

종에게 "자손만대의 가없는 복이라"는 둥

아부가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의연

한 모습은 볼 수가 없군요. 그저 살기 위해

애걸합니다. 애초에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

를 위해 목숨을 바칠 요량이었으면 아예

순사(殉死)를 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하지

말든가 해야지요. 이전의 그 높고 고결한

정신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정말 나라꼴이 갈 만큼 가버렸습니다.

그 위대한 반청(反淸)의 의로운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젠 감히 임금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알아서 기는" 조선의

신하들이 임금(인조)의 명도 없는데도 청나

라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신하(臣下)

칭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입니다.

"조선국왕 신() 이종(李倧 - 인조의 휘)은 삼가

대청관온인성황제(청 태종)께 글

을 올립니다. ()이 하늘에 죄를 얻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척화(斥和 : 청나라와 전쟁을 하자는 주장)

주장하는 신하들은 제 나라의 사대간(司臺

)들이며,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그 놈들의 죄입니다.

지난 해 그 자들을 모두

벌 주어 내쳤사옵니다[산성일기78]."

 

6. 항복장면의 진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만약 황제가 남한산성까지

오지 않았다면 그저 항복문

서만 보내도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용골대(청의 장군)가 말하기를'황제께서

심양(瀋陽)에 계셨다면 (항복)문서만 보내

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황제께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셔야 합니

.'라고 하였습니다(仁祖實錄15121)."

그리고 용골대(청의 장군)는 조선 정부에 대해

실제 군대들간의 충돌로 인한 패전

상황에서의 항복 방식(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너무 참담하므로

이 방식에는 따르지 말고, 그저 조선왕은 (

황제 경호상의 문제 때문에) 군사의 호위

나 왕의 위엄을 갖추는 행위는 하지 말고

[원문에는 "위엄 있는 차림(용포)은 없애고"]

5백여 명의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항복하라고

주문합니다(仁祖實錄15128).

그리고 실제로 항복한 날의 모습을 봅시다.

(임금 : 인조)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

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인조)을 인

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15130-

당시 이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황제에 대한 예[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행하자 청나라 관리가 전하(인조)를 인

도하여 단에 오르게 하고 서쪽으로 제왕의

오른쪽에 앉게 하고 칸(청태종)은 남쪽으로

앉아서 술과 안주를 내어 잔치를 베풀었다.

(청태종)은 전하(인조)에게 단비가죽

[獤皮(돈피)] 옷을 2벌 선사하고 육경과

승지들에게는 각각 1벌씩 선사했다

 

[산성일기96]."

이상 대쥬신을찾아서’(김운회교수저)에서 발췌

      

산성일기 원본

 

 

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15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만이었다

고 썼다.

정약용은 심양(瀋陽)으로 끌려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 붙잡힌 자는 여기 포함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다고 적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6%가 전쟁포로로 끌려간 셈이다.

조선인 포로들의 삶은 처참했다. 한겨울에

200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면서 청군에게

말채찍으로 얻어 맞기 일쑤였다. 언 살에 채찍을

맞으니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청나라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조선인 포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갔다.

노예매매 시장을 지켜본 소현세자는

심양장계에서 “(돈을 치르고 포로에서 면하는)

속환에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다.

많으면 수백 또는 수천 냥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희망을 잃었고,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 찼다. 날마다 관소(館所) 밖에서 울며

호소하니 참혹하여 차마 못 보겠다고 적었다.

저자는 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자료들에 나타난 사실을 바탕으로 조선 백성의 수

난사를 서술한다. 조선의 아낙인 김분남,

백정 길영복 같은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생동감을

더했지만 모두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사실(史實)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봐줬으면 한다고 밝혔다.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무·공보수석과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저자는 198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 연수시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연구를 시작했다 한다.

대학의 한 인권 세미나의 결론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은 17세기에도 자기 국민을 청의 요구에

따라 공출하듯 1년에도 수십 명씩 바쳐온 나라인데,

오늘이라고 해서 새삼 이런 나라에서 인권을 찾을 수

있겠는가.”

병자호란 포로 60만명의 수난사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주돈식 지음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12월부터1637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전쟁으로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

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1.병자호란의 원인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약체인 군사력,무엇보다 명()

기울고 청()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기,

즉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후금)

이 강해지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조선은 일찍부터

명나라에 조공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명나라는 이전에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구원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읽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그것이 불만인 조선내

신하들은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해군을

내쫓은 후새로이 '인조'를 임금자리에 앉힙니다.

이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부는 광해군과는 정반대되는 정책,

즉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게 됩니다.그래서

후금의 태종(홍타이치)은 조선을

침략합니다

.

2.병자호란의 경과

 

1차적으로 쳐들어온 후금군은 대략 4만에서

5만명이었습니다.

이것만해도 당시 조선은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를 의식한 후금은

조선과의 형제(兄弟)관계만 맺고 돌아갑니다.

물론 형은 후금이죠. 그리고몇년후

세력이 엄청나게 커진 후금은 이미 약골로 전락한

명나라군을 짓밟은 후에,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합니다. 즉 후금이

왕이고 조선이 신하를 하라는

거였지요.조선왕조는 이를 거부하고,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문을

전국에 배포합니다.

이것에 분노한 홍타이치는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에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이에 청군은 본국에서 증원한 4만명의

군대를 더해 20만대군으로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그리고 강화도로

도망쳤던 왕비와 세자등을 몽땅 잡아와서는

남한산성앞에서 조선왕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

남한산성안에는 만 3천명의

군사와 한달분의 식량밖에 없었습니다.

모든면에서 절망적인 인조는

항복할 뜻을 표시합니다.

 

3.병자호란의 결과

1637년 병자호란 때 50만명의 부녀자가 청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람피운

여자를 뜻하는 '화냥년'

이라는 욕은 이 때 끌려간 부녀자들이 고생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면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손가락질하는 냉대와 멸시를 견디다

못해 목을 매 자살하는 일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결국 모진 고생끝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조선 여인들은

목을 매거나 매춘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원나라에 항복한 뒤 거의 복속되어 버렸던

고려와는 달리 사실상 청나라로부터

자유로웠던 조선은호란 이후에도 청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더 키워 갔습니다.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조심스럽게 북벌을 추진하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장수풍뎅이(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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