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강세황과 김홍도(강세황작품)

이모르 2020. 12. 24. 19:48

 

 

 

숙종39년윤521일에 아버지 문안공 현이 64세 때,

그는 36녀 중 막내로 출생하여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1776년

기로정시에 갑과 1등으로 급제하고, 기로소에서 뽑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정조 때에 천추 부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정도로 서화에 뛰어났다.

글씨는 진서.예서 를 비롯한 각 체에 모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사군자 등에 뛰어났다.

그의 화풍은 정선 을 계승한 것으로 담담하면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다.

그는 당시 화단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후원자 또는

추진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으며 그림으로 난죽도,

산수도, 영통동구도등이 있다.

 

스승과 제자, 강세황(姜世晃)이 쓴 김홍도(金弘道) 전기

 

이 글은 조선후기 화단을 대표하는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의 특별한 인연,

즉 스승과 제자이자 예술계의 지기(知己)로서 소통하는 관계였 던

사실에 초점을 두고 살펴본 것이다.

시서화 삼절(三絶)로서 서화평론까지 겸한

강세황이 예원의 총수라면,

다방면에 절묘한 필력을 드러내면서 당대 가장 한국적이고

수준 높은 회화세계를 이룩하였고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 천재화가 김홍도는

화단의 중추라 할만하다.

강세황과 김홍도,

두 사람이 돈독한 관계였기에 가능했던 여러 기록

 자료들은 한국회화사상 막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 가운데 단원기단원기 우일본은 각별하다.

이 두 글은 소략한 전기이지만 작가 김홍도의 전모를

그려볼 수 있는 수십 가지의 내용이 압축적으로 알차게 담겨 있다.

특 히 스승 강세황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밝힌 김홍도의

사승관계 대목이 돋보인다.

나와 사능의 사귐이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했다.

 처음에는 사능이 어려서(7~8)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그에게 화결(畵訣)

가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에는 같은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하였다.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知己)로 느껴졌다.”

대개 화원화가들은 관련 기록이 드물고 그림을 배운

내력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때 막연하고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에 비해 김홍도의 경우는, 그림이 무엇인지 화결을 배운 연원과

그의 그림이 당대에 이미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 또 문인들과 문예적인

소통은 어떠하였는지, 등등 여러 사안에 대해 실질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작품과 기록 자료가 함께

전해지는 것은 김홍도에게도 행운이고 또 후대 사람들에게도 행운이다.

강세황의 화평이 있는 김홍도 풍속화에서 드러나듯이

김홍도는 그림으로 강세황은 글로당시의 풍속을 그려내었다.

문인화가 강세황과 화원화가 김홍도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소통하며 동아 시아 그림의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잘 구현해냈다.

두 사람은 나이도 신분도 달랐지만 각자의 예술인생에서

서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문예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그림의

요체와 정신을 함께 지녔던 사실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살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게 될 때 김홍도 작품은 물론이고 여타 화원화가들이 제작한

그림의 성격에 대한 이해도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지상편도 1748년에 제작된 두루마리그림 중 서재부분

백거의시 지상편을 모티브로 그려진 서재모습이다

서책과 금(伽倻琴)이 놓인 방에 선비가 앉아있다

 

 

강세황은 종병의 글을 읽으며 ‘서재에 산수화를 그려놓고,

이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그림 속 풍경 속에 음악이

가득 차오르겠지?’라는 멋진 소리 환상이라도 본 듯,

이를 곧 실천에 옮겼다.

 

그는 또 당송대의 문인 구양자(歐陽子, 1007~1072])가1)‘거문고를

배워서 즐기니 병이 몸에 있는 것을 모르겠다’고 한 글에도 마음이 끌렸다.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이 심약한 탓에 나다니지 못하고

산수 그림으로 목마름을 달래 오던 강세황은 종병과 구양수의 글에서

힘을 얻어 거문고를 익혔다. ‘나도 구양수처럼 현악기를 연주한다면,

악기에서 울려나오는 조용하고, 담박하고, 깊고 먼 소리를

얻어 마음과 뜻을 평화롭게 하고, 우울을 걷어낼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현정승집도

 

강세황은 1713년 서울 남소문동(지금의 장충체육관)에서 태어나

15세에 진주 유 씨 집안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강세황의

선대는 번성하였으나시대와 역행한 부친의 정치적 판단과

큰 형님의 과거급제와 관련된 비리, 등으로 집안이 기울었고,

벼슬길도 완전히 막혔다.

 

강세황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1937년에 남대문 밖 염천교

 근처로 이사하였다. 처가가 안산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임시로 빌려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가

곧 강세황이 <산향기>를 쓴 스물다섯 살 때라고 보면,

그가 그림을 붙여놓고 거문고를

연주하던 공부방 ‘산향재’는 염천교로 이사 가서 새로 갖게 된

작은 서재인 듯 하며, 그림과 거문고로 씻어내고 싶어

한 우울함과 답답함의 정도도 짐작할 만 하다.

 

몇 해 후 1744년, 강세황은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자 아예

처가 동네인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여 30여 년 동안 살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그림과 거문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안산에서 처가의 인척들 뿐 만 아니라 여주 이 씨 집안의

문인 등과 ‘시서화금주기(詩書畵琴酒碁)’로 교유하면서

그의 그림과 음악취미는 더욱 경지에 이른 듯하다.

 

20대의 강세황에게 ‘우울증 치료제’와 같았던 거문고는

1747년, 서른다섯에 그린 <현정승집도> 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정승집도>는 안산 현곡(玄谷)의 청문당(聽聞堂)3)에서

있었던 ‘복날 모임’을 그린 ‘기념사진’ 같은 작품이다.

그림에 붙어있는 발문에 따르면 이들은 초복 다음날

청문당에 모여서 가장(家獐)4)을 먹고 거문고와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 열한 명5)이 참석한 이날의

복달임에는 강세황과 처가의 인척들(유경종, 유경용, 유성),

강세황의 두 아들(강인, 강완) 등이었는데, 이중에 거문고 옆에

앉아 오른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가 강세황이다.

출처;문화유산채널

 

 

강세황, <태종대太宗臺>,《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17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부도 조선 선비들의 피서법을 엿 볼 수 있다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여름날 송도 유람을 하고

송도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담아낸 화첩입니다. 여름날의 여행을

 기록한 그림답게 물이 흘러넘치는 계곡과 폭포, 녹음이 우거진

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름 휴가철에 더위를 피해 바닷가, 워터파크, 리조트를 찾지만

전통적으로 최고의 피서지는 맑으면서도 시원한 물이 넘쳐흐르는

계곡일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여름철에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서 더위를 잊었습니다

 

 

<박연폭포>, 《송도기행첩》 제12면, 강세황,

 

송도(개성)의 박연폭포

 

개성시 북쪽 16km 지점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웅장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 있습니다. 높이 37m의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입니다.

박연(朴淵)은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바가지 모양으로 패

여 생긴못이며, 이 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것이 바로 박연폭포입니다.

 

 

 산수, 연대 미상, 수묵담채, 20 x 25cm
강세황이 그린 산수화 한 점입니다.

그림 설명에는 연대 미상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림 속에 정묘동첨재위...(丁卯冬忝齋爲...)라고 쓴 것으로 보아

정묘년, 즉 1747년 겨울 그의 나이 36세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80세까지 살았으니, 비교적 젊은 시절에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와 폭포>, 견본채색, 각 26.1×18.3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조영석趙榮祏(1686~1761), 신위申緯(1769~1845)

등의 작품을 하나의 첩으로 모은 것으로,

총 29면 중 심사정의 작품이 14점으로 가장 많고

강세황의 그림으로 확인되는 5폭이 수록되어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져 독특한 색감을 보여준다.
강세황의 작품에는 허필의 화제畫題가 적혀있어

두 사람의 밀접한 교유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1788년, 종이에 먹 35.0×25.7cm, 국립중앙박물관

 

 

단풍잎 드문드문 달려있는 나무가 계절의

무상함과 홀로 앉아있는 노인의 쓸쓸함을

나타낸다

 

강세황의 우금암도중 우금암부분 굴실안의 암자는

그시대까지 존재했던 옥천 암자이다

강세황의 우금암도중 문현부분

 

부암땜이 침수되전의 문현으로 추정되는 풍경

 

향원익청(香遠益淸)

지본채색(紙本彩色).

115.5×52.5cm

 

벽오청서도 ( 1750 )

 

 

중국 화풍을 모방하여 그려진 듯한 작품이지만,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먹과 색채의 어울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앞이 트여있는 작은 초가를 오동나무와 대나무, 파초가 감싸고 있고,

왼쪽에 보이는 절벽이 담장 역할을 하면서도 운치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초가에 선비가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죽서루

대흥사도

 

 

 

 

사군자 병풍

                           

 

 <심산강설도深山降雪圖>,《豹玄兩先生聯畵帖》중에서,

1761, 종이에 수묵, 38.4×27.4cm, 간송미술관

 

조선 후기의 화단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마찬가지였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이인상(李麟祥 1710-1760),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의 문인화가들이 남종화의

수용과 정착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남종화가 문인화가는 물론 화원화가,

여항문인화가로 확산되어 한국적인 화풍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강세황, <괴석감국도 怪石甘菊圖>, 豹玄兩先生聯畵帖 중에서,

1761, 종이에 수묵, 38.4×27.4cm, 간송미술관

 

 

 

1784년작 가을산수 국립중앙박물관

 

소림묘옥 간송미술관

 

강세황(豹菴 姜世晃) - 초옥한담도/草屋閒談圖 18세기26.6 x 26.7cm

. 주위에 고송과 대나무가 있는 초가지붕의 정자에 두 사람이 정담을

나누는 장면을 표암 특유의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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