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詩

사육신의詩(사칠신)

이모르 2020. 12. 29. 19:58

 

사육신을 의미하는 육각비석

 

 

역사의 교훈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념을 지켰던 의인들과

그 반대의 편에서 富貴를 쫒았던 사람들은 후세에 어떠한 평을

받았을까??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아들 문종이 연약한것을 염려하여

세손을 잘부탁한다는 유지를 내린다

여기에 끝까지 죽음을 불사했던 사육신들의 詩 를 적어 그분들의

충심을 옮겨볼까 합니다

 

신도비의비문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살점을 벗기는

극한 고문을 당하면서 끝까지 인두가 식었다며 호령하던

무인(군인)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유응부 세종과 문종등 선대왕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한 그의 기개는 지금의 위정자들이 자신의 입신에만

급급하여 신념을 변심하는 세태를 통렬히 야단치는 것같은

교훈을 주는것같고 옳다고 생각하는일에 초지일관하였던

옛 선조들의 기개앞에 눈앞에 이익만 추구하는 삶이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성삼문

 

이 몸이 주거가서무어시될꼬하니

蓬萊山第一峰 에落落長松되 야 이 셔

백雪 이滿乾坤 할 제獨也靑靑하 리 라

 

이 몸 이죽 어 가 서무 엇 이

될고 하 니봉 래 산제 일 봉 에낙 낙 장 송

되 었 다 가 흰 눈 이가 득 쌓일 때홀 로 청 청하 리 라

 

이몸이 죽은후 무엇이 될꼬 하면, 저 신들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 제

일 높은 봉우리에 싱싱하게 자란 큰 소나무가 되었다가 흰눈이 온

누리를 덮어서 만물이 죽거나 활동을 못할 지라도 나만은 홀로 푸른 잎

을 보여 주리라.

 

성삼문이 의를어기고 욕되게사느니 보다도 죽음의 길을 택하여 늙지

않는 영원한 소나무로서 푸른 청춘과 절개를 지켜 세상과 역사를 비는

그러한 몸이 되겠다는 결의에 찬 작품이다.

 

또 봉래산 중에서도 그

제일봉에 솟아난 소나무, 그 소나무 중에서도 키가 크고 가자가 축축 늘

어저 이풍도 당당한 소나무가 되려는 자신의 이상이 표현속에 두드러져

있고 온천하를 덮은 눈위에 홀로 푸르리라는 절의는 신선한 표현력과

더불어 굳은 의지로서 이미지의 효과를 심어준다.

 

더구나 흰눈 위에 른 소나무에서 오는 색조의

대비 효과는 하나의 절경이라 하겠으며 금상첨화

격으로 다른 이들이 다

세조에 굴복 하더라도 나만은 홀로 절개를

지키겠다는 대목은 왠지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케 한다.

 

하위지

 

會見林烏借(회견림 오차)

多慙仗馬鳴(다참장마명)

 

 

 

숲사이에서 가마귀가 남의집을 빌린것을 보며

의장대의 말울음소리를 부끄러워 하노라

하위지1387-1456 단종때 사육신의 한사람 자는 천장

호는단계 예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사육신사건의 실패로

참형당한다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벼슬을버리고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

했으나 세조가 등극하여 예조참판에 제수하자 마지못해

부임은 했지만 받은 녹봉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모두 모아

두었다한다...

 

 

유성원 (柳誠源;?~1456)

 

草堂에 일이 없어 거믄고를 베고 누어

 

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트니

 

門前에 數聲漁笛이 잠든 날을 깨와다

 

 

 

해설

 

초당에서 하릴없이 있다가 거문고를 베고 잠간 잠을 청했다.

 

그것은 꿈에서나마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스런 시대를 보려는

 

희망에서였는데 시끌시끌 하는 문 앞의 어부들 피리소리에 그만

 

잠든 나를 깨어놓고 마는구나.

 

 

 

배경

 

사육신 등은 모두 수레에 실려 지금의 용산 근처인 형장으로 실려 갔다.

 

구경꾼 들이수없이 많았으나 기침소리 하나 없이 지켜보았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성삼문을 비롯한 친국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도 있거니와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草堂에 일이 없어 거믄고를 베고 누어

 

 

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트니

 

門前에 數聲漁笛이 잠든 날을 깨와다

 

 

 

박팽년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메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박팽년 朴彭年(1417-1456).자는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 醉琴軒

조선조 세종때의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을 창제에도 참여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경희루 연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는 것을 섬삼문이

말렸다고 하며 세조밑에서 충청도 관찰사 로 있으면서 조정에 올리는 글에

臣자를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死六臣의 한사람이다

 

본바탕이 검은 까마귀는 흰눈비맞아 겉이 잠깐희게 보였다가도 곧다시

검어지는 법이다(불의의 정체는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밝은 달이나 밤에도 빛을 내는 참구술은 밤이되었다 해서 어두어

지거나빛을 잃거나 변절되지 않는다.

 

 

자신의 단종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아무리 어려운 고비를 당하더라도

결코 변하는 일이 있을수 있겠는가?

 

 

세조가 김질을 옥중에 보내어 술을 권하면서 그의 마음을 떠보았을때

지은이는 이시조로서 대답 하였다 한다..

 

약관弱冠 에도 차지못하는 나이에 謁聖文科(왕이 성균관 문묘의 공자신위에

참배한후 보이던 문과)에 급제하여 成三問등과 더불어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임금의

총애를 한껏 받으면서 사가독서(유능한 절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讀書당에서

공부하게한일)한 박팽년은 우수하고 유능한 학자였다

 

어린 단종을 잘 모시 라는 세종임금의 유훈을 끝까지 관철하여 사육신의

한사람이된 그의 끗끗한 기개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이한수의 시조에 잘 집약되어 문학적 향기마저 풍기고 있는

것은 결코우연한 사실이 아니리라

 

지존(至尊)의 위치에 잇는 세조를 흉측스러운 “까마귀”에다 비유하는 동시에

자기가 목숨을 바처 옹호하려는 단종이야 말로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정통성 을 지닌

떳떳한 임금임을 밤에도 암흑 속에서 빛나는 “야광명월”에 비유한 용기도 보통이

아니려니와 그표현상의 재치 또한 높이 살 만하다.

 

 

유응부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 차단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메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兪應孚(?-1456) 호는 碧梁 조선조 세종.문종에게

중용된 무인으로 死六臣의 한사람.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스러

워서 세조에게 악형을 받으면서 “나으리 한칼에 없애버리고 단종

임금을 복위시키려 햇는데 간사한 무리의 배신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할말이 뭐있겠소 빨리 죽여주시오“ 하니 세조가 대로하여 살가죽을

벗기는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자세한 전말을 말하라 하자 옆에 같이 고문받던 성삼문등을 바라보며

“저런 애숭이 서생들과 일을 도모하다가 필경이꼴이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저 서생들에게 물어보라“ 하고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세조가 더욱노하여 단근질을 하니 배꼽을 찌른 빨갛게 달군 쇠꼬챙이가

식은것을 다시달구어 오라 호령하였다 한다..

 

 

해설:눈서리 치다:눈서리가 치면 모든식물이 다사그러지고 만다

모반하던 사람들이 다잡혀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말한다 눈서리는

세조의 포악함을 비유한것‘ 못다핀꽃;아직 다 피지도 못한 꽃 거사를

하려던 지사들을 말한다.

 

 

감상 :어제밤에 모진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눈서리가지

쳤단 말인가 정정한 큰소나무가 다넘어져 버렸으니 하물며 아직다

피지도 못한 곷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세조를 쓰러 트리고 단종복위를 하여 세종의 遺敎를 지키려 하였던

충신지사들이 잡혀 처형당하는 상황을 표현한 시조다

 

유응부는 文士가 아니고 한낱 武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서 그런 작품이 나왔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얼마나 젊잔으면서도 迫眞한 은유인가. 죽을을 앞한 무시무시한

고문앞에서도 자신만만하고 여유자작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통해서

이런 시조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수 있다 그래서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이개

 

 

 

방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줄 모르고

저촛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이개 李塏 1417-1456 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오견 白玉軒 이색의

증손으로 사육신의 한사람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찬제에도 참여하였으며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죽었다 시문이 정갈하고 글씨도 잘 썻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종되었다..

 

해설 :방안에 켜져있는 저 촛불은 누구와 이별을 하였기에 걷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속이 타들어가는줄 모르느냐 그것은 꼭 속이 타서

눈물짓는 나의신세와 같구나!

(영월에서 고생하시는 어린단종을 생각하니속이타서 견딜수가 없구나)

 

이른바 촉루가(燭淚歌)라 부르는 이 시조는

지은이가 영월에서 귀양살이하는

어린단종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애간장을 다태우는

안타까운 심정을 남몰래

읊은 것이라 한다

 

비유가 기발하고 재치가 넘친다 "겉으로는

눈물지고 속타는 촛불 심지가

타들어가면서 겉으로 촛농이흐르는 모양을

이렇게 비유하여 표현한것이다

 

고요한 밤ㅇ을 비추는 조용한 촛불은

사람을 명상의 세계로 영혼의

세계로 몰아간다

그래서 이런 가작이 태어난 것이리라...

김종오 편저 옛시조 감상에서 발췌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放白鷳 詩(방백한 시)

 

 

 

爾爲羈鳥我孤囚(이위기조아고수)

그대는 새장 속의 새이고 나 외로이 갇히어  

日夕窓前相對愁(일석창전상대수)

해저문 창가에서 시름을 같이하네.

雲外豈無千里志(운외개무천리지)

어찌 구름 밖 천리를 날고 싶지 않으랴만,

籠中虛負十年秋(농중허부십년추)

새장 속에서 십년 세월을 버리는 구나.

 

鄕關縹渺天窮處(향관표묘천궁처)

고향은 멀리 하늘끝에 아득하고,

碧海微茫地盡頭(벽해미망지진두)

푸른 바다는 아스라이 땅 끝에 망망하니.

同是思歸歸不得(동시사귀귀부득)

함께 가고파도 갈 수 없는 몸이기에

歲寒風雪可堪留(세한풍설가감류)

차디찬 눈보라를 견디어 머무르리.

 

 는 조선 世祖

丙子士禍(단종 복위사건) 主謀者(주모자)

(당시 이조판서 겸 삼군도진무),

 

환열형을 받고 순절한

忠毅公(충의공) 白村 金文起 선생의

함길도절제사 시절 변방에서 지내는

회포를 읇은 七言律詩로서,

 

그대는 새장 속의 새이고 나 외로이 갇히어

해저문 창가에서 시름을 같이하네.

어찌 구름 밖 천리를 날고 싶지 않으랴만,

새장 속에서 십년 세월을 버리는 구나.

 

고향은 멀리 하늘끝에 아득하고,

푸른 바다는 아스라이 땅 끝에 망망하니.

함께 가고파도 갈 수 없는 몸이기에

차디찬 눈보라를 견디어 머무르리.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律詩로 달래는

김문기선생의 不屈 忠節을 지킨

정신이 서려 있는 名句로 전해진다.

(歲寒風雪可堪留)

 

함경도 종성

서산에 있는 石壁(석벽)

새겨져 내려온다는 설이 있으며,

 

전하는 실록에 의하면

선생을 모시고 따라갔던

우대규(禹大圭)

아깝게 생각하여

함경도 종성 서산에 있는

석벽에 새겨 두었는데,

 

수백년 동안 풍상을 겪어

글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병자사화후 275년만인

1731(영조7)에야 伸寃復官(신원복관)되고

정조 5년에 "忠毅(충의)"라는 諡號(시호)를 내려,

 

계유정난시 참살당한

민신, 조극관과 더불어

 

三重臣(삼중신 : 閔伸,趙克寬,金文起)으로

 

선생의 萬古忠節(만고충절)을 기리다.

 

事君盡節曰忠(사군진절왈충)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節義(절의)를 다하였으니 ""이요,

剛以能斷曰毅(강이능단왈의)뜻이 剛直(강직)하여

능이 삶을 끊었으니 ""이다.

 

당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잡혀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사실을 실토하였으나,

 

오직 선생만은 끝까지 불복하였다는 사실이

세조실록에 공개(唯 文起 不復)되면서 밝혀지고

사실상 軍權(삼군도진무)을 쥐고 있으면서

단종복위사건의 領導者(영도자)로 확인된 바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성삼문(成三問)은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숙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

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

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

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 어린 단종의 보필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정인지·박팽년 등 36명과 함께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의 공이 있다고 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단종복위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박팽년·권자신(權自愼)·

이개·류성원·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1456년6월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것

을 기회로 삼아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으나 거사 당일 한명회의 제의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거사를 중지했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날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승·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다.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처형·유배 등을 당했으며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

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모두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육신전(六臣傳)을 지은 남효온(南孝溫)은 무엇을 근거로 육신전을 지었을까?

문헌을 따라 육신전의 전말(顚末)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연산조(燕山朝)를 보면 남효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추려보면 이렇다.

남효온의 자(字)는 백공(伯恭)이며 호(號)는 추강(秋江)이다

또 다른 호는 행우(杏雨)와 벽사(碧沙)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성종 23년 임자(壬子)년에 죽었다.(1492) 향년(享年) 39세로 길지

않은 인생이었다.

 

죽은 해를 역추적 해보면 남효온은 단종 즉위년 계유(癸酉)년에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1453) 사육신 거사가 일어나던

해가 세조가 즉위한 병자(丙子)년이니까(1456) 남효온의

나이는 만으로 치면 세 살이 되는 것이다.

 

연려실기술 문종조(文宗朝)를 보면 남효온이 성종2년 신묘(辛卯)년에

나이 18세 때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소(疏)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1471)

(소릉은 단종의 생모 문종왕후의능 권씨를 말함)

그렇다면 남효온이 몇 살 때, 육신전을 지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연려실기술 연산조(燕山朝)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남효온이 일찍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큰 앙화가

장차 미칠까 두려워하므로 남효온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치도록 충신의 이름을 매몰시킬 수 있으리오?

(嘗著六臣傳,門人,怵以大禍將至,公曰吾豈畏一死,終沒忠臣之名乎)

 

제자가 있는 걸로 보아 이 당시의 나이가 최소 30~ 38세 그 사이에서

이 육신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남효온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남효온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다. 김종직은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성종임금은 세조의 손자이다. 성종조 때 사육신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 자체가

기휘(忌諱)사항이었다. 죽을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사육신의 이름을 거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김종직은 성종에게 사육신 거사의 두목 성삼문의 이름을 거명하며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리는 것이었다.

 

김종직은 성종의 변색을 보고 서서히 말하기를 만약 전하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이 김종직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어 목숨을

다해 전하를 지킬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그 때서야 얼굴색이 평상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 단종조(端宗朝)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成宗朝,金宗直啓曰成三問,是,忠臣也,成廟色變,金宗直徐曰脫有變故則,

臣當爲成三問,成廟色定)

 

남효온은 또 청한자 (淸寒子) 김시습을 따라다니며 일유(逸遊)했다

남효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을

벗 삼아 시국을 논했다.

 

남효온은 또,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실록에삽입한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과는 김종직 문하(門下)에서 같이 수학한

문우(門友)이기도 했다.

사람을 알고 싶거든 그 벗을 보라 했던가? 남효온은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

 

세조2년 6월 2일 경자조(庚子條)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성균사예 김질이 자기장인 의정부우찬성 정창손으로 더불어 변고가 있다고

세조에게 달려가 고변했다.

(成均司藝金礩,與其妻父鄭昌孫,請有密計)

 

남효온의 육신전을 보면 이 기록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록이 있다.

김질이 사육신 거사가 장차 성공되지 못할 줄 알고 내달려 자기장인

정창손으로 더불어 모의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자가 창경궁 잔치에 참석하지

아니하고, 운검을 서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먼저 발고하여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에 정창손과 김질이 말을 타고 내달려 경복궁에 나가 세조에게 고변했다.

(金礩,知事不成,馳與其妻父鄭昌孫,謀曰今世子,不隨駕,特除雲劒,天也,

不如先發告,僥倖得生,昌孫卽與礩,馳詣闕,上變告)

 

이 기록 말고도 일치하는 기록이 또 있다.

세조실록 이 경자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세조가 박팽년에게 거사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승, 유응부. 박쟁이 별운검이 되어 있는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세조가 거사시기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어제 명나라 사신을 창경궁으로 초빙하여 잔치

벌이는 틈을 타서 거사를 감행하려고 했는데 마침, 자리가

협소하다고 운검을 제거하는 바람에 거사가 중단되고 만 것입니다.

(問其施爲,對曰成勝,兪應孚,朴崝,皆爲別雲劍則,河難之有,問其時,對曰,

作日之宴,欲爲之,適因地窄,除雲劒故,未果)

 

육신전에도 이 기록과 일치한 기록이 있다.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있던 박팽년이 다음 해에 들어와서 형조참판이

됨에 성삼문 및 삼문의 아버지 성승,유응부,하위지,이개,유성원,김질,

권자신등으로 더불어 상왕을 복위하기로 모의하고, 당시에 명나라

사신이 와 있는 관계로 세조가 상왕(단종)을 대동하고 사신을 청하여

창덕궁에서 잔치를 베풀 적에 팽년등이 모의하여 성승과 유응부로 별운검을

삼아 잔치 벌이는 틈을 타 거사를 감행키로 하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세조의

우익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다시 세우기로 모의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마침,

그날에 세조가 운검을 파하라고 명을 내리는 바람에 그날 거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翌年,入爲刑曹參判,與三問及三問父勝,兪應孚,河緯地,

李塏,柳誠源,金礩,權自慎,謀復上王.時,天使來,光廟,欲同上王,

請宴於彰德宮,彭年等,謀曰以勝及兪應孚,爲別雲劍,當宴擧事,

閉城門,除羽翼,復立上王,謀已定,適於其日,上命罷雲劒)

 

 

김질(金銷)

 

 

생몰년 1422(세종 4)∼1478(성종 9)

 

 

본관 안동(安東) 김(金)

 

 

자· 호가안(可安), 쌍곡(雙谷)

 

 

시 호문정(文靖)

 

 

시 대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422(세종 4)∼1478(성종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사위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문음(門蔭)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해 있다가

 

 

 

 

성균관(成均館)에 수학(修學)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으며 문종(文宗)

 

 

 

 

즉위년(145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주부(成均館主

 

 

 

 

簿)에 이어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이 되어 성삼문(成三問) · 최항

 

 

 

 

(崔恒) ·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이 무

 

 

 

 

렵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

 

 

 

 

位)를 위해 거사를 도모하다가 발각이 두려워 장인인 정창손(鄭昌

 

 

 

 

孫)과 함께 세조(世祖)에게 고변(告變)하여(1456) 사육신(死六臣) 사

 

 

 

 

건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승진되고 좌익

 

 

 

 

공신(佐翼功臣) 3등에 추봉(追封)되어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

 

이듬해에는 황해(黃海) ·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가 되고 세조

 

 

 

 

7년(1461)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세조 9년(1463)에는 공

 

 

 

 

조 판서에 이어 병조 · 형조 판서를 거쳐 세조 12년(1466)에는 우

 

 

 

 

참찬(右參贊)에 승진되었다. 이듬해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세조

 

 

 

 

14년(1468)에는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는데 세조(世

 

 

 

 

祖)가 죽자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주관하였다.

 

 

 

성종 2년(1471)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

 

 

 

 

院君)에 진봉되었고 1474년에는 우의정으로 주문사(奏聞使)로

 

 

 

(溟)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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