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살점을 벗기는
극한 고문을 당하면서 끝까지 무인(군인)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유응부 세종과 문종등 선대왕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한 그의 기개는 지금의 위정자들이 자신의 입신에만
급급하여 신념을 변심하는 세태를 통렬히 야단치는 것같은
교훈을 주는것같고 옳다고 생각하는일에 초지일관하였던
옛 선조들의 기개앞에 눈앞에 이익만 추구하는 삶이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시조를 올리며 평보의 생각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 차단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메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兪應孚(?-1456) 호는 碧梁 조선조 세종.문종에게
중용된 무인으로 死六臣의 한사람.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스러
워서 세조에게 악형을 받으면서 “나으리 한칼에 없애버리고 단종
임금을 복위시키려 햇는데 간사한 무리의 배신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할말이 뭐있겠소 빨리 죽여주시오“ 하니 세조가 대로하여 살가죽을
벗기는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자세한 전말을 말하라 하자 옆에 같이 고문받던 성삼문등을 바라보며
“저런 애숭이 서생들과 일을 도모하다가 필경이꼴이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저 서생들에게 물어보라“ 하고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세조가 더욱노하여 단근질을 하니 배꼽을 찌른 빨갛게 달군 쇠꼬챙이가
식은것을 다시달구어 오라 호령하였다 한다..
해설:눈서리 치다:눈서리가 치면 모든식물이 다사그러지고 만다
모반하던 사람들이 다잡혀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말한다 눈서리는
세조의 포악함을 비유한것‘ 못다핀꽃;아직 다 피지도 못한 꽃 거사를
하려던 지사들을 말한다.
감상 :어제밤에 모진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눈서리가지
쳤단 말인가 정정한 큰소나무가 다넘어져 버렸으니 하물며 아직다
피지도 못한 곷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세조를 쓰러 트리고 단종복위를 하여 세종의 遺敎를 지키려 하였던
충신지사들이 잡혀 처형당하는 상황을 표현한 시조다
유응부는 文士가 아니고 한낱 武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서 그런 작품이 나왔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얼마나 젊잔으면서도 迫眞한 은유인가. 죽을을 앞한 무시무시한
고문앞에서도 자신만만하고 여유자작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통해서
이런 시조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수 있다 그래서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김종오 편저 옛시조 감상에서 발췌
유응부의 글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벽량(碧梁)이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그후 여러 벼슬을 거친다.
단종복위운동에서 성삼문,박팽년이 연출,기획이었다면 유응부는 행동대장이었다. 1456년 明나라 사신 환송연에서 유응부는 성승(成勝..성삼문 아버지)과 별운검(別雲劒)을 서면서 세조를 살해하는 역할을 맡았다. (別雲劒 .. 2품 이상의 무관이 왕 옆에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
그러나 한명회의 재치로 별운검은 제폐(除廢)되었고, 世子도 질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응부는 계속 거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이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뒷 날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세조의 친국(親鞫)에 세조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 사람이 성삼문과 박팽년이며, 유응부는 세조를 죽하(足下 ..동년배 또는 대등한 사람에 대한 존칭)라 부르며 世祖를 비아냥대어 끝까지 화를 돋군다.
세조 :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응부 : 明의 사신을 초청하는 연회에서 내가 한자루 칼로써 족하(足下)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 을 복위시키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 (김질의 배신)에게 고발 당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여주오.
세조 : 너는 상왕(上王. 단종)을 북위시킨다는 명분으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 아닌가?
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그 정상(情狀)을 심문코져 하였으나, 유응부는 끝까지 굴하지도,자복(自服)하지도 않 으며, 오히려 성삼문을 가리키며...
응부 : 사람들이 書生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하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쇠를 가져와 유응부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땅에 집어 던지며 "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세조가 유응부의 아내 순비를 권반의 종으로 주었다 하는데
권반은 누구인가????
1419(세종 1)~1472(성종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룡(子龍), 호는 무진(無盡). 할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근(近)이며, 아버지는 우찬성(右贊成) 제(踶)이다.
우의정 람(擥)의 동생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음보(蔭補)로 현릉직장(顯陵直長)이 되었다가 상서원승(尙瑞院丞)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형 람이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울 때 함께 참여했고, 1455년(세조 1)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 해에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이 되었으며, 1459년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같은 해 세조의 권유로 당상관으로서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1466년 경기도절도사 겸 개성부윤이 되었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유응부 유허바비
유응부 /유응부의 묘, 서울 동작구 .사육신 묘소..
단종복위를 추진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경원절제사를 지내고 1452년(단종 즉위) 의주목사, 1453년 평안좌도절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 왕권이 강화되고 신권이 약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세조의 불의의 찬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大義)가 내세워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다.
세조가 상왕(上王: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여 벌인 연회에서
성승(成勝)과 함께 별운검(別雲劒)을 맡게 되자 그 자리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세조가 연회 당일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했으며, 왕세자도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대로 거사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의 만류로 모의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이때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단종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를 포함한 주모자 6명은 체포되어 형살(刑殺)되거나 자살했으며, 이에 연루된 70여 명이 화를 당했다.
세조가 국문하면서 그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라고 묻자, "한 칼로 족하(足下:세조를 가리킴)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대답하여 극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1691년(숙종 17) 12월 사육신을 국가에서 공인함으로써
복관되었으며, 1791년 2월 절의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때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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