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黃鳥歌]
작가 유리왕
翩翩黃鳥 雌雄相依 (편편황조 자웅상의)
念我之獨 誰其與歸 (념아지독 수기여귀)
"펄펄 나는 꾀꼬리는/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내 몸은/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는(펄펄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다정히 노니는데,(쌍쌍이 즐기는데)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올사 이 내 몸은(외로운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가리.(뉘와 함께 돌아갈꼬.)
고구려 벽화
고구려 문화
高句麗 文化遺跡
**유리왕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기원전 19년 때의 일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 내에서 신하들이 동명왕(고구려 제1대왕 고주몽)에게 무엇인가 극히 만류했다. 일인 즉, 동명왕이 기존의 세자를 버리고 20년 만에 갑자기나타난 부여의 옛 아들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동명왕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자신의 몸은 쇠약해지는데, 아들 유리는 정치적인 기반이 너무 약했다. 아들 유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고구려의 속국 중 가장 강력했던 다물도주의송씨 여식과 결혼을 준비했다. 다음해 동명왕은 세상을 떠났다. 비록 정략 결혼이기는 했으나 유리왕은 부인을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유리왕 3년에 부인은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기존의 토착부족과 부여 계통에서 내려온 부족간의 알력 다툼이 매우 심했는데, 당시 가장 세력이 강했던 토착부족 골천(
川) 지방의 화희(禾姬)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화희와 정을 붙이지 못했던 유리왕은 적적한 마음을 사냥으로 달랬다.사냥 도중 유리왕은 한족인 치희(雉姬)를 만났다. 곧 치희를 위해 서궁을 마련했고 날마다 치히를 찾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한편 상대적으로 동궁왕후로 불리게 된 화희는 질투에 눈이 멀어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치희를 협박하여 쫓아낸다.
사냥에서 돌아온 동명왕은 치희를 찾아가나, 설득하지 못하고 홀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서로 정다워보이는 꾀꼬리 암수 한쌍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시로 읊었다. 이 시가 그 유명한 황조가이다.
▼ 유리왕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유리.
그는 어느 날 활을 잘못 쏘아 웬 아낙네가 이고 가는 물동이를 맞혔습니다.
물을 흠뻑 뒤집어 쓴 그 아낙네는 대뜸, "그러니까 아비 없는 자식이라지!" 하며 마구 욕을 퍼부었습니다.
유리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엎드려 울며 따지고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저는 아버지가 없나요?"
그러자 어머니 예씨는 지금껏 숨겨 온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 주었습니다.
"고구려의 주몽 임금이 바로 네 아버님이시다.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숨겨 둔 아버님의 유물을 찾거든
너도 이제 고구려 땅으로 떠나려무나." 유리는 그 날부터 산이며 골짜기를 헤매며 그 유물을 찾았으나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자기 집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을 자세히 보니
일곱 모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이 기둥이 바로 소나무 기둥, 내가 지금까지 엉뚱한 데서 헤맸구나.'
주춧돌 밑을 파 보니 과연 칼 동강이가 나왔습니다. 여간 야문 쇠로 만든 칼이 아니었습니다.
유리는 마침내 부러진 동강 칼을 품 속에 지니고 아버지 나라 고구려를 향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졸본 땅에 닿아 주몽 임금 앞에 나간 유리는 도막난 칼을 내 보였습니다.
주몽 임금이 자신의 것과 맞춰 보니 두 개의 동강은 이가 딱 맞았다. "네가 정녕 내 아들 유리렸다."
주몽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덥석 끌어 안았습니다.
이리하여 유리는 그 날로 고구려의 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18세, 고구려 건국 19년, 기원 전 1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그 해 9월, 주몽 임금은 뜻밖에도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마흔 살이 조금 넘은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아버지를 이어 유리가 고구려 둘째 임금이 되니, 이 분이 곧 유리왕 이었습니다.
고구려[ 高句麗 ] 제 2 대 유리왕[琉璃王]
?∼18(유리왕 37). 고구려 제2대왕. 재위 서기전 19∼서기 18.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
《위서》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동명왕 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부여에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고구려로 와서 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전 17년(유리왕 3)에는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 黃鳥歌〉를 지었고,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군사의 출동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漢)나라를 공격하자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다.
13년에 부여가 침범하였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리궁(豆谷離宮)에서 사망하였으며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왕자 도절(都切)을 태자로 삼았으나 1년에 사망하여, 4년에 다시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외국과 분쟁을 일으키므로 자결시켰다.
그뒤 14년 왕자 무휼(無恤)을 태자로 책립하였는데, 18년에 유리왕이 사망하자 그가 대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에 있으며, 동명왕과 유리왕 사이의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활동 등 여러 면에 있어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주몽과 대응하는 관계에 있는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 그리고 제6대 태조왕 이후는 다시 고씨(高氏)로 되어 있다.
또,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주몽과 유리왕의 혈통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혈통이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게 한다.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뒤에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리왕은 고구려 초기 왕실의 교체문제를 해결하여줄 수 있는 주요한 왕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明王篇(李奎報)
高句麗國號考(李丙燾, 서울大學校論文集 人文社會科學 3, 1956; 韓國古代史硏究, 1976)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金哲埈,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高句麗琉璃王小考(金龍善, 歷史學報 87, 198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就いて(池內宏, 東亞學 3, 1940;滿鮮史硏究 上, 1951). 〈金龍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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