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詩

이백과두보

이모르 2020. 12. 30. 12:21

 

 

 

두보와 이백

 

 

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라는 듯은 갈마. 도끼부 만들작  바늘침

 

로 이루어진 사자성어다

 

당나라뿐 아니라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은

 

자는 태백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촉 땅을 방문해 유년시절을

 

보냈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도교에 심취하였다

 

이백은 이미10세부터 시와글에서 신동이라 불릴만큼

 

그 재주를 보였다 하지만 공부에는 유난히 흥미가

 

없었기에 그 아버지가 스승을 붙혀 상의산이라는 산에

 

보네게 되었다

 

하지만 이백은 얼마 가지 않아 실증이 났고 스승몰래

 

산을 내려와 도망을 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기회를 엿보다 스승 몰래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에한 노파가 냇가에 앉아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이상하게 생각한 청년은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노파는 바늘을 만들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청년은 어떻게 도끼로 바늘을 만드느냐고 비웃었습니다.그러자

노파가 말했습니다."청년, 비웃을 일이 아니라네.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다네."

이때 이백은 순간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게 되고

처음부터 시도조차 하지아니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고 끝까지 하면 꼭 결과를 얻게 되는구나

마부작침磨斧作針.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노파의 말을 생각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한다

 

이백은 당나라의 천재시인 두보와 함께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최고의 시인이다 그는 서역과 무역하는 무역상의 아들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시와글에서만은 천재였다

 

단 그의 방랑에 가깝다시피한 생활로 인해 그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편이다

 

그는 중국 곳곳을 돌아 다니며 두보를 포함한 당시 당나라

 

천재시인 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그는 당나라 현종의 부름을 받고 한림공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지만은 현종 곁에서 정치적 능력을 발휘 하지못하고

 

시만 쓰다가 관직에 따분함을 느끼던 도중 현종이 아끼던

 

신하 고역사와 싸우고 관직을 내려놓게 된다

 

이후 그는 다시 두보와 함께 중국대륙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를 지었고 56세 현종이 안녹산의 난으로 도망을 가자

 

그의 열여섯번째 황자였던 영왕이 거병하였고 그곳에 군사로

 

있다가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다

 

싸움에 패해 감옥에 갇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유배 떠나게 되고 도중에 곽자의의 노력으로 사면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죽고만다

 

워낙 시의 성인이라 불렀던지라 그가 장강에 비치는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말이 들 정도로 그의 죽음역시 낭만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침상앞 바라보니/허어연 달빛

 

서리가 내렸는가/의심하였소

 

고개들어 산 위에/달을 보다가

 

고향이 그리워서/머리 숙였소.

 

(이백, 고요한 밤에)

 

 

靜夜思고요한 밤에 생각하다

牀前看月光 침상 앞에 월광을 본다疑是地上霜 땅위 서리인가,

擧頭望山月 고개 들어 산 위 달을 바라보고

低頭思故鄕 머리 숙여선 고향 생각

 

 

산중문답(山中問答)-이백(李白)

산에서 누가 묻기에 -이백(李白;701-762)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

누가 산에 왜 사느냐고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

웃기만 하고 답하지 않으니 내 마음 너무 편안해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

물에 복숭아 꽃잎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는 이 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

다른 세상이지만 인간세상은 아니라오

 

 술잔을 잡고 달에게 묻노라 : 이백의 시

把酒問月(파주문월)-李白(이백)

青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래기시) : 푸른 하늘에 달이 있은 지 그 얼마던가?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 나는 이제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물어나 보자.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 사람이 밝은 달을 더위잡고 오를 수는 없지만

月行却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 달은 도리어 사람을 따라 거니는 도다.

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 : 선궁(仙宮)에 걸린 나는 듯 하얀 거울

綠煙滅盡清輝發(녹연멸진청휘발) : 푸른 안개 모두 사라지니 맑은 빛을 발하네.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 다만 밤,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볼 뿐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 : 어찌 새벽녘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알랴.

白兔搗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 : 토끼는 갈봄 없이 불사약을 찧고 있건만

嫦娥孤棲與誰鄰(항아고서여수린) : 항아는 외로이 살며 뉘와 더불어 이웃 하는고?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 지금 사람은 옛적 달을 본 일이 없지만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 지금 달은 일찍이 옛사람을 비추었으리.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흐르는 물과 같아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 모두 밝은 달을 보곤 다 이와 같았으리라.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 오직 바라기는, 노래하며 술잔을 대할 때

月光長照金樽裡(월광장조금준리) : 달빛이 길이 황금빛 술 단지를 비추어 주기를.

 

 

 

    

<두보 712~770 중국 당나라의 시인>

 

그대 못 보는가,

길가에 썩은 물 괴어 있는 연못을.

그대 못 보는가,

앙상하게 등걸만 남아 있는 오동나무를.

오동나무는죽은 등걸로도 거문고를

만들 수 있고,

썩은 물에 교룡에 숨어 있는 것을.

사나이 죽어 관 뚜겅을 덮고 나서 비로소

 성패를 말할 수 있으니,

그대 아직 늙지도 않았거늘,

어쩌다 불우함을 한하는고.

심산유곡은 그대 있는 곳이 아니니,

벽력과 비바람가지 이네.

춘망(春望)

나라는 잃었으나 강산만은 여전해

성에 봄이오니 초목이 울창하네.

시국의 슬픔에 꽃들도 눈물 흘리고

이별의 한에 새들도 가슴 떨리네.

날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봉화에

집의 편지는 만금보다

귀해지고 흰머리는 굵을수록 짧아지니

아예 비녀조차 꽂을 곳이 없어라.

 

'귀뚜라미(促織)'

 

促織甚微細 아주 작고 조그마한 귀뚜라미 

哀音何動人 슬픈 소리가 어찌 마음을 움직이나 

草根吟不穩 풀 아래 불안한 듯 울더니 

牀下意相親 침상 밑에 찾아와 정답게 우네

久客得無淚 오랜 나그네 눈물 없인 못 들어

故妻難及晨 버림받은 아내 새벽 못 기다릴라 

悲絲與急管 서글픈 피리와 거친 거문고 소리

感激異天眞 감격스러워 천진함 그대로 일세.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

뛰어났으며, ()의 전겸익(錢謙益) 두시전주(杜詩箋注)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 두시상주(杜詩詳註)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보 [杜甫] (두산백과, 두산백과)

 

 

 

장가계

계림

태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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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토용

화산

북경의 금면왕조

계림의 이강쇼

 

황산 송성 가무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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