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에 자주가게 된다
전철이 놓여지고 서울 근교의 교통이 편리하게 되면서
역사적인 그리고 존경하는
다산일가의애환이 서려있는 남한강변의
예봉산 철쭉
다산 생가 능내리 여유당에서 예봉산에 올라 학문을 연마했다는 철문봉
예봉산 운길산 청계산 등
특히 철죽이
만개하는 예봉산의 능선에철문봉이라는 다산 형제들이 올라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아울러 예봉산에서 운길산으로 넘어가게 되면 수종사를 만나게된다.
수종사는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왕위를
찬탈한 조선7대왕 세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59년(세조 5)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현재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세조는 말년 자신을 뉘우치며 불교에 귀의한다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국보221호 세조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상원사의 목조 문수동자상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세조의시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 夜中聞松風뚫린
창 너머로 별을 헤아려 본다 / 穿窓見天星
탄식한다. 나의 노둔한 재질을 / 歎我駑劣才
학업에 진력한들 어이 능히 이루랴? / 服業安能成
한없는 고요 속에서 박명을 알지만 / 窮靜知薄命
그 누가 이 심정을 위로해 주리 / 誰能尉此情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의 사람들을 / 我懷古之人
행하신 바가 성실 않음이 없네 / 所用無不誠
성실은 도를 행하는 방법 / 誠以履道方
옛 것을 익혀서 더욱 정진하리라 / 業故用彌精
큰 근본이 잘 정해져야 / 大原旣克定
온갖 인재들이 많은 영화를 누리리라. 百才享多榮
세조를 생각하면 자연적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세조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단종.
안평대군.김종서.사육신 금성대군 등의
압축된인생사가 파노라마되여 찿아온다
태백산의 단종비각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되고
수양대군 의 동생 이고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은 죽어서
소백산 산신령이되었다 한다 사진은 영주에 있는
금성대군이 갇혀있다 사사받은 굴
영월의 서강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은 루에 앉아
달 밝은 밤자규새 울면 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였네
네울음 술퍼 내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 에게 말 붙이노니
삼가 부디 춘삼월 자규류엔 오르지마소.........
성삼문이
6세 되는 딸아이 수레 따라오며 울제 너는 여아 이니
반드시 살것이다 하며
북소리는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려보니 해는 차츰 기울고 있네
황천에는 주막하나 없을테니
오늘밤은 뉘집에서 자고 갈고.........
오호 애달다 삼문의 이몸이 죽어가서의 충절의 호방함도
쓸쓸한 저승 길이랴!!!!!!!!!
김시습
김시습, 그는 누구인가?
다섯 살에 ‘대학’과 ‘중용’을 배우고 시와 산문을 지었던
신동.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했던 생육신. 머리 깎고 유랑하며
불교 공부에 매진했던 승려. 천재 시인이자 전기소설의 저자.
이 모든 수식어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조선의 천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화려한 이력이다.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김시습의 상(像)을 그려내지 못한다.
김시습은 하나의 그릇으로 담을 수 없는 불기(不器)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세(五歲)’란 별명으로 불렸던 천재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난
김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깨치고,
3살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라는 한시를 지은 천재였다.
그 소문이 널리 퍼져 김시습은 다섯 살에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소문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세종은
‘아기의 공부는 하얀 학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듯 하도다’
란 글귀를 내놓고 김시습에게 맞받아 대답하게 하니
어린 시습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임금의 덕은 눈부신 용이 바다에서 노니는 듯 합니다’
라고 답했다.이에 세종은 김시습을 ‘오세(五歲) 동자’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장성하면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조했는데,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 했다.
왕방연
왕방연은 사육신에 의해 단종복위 기도가 발각된뒤 폐위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때에 의금부도사 로서 호송을하고 돌아올때 울적한
마음을 욿은 시조이다
천만리 머나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이글은 여러곳에서 참고하여 편집하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