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23일
예봉산 갔는데
갑자기 폭설에 진눈깨비 나려 산정상을 덮으니
성삼문의 시 한수가생각 나더라구요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 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 청청(獨也靑靑)하리라.
세상사람들이 모두세조편이 되더라도
자신 만은 지조를 지키겠다는 봉래산(여름금강산)
을 백설이 덮어도 자신은 산꼭대기 푸른
소나무되어 푸르름을 간직하리라
이시가 주는 교훈은 현재 어지러운 세상
어지러이 시루에 따라 살지라도 무엇이
잘못 되가고 있는지는 알고 갔으면 하는 마음 으로
성상문의 충절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래글 위키백과에서 옮겨 편집한 것입니다
성삼문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을 모았다.
사육신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사육신에 속해있지는 않으나 아버지인 성승 그리고 결국
이들을 배신하게 되는 김질 등이었다.
이들은 세조를 폐위시키고 상왕이 된 단종을
복권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거사의 내용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별운검으로 서게 되는 유응부와 성승이 세조와
그 일파 등을 죽이고 명나라에게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송연 당일 이상한 낌새를 눈치를 챈 것인지
세조가 별운검을 축연 자리에서 빼버렸다.
성삼문은 반대했으나 결국 운검은 없는 것으로 통과.
거사를 치르기로 한 이들은 망설이다가 후일을
기약하며 일을 미루고 말았다.
육신전은이 장면 묘사도 쓸데없이 자세하다.
이 때 동료 유응부가 그래도 한명회부터 베어버리고 들어가서
거사를 강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이 반대해서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국문받을 때 유응부는 성삼문을 향해
"너는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또는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 놈들과 거사를 치른것이 일생 일대의 실수다!"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유응부는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의 친구라서 성삼문의
아버지뻘 되는 동료였다.
이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 꼴을 보며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가서 이 일을
죄다 털어놓았고 결국 이들의 모의는
이대로 발각이 되었다.
주동자들은 끌려가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진(자결)한
유성원을 제외하고 모두 끌려가 극형을 받았다.
실록에는 국문 기록과 성삼문 등의
진술 위주의 기록만 존재하지만, 남효은의 소설 육신전에서는
성삼문은 세조를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전하가 아닌
나리(나으리)라고 불렀고,
유난히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또한 세조가 "네가 지금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준 봉록은 왜 먹었느냐?"라고 묻자
"나으리가 준 녹(봉급)은 하나도 먹지 않고
우리 집 창고 안에 고이 쌓아 두었소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조사해 보니 과연 그랬다더라는 식의 일화가 추가.
함께 동문 수학했던 신숙주가 세조와 함께 서 있자
세종의 고명을 받들지 않은 변절자라며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는 것도 육신전에만 전하는 이야기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 단종 복위 운동을 모의하며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지만 죽어 마땅하다라고
했다고 김질의 고변에 나온다.
근데 이 말은 신숙주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일종의 '뒷담화' 식으로 동료들에게 한 말이다.
이때 딱히 신숙주에게만 포인트를 준 것은 아닐텐데도
이야기가 너무 두고두고 남는 바람에
신숙주는 이날 이때까지 변절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신숙주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게 신숙주와 엮이는 것은
실제 사육신의 정변 시도가 있고도
몇 백년 뒤인 조선 후기의 일이다.
함께 모의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문 후
참수현 당한 후 사지가 찢기는 거혈형에 처해졌다.
사건이 컸던만큼 집안이 아예 풍비박산나서
아버지, 동생들, 아들들이 멸족당했음은 물론
먼 친척들도 일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으며,
여자라서 살아남은 부인 및 딸들도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둘째 아들만이 몰래 도망쳐 성을 바꾸고 살아서
지금까지 집안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성삼문의 아내는
차산(次山), 딸은 효옥(孝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박종우에게 주어졌다가,
성종 6년(1475년)에 석방된다.
계유정난이 1456년이니 거의 20년만의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복위시키려던
단종마저도 이 일에 연루된 것이다.
더구나 이 일에 단종이 연루되었다는 말 자체가
성삼문의 입에서 나왔다고 조선 왕조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단종을 생각했다면 이건 목숨 걸고
비밀로 붙였어야 했을 일이었다는 점에서
완벽한 배신이나 다만 이는 고문에 의한 충격이나
유도심문등으로 잠시 냉정을 잃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때까지 형식상이나마 상왕 대접을 받고 있던 단종은
아예 폐위되었고 바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안좋았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훗날 숙종 시절에 단종이 신원되며 마찬가지로
왕으로 복권되었고, 영조 시절에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성승 등 함께 희생당한 다른 이들과 함께 김시습이
몰래 시체를 수거해 노량진에 묻혔는데
그 사육시뇨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성삼문의 다른 詩
<臨死賦絶命詩>
擊鼓催人命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 재촉해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기울어
黃天無一店 황천 길엔 주막 한 곳 없다니
今夜宿誰家 이 밤을 뉘 집에서 묵어갈고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인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듯 그 뉘땅에 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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