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호선 구번출구/문명희
살아온 날이 절반이 지났다
만권의 책도
만리의 여행도
좋은 시 한 편도
그림 한 장도
이루지 못한 꿈이
쪽문을 두드린다
살아갈 날이
못다 한 청춘이
마흔아홉 해나 남아 있다고
절뚝이는 지하철이
젖은 철로를 달려간다
선인문/문명희
회화나무는 기억한다
구중궁궐의 새까맣게
썩은 전설 걸린
문정전 앞뜰 회화나무의
뼈속앓이 그날을
염천에 쇠죽 끓이는 일기가 타오른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한 여드레
뒤주 속의 창자 끊어지는
어린 세손의 애끓는 소리를 들었는지
하늘도 땅도 회화나무도 함묵했다
하늘을 가르고
나무를 가르는
발가벗겨지고
찢어지고
타버린
역사의 서슬을
삼백년
그날의 풍상을 닮은 회화나무는
아직도 굳게 선인문을 지키고 섰다
보지 못한 기억을 앞세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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