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장희빈과사도세자

이모르 2021. 1. 7. 19:43

 

 

저녁 생일 파티를 사돈들과 약속한 시간이 저녁630

시간이 남아 창경궁으로 향하였다

창경궁은 조선 성종때 건축한 궁궐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붙어있고 종묘로 통한다

 

 

3월의 창경궁의 원앙  

 

3월에 왔을 때 연못의 원앙이 하나도 없이 사라졌다

원앙이 떼로 날라왔다 가버린 모양이야??“

창경궁관리소에서 어디 안식처를 만들어

보호하고 있는게 아닌가?”

백송을 지나 연못을 돌고 창덕궁으로 넘어간다

여기만 오면 장희빈과 사도세자 생각이 난다

비운의 장희빈은 이곳 창경궁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조선의20대왕 경종의 어머니이다

경종 그는 특별히 아픈데도 없이 급사하였기에 독살의혹이 문제되어

영조 재위기간 내내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크고 작은 난이 빈번하였다

또한명 사도세자

비운의 왕자가 뒤주에 갇처 죽임을 당했다는 것부터

기상천외한 일이다

이유야 있겠지만 권력의 무서운 암투로 이모든 것이

당파에 얽힌 싸움질에서 발생한다

남인 서인 .노른.소른 거기서 또 벽파 시파로

애석한 것은 현대의 정치또한 다를바가

없다 무슨무슨계 어느계파 매일 정쟁이 씨끄럽다

 

그들은 격동의 영화를 보내고 지금은 각각의

무덤에서 안식하고 있다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한 서오능중 숙종의 원비

인경황후 김씨 그리고

한쪽 편 구석에 위치한 장희빈묘소다.

 

장희빈이 폐서인이 되게한 결정적인 요인 중하나

김만중의 언문체 사씨남정기

 

아래글은 키백과 및 희망의 문학에서 발췌 한것입니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은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구성이라기보다는

당시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총애했던 숙종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궁녀가 이 소설을 숙종에게 읽어 준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게 했다는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본래 한글로 지어진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은 한문으로 번역했으며

이를 궁궐에 들어갈 기회가 생기자 궁녀들에게 공짜로 나눠주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요약

 

지은이 : 김만중 연대 : 숙종 15 ~ 18년 간 갈래 : 국문 소설, 가정 소설,

 

풍간(諷諫 : 완곡한 표현으로 잘못을 고치도록 말함)소설

 

배경 : 중국 명나라 초기, 중국 북경 금릉 순천부

 

문체 : 문어체, 역어체(원본) 현대어 풀

 

이 본문은 산문체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추보식 구성

 

발단

 

중국 명나라 세종 때 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희는 늦게야 아들 연수를

 

얻는다. 연수는 열다섯 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 학사를 제수

 

받는다.

전개

 

유한림은 덕성과 재학을 겸비한 사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씨가 9이 되도록 출산을 못하자 유한림은 사씨의 권유에 의

 

하여 교씨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한 여자로 아들을 낳자 사

 

씨를 내쫓고 정실 부인이 되기 위해 남편에게 사씨를 참소한다.

 

위기

 

교씨가 자기 아들을 죽이고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 씌우자 유한림은 사

 

씨를 폐출시키고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절정

 

교씨는 문객인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유배시키

 

고 지방관이 된 동청과 함께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그 때 조정은 유한림에 대한 혐의를 풀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을 처형한다.

결말

 

정배에서 풀려난 유한림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씨를 찾아 전죄를

 

사과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교씨를 처형하고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아들인다.

 

 

 

제재 : 처첩간의 갈등

 

주제 : 처첩간의 갈등과 사씨의 고행과 권선징악

 

인물 : 사씨 - 현모양처로서 성품이 곱고 착한 여인의 전형.

 

교씨 - 위선적이며 교활하고 표독스런 악인의 전형.

 

유연수 - 판단력이 없고, 양반사대부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봉건적

 

사고방식을 지닌 전형적 인물이나 본성은 착하다.

 

동청 - 교씨의 정부(情夫)로써 악인의 전형엄숭 - 유한림을 제거하는데 앞장을 서는 간신.

 

 

 

 

  역사적 사실

 

사씨남정기

인물

 

숙종

유연수

 

인현왕후 - 아들 없음

사 씨 아들 - 아들 인아

 

희빈장씨 - 아들 균(경종)

교 씨 아들 - 아들 장주

사건 전개

 

희빈 장씨의 무고 - 인현 왕

 

후 폐위 - 인현 왕후 복위

교 씨의 모해 - 사 씨 추방 - 사 씨

 

복권

 

 

 

 

 

 

 

 

 

 

통명전과 양화당은 나란히 같이 있다

 

 

 

 

 

 

 

 

 

 

장희빈의 침소였던 양화당 뜰앞에서 사약을 마셨을까??

 

 

 

이토록 처절한 황실내의 권력암투는 당시로서는 과학적인

수사 방법도 없고 그저 모함과 밀고로 일관했으니 실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모를 적은 장희빈은 죽는 순간까지

당파의 싸움질이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노론의 입장에서 쓴 인현왕후전

숙종실록에 정설로 기록된 부분조차도 엄격히 대비되는데

이로서 당시의 권력 암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할수

있어 장희빈은 당쟁의 슬픈 희생양으로 비유된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의 반대편에 있었던 남인들?????

현대의 정치인들도 교훈 으로 삼아야 될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슬픔이 다가온다 적전 무장해제를 당한 이순신

정치적 음모로 건강했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배를 움켜쥐며 복통을 호소하다

죽음을 맞이한 후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둔 영조가 들어서자 사도세자를 사사하고

이어지는 궁중의 혼란은 비정한 권력의 암투에서 시작되었다

 

자진? 사사?

노론의 입장에서 집필된 수문록 인현왕후전에는 장씨가

숙종에 의해 강제로 사사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에 반해,

정사 기록인 숙종실록 승정원일기에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인현왕후전에 묘사된 장씨의 최후이다.

 

"옛 한무제도 무죄한 구익부인을 죽였거니와 이제

장녀는 오형지참(五刑之斬)을 할 것이요.

 죄를 속이지 못할 바로되 세자의 정리를 생각해서

감소감형하여 신체를 온전히 하여 한 그릇의

독약을 각별히 신칙하노라."궁녀를 명하여 보내시며 전교하사

,"네 대역부도의 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빨리 죽임이 옳거늘 요약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죽을 죄라. 동궁의 낯을 보아

형체를 온전히 하여 죽임이 네게 영화라, 빨리 죽어

요괴로운 자취로 일시도 머무르지 말라."(중략)"네 중궁을 모살(謨殺)하고

대역부도함이 천지에 당연하니 반드시 네 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梟示)할 것이로되 자식의 낯을 보아

특은으로 경벌을 쓰거늘 갈 수록 태만하여 죄 위에 죄를 짓느냐?"

장씨 눈을 독하게 떠 천안(天顔=용안)을 우러러뵈옵고 높은 소리로 말하기를

,"민씨 내게 원망을 끼치어 형벌로 죽었거늘, 내게 무슨 죄가 있으며

전하게서 정치를 아니 밝히시니 인군의 도리가 아닙니다.

 

"살기가 자못 등등하니 상감께서 진노하사 두 눈을 치켜 뜨시고 소매를 걷으시며

여성하교하여 이르시기를,"천고에 저리 요악한 년이 또 어디 있으리요.

 빨리 약을 먹이라."장씨, 손으로 궁녀를 치고 몸을 뒤틀며 발악하여

말하기를,"세자와 함께 죽이라. 내 무슨 죄가 있느냐?"상감께서 더욱

노하시어 좌우에게,"붙들고 먹이라."하시니, 여러 궁녀 황황히 달려들어

팔을 잡고 허리를 안고 먹이려 하나 입을 다물고 뿌리치니 상감께서

내려보시고 더욱 대노하사 분연히 일어나시며,

"막대로 입을 벌리고 부으라."하시니, 여러 궁녀 숟가락

청으로 입을 벌리는 지라 (중략) 상감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아니

계시고,"빨리 먹이라."하여, 연이어 세 그릇을 부으니 경각에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섬돌 아래 고꾸라져 유혈이 샘솟듯 하니, (중략) 상감께서

그 죽음을 보시고 외전으로 나오시며,"시체를 궁 밖으로 내라."하시고,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가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기에 지금껏

인현왕후전등 민간에 널리 보급된 소설과 야사에 묘사된 장씨의 최후의

모습이 정설로 신봉되어 왔으며, 정사가 공개된 후에도 죽음의 과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사사 역시 자진의 한 형태이니 사사된 것이다'

절충되어 해석되는 실정이다. 또한 1961 인현왕후전으로

극본을 짠 정창화 감독의 방화 장희빈이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아류작인 영화·드라마·서적 등이

연이어 만들어지니 권선장악의 결말을 원하는 민중들은

요녀 장희빈의 비참한 죽음만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숙종실록)  승정원일기에 사사설을 부정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숙종이 승정원 에 명하여 정식으로 장씨의 자진을 명한 1701

음력 10 8일의 유시(酉時), 판중추부사 서문중·우의정 신왕

이조판서 이여가 숙종을 청대하여 마지막으로 희빈 장씨의 구명을 청하였고,

숙종 의 뜻이 완고하여 자진의 명을 번복할 수 없을 깨닫자 구명을 포기하고

희빈 장씨를 자진시키는 수단에 대해 물었다.

 

이에 숙종이 사약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답하자

서문중 들이 말하길, 왕세자를 낳고 기른 사친에게 유사(攸司)

형벌을 쓰는 것은 주례(周禮)에서 금한 것이며,

궁 안에선 사사를 할 수 없으니 사제로 내보내 사약을 써야 하는데 이는

유사의 형벌이 되는 것이라 지적하고 공족(公族)의 사죄(死罪)

전인(甸人)에게 넘겨 목매어 죽인다고 간언하였다.

 

자리에 함께한 모든 대신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한숙종

자진을 명한 것은 유사의 형벌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답하였으며, 앞서승정원 에 명하여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는 교지를

적어 장씨에게 내리도록 했던 어명 역시 유사의 형벌이라는서문중 들의

지적에 따라 즉시 회수토록 하고 대신 다음날

조보(朝報)에 자진의 명이 있었음을 싣도록 하였다.

 이는 희빈 장씨가 사사되었을 가능성이 사실상 희박함을 증명한다.

 

 

 

뒤주속에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문정전

 

 

 

 

 

 

 

 

 

 

 

 

 

 

 

 

 

 

 

 

 

 

 

 

 

 

 

 

 

 

 

 

 

 

 

 

 

 

창경궁 명전전과 부속건물들 사적:123호 19631 18일 지정

조선 성종14(1483)창건 광해군7(1615)재건

 

 

 

 

 

 

 

 

 

 

 

 

서오릉 숙종과 인경황후의묘

 

   서오릉 희빈 장씨(옥산부대빈 장씨)

 

 

 

사극속에 장희빈

 

 

 

화성에 있는 융릉(사도세자묘)

 

 

 영조의 어진 우 장조(사도세자)의 초상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1749년에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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