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한 생원(生員)이 여러 사람과 더불어,북한산 (北漢山)
상추지행(賞秋之行)을 하려는데,남대문 (南大門) 안에서
한 중을 만났기에, 생원이 묻기를,
“너는 어느 절에 있느냐?” 하니, 중이 말하기를,
승(小僧)은 태고사(太古寺)에 있습니다.” 하였다.
생원이 말하기를,
“너의 절에 어떤 볼 만한 서적(書籍)이 있지 않느냐?” 하니,
중이 말하기를, “별로 볼 만한 책 은 없으나, 다만 강목(綱目)
한 질이 전해 오는 것이 있습니다.” 하니,
생원이 매우 좋아하며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그것을 보고 싶으니, 네가 가서
예닐곱 책을 빌려 중흥사(中興寺)로 오거라.
나는 의당 그곳에서 묵을 것이다.”
한즉, 중이 곧 본절로 돌아가서, 생원이 책을
빌려달라는 일로, 주지승에게 말하니, 주지승이 말하기를,
“양반이 보고자 한 바에는, 역시 가지고 가서
본 뒤에, 찾아옴이 옳으리라.” 하니, 중이 이에
일곱 권의 책을, 중흥사로 가지고 가니,
날이 이미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는데, 생원이 그를
보고 기뻐 가로대, “너는 과연 신의(信義)가 있구나.” 하니,
중이 말하기를, “생원님의 분부를 감히 어길 수 없어
가지고 왔습니다만,
이제 밤이 되었으니, 어찌 보시겠습니까?” 하니,
생원이 말하기를, “노인이 절에 들어 묵을 것을 헤아리니,
목침 (木枕)은 불편하겠는 고로, 이 책을 빌려 하룻밤 편안히
베고 자고자 하니,
내일 아침 도로 가지고 감이 좋겠다.” 하니,
중과 여러 사람들이 배를 움켜잡고 웃더라.
김삿갓의 시 (풍자와 해학...일화(逸話)편)
환갑 잔치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 잔치에 바쳤네.
還甲宴
환갑연
彼坐老人不似人 疑是天上降眞仙
피좌노인불사인 의시천상강진선
其中七子皆爲盜 偸得碧桃獻壽筵
기중칠자개위도 투득벽도헌수연
*환갑 잔치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 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는 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하였다. 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元生員
원생원
日出猿生原 猫過鼠盡死
일출원생원 묘과서진사
黃昏蚊첨至 夜出蚤席射
황혼문첨지 야출조석사
*김삿갓이 북도지방의 어느 집에 갔다가
그곳에 모여 있던 마을 유지들을
놀리며 지은 시이다. 구절마다 끝의
세 글자는 원 생원(元生員),
서 진사(徐進士), 문 첨지(文僉知),
조 석사(趙碩士)의 음을 빌려 쓴 것이다.
피하기 어려운 꽃 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 같고 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難避花
난피화
靑春抱妓千金開 白日當樽萬事空
청춘포기천금개 백일당준만사공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
홍비원천이수수 접과청산난피화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 뒤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기생과 함께 짓다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김삿갓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
-기생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김삿갓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기생
妓生合作
기생합작
金笠. 平壤妓生何所能
김립. 평양기생하소능
妓生. 能歌能舞又詩能
기생. 능가능무우시능
金笠. 能能其中別無能
김립. 능능기중별무능
妓生. 月夜三更呼夫能
기생. 월야삼경호부능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젖 빠는
노래 시아비는 그 위를 빨고 며느리는
그 아래를 빠네.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둘을 빨고
며느리는 그 하나를 빠네. 하나와 둘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단 곳을 빨고
며느리는 그 신 곳을 빠네.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嚥乳章三章
연유장삼장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卽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卽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卽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어느 선비의 집에 갔는데
그가 "우리집 며느리가 유종(乳腫)으로
젖을 앓기 때문에 젖을
좀 빨아 주어야 하겠소"라고 했다.
김삿갓이 망할 놈의 양반이 예의도
잘 지킨다고 분개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옥구 김 진사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한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沃溝金進士
옥구김진사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
옥구김진사 여아이분전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창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窓
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양반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兩班論
양반론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
피양반차양반 반부지반하반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
조선삼성기중반 가락일방재상반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
내천리차월객반 호팔자금시부반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
관기이반염진반 객반가지주인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럼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 내력을 밝힐 수 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 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서당 욕설시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辱說某書堂
욕설모서당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생도제미십 선생내불알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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